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선교ㅣ복음화

도시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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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1-31 ㅣ No.13

인류가 큰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한 대재앙 같은 것을 겪지 않는 한 대도시 중심의 문화인 도시문명이 사라질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갈수록 대다수의 인간에 있어 구원이란 도시 속에서 도시문화와 함께 그를 통해서 이뤄질 수밖엔 없다. 즉 전원 속의 수도원 같은 그런 분위기에서 대자연과의 친화를 통한, 이른바 감정적인 영향에 의한 구원이란 갈수록 어렵게 되었다.

우리 교회의 선교방법도 그런 면에서 간구되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사이 선교사업이 결국은 감정적인 수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온갖 묵상회·온갖 부흥회·온갖 기도회 등등과 같은 소위 피정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음은 슬픈 일이다. 왜냐면 그런 시대착오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궁극적인 해결을 이룰 순 없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설사 그런 방식에 의해 뜻한 바대로 많은 이가 신적 체험을 하고, 신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열성신자들이 교회 안에 넘칠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외면적인 선교성과로만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런 식으로 오직 신자 수의 증가, 종교’적’인 활동의 활발함, 그 사회 내에서의 교회의 확고한 위치정립 등등의 외적인 성과만 구하며 도시선교를 한다면 가시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특히 하느님의 견지에선 형편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피정은 필요하고 신앙에 있어 감성적인 접근이 반드시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일상의 삶 속에서 신앙적 깊이와 함께 윤리적 명징성이 높아가도록 교회와 신자들을 이끌어나가야 이 도시문명의 구조적 해악성을 근본적으로 극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자세는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준다. 그는 헤롯왕을 비롯한 왕족들, 세리들, 군인들, 바리사이파인이나 사두가이파인들 등등의 그 당시의 도시인들에게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언행일치의 행위로 나타나는’ 회개를 이루라고 분명히 단언하고 그를 곧이 곧대로 실천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였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공동체적 사회 대회개운동 같은 것을 펼치려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아 옥에 갇히고 결국은 참수당하여, 이른바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선교엔 실패했지만, 그의 죽음은 뒤에 메시아 시대의 길을 마련해 준 순교의 의미와 더불어 인류역사에 있어 인간성숙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린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옛날 세례자 요한은 도시 밖 광야에서 살며 외치는 말그대로 ’광야의 소리’였지만, 이미 도시문명과 뗄레야 뗄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는 지금의 우리 교회에게는 차라리 까를로 수사의 표현대로 도시 속에다 광야를 마련하여 거기서 도시인들과 함께 살며 영성적인 ’광야의 소리’ 역할을 해야 하는 보다 어렵고도 힘든 임무가 맡겨져 있다. 하지만 ’두려워 말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는 그 소명에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용감하게 투신해야 한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그의 저서 ’불교유신론’에서 "요즘의 참선하는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염세가 되는 것뿐이며, 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독선이 안되려야 안될 수 없다. 불교는 구세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의 가르침인 터에, 부처님의 제자된 사람으로서 염세와 독선에 빠져 있을 따름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갈파하였다.

이는 결국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신앙’의 해악성을 지적한 것이다. 도시 속에 살아가야 하는 우리 교회라면 우리 역시 도시인들에게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언행일치의 행위로 나타나는’ 회개를 촉구하고, 그런 방향으로 선교를 펼치며 동시에 그런 모습으로 교회 역시 그들과 함께 살아나가야 할 것이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피해 혼자서 나와 살았던 구약의 의인 롯처럼 되어서야 결코 그 도시, 곧 사회를 근본적으로 구할 순 없는 것이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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