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강론자료

대림 2 주일-나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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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03-01 ㅣ No.379

대림 2 주일(나해)

 

        이사야 40,1-5.9-11    2베드로 3,8-14    마르코 1,1-8

 

    2002. 12. 8.  인권주일

 

주제 : 하느님의 시간

 

오늘은 대림 두 번째 주일이며 인권주일입니다. 대림시기를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인류가 기념하고 기억하는 하느님의 육화는 가까워집니다.  ‘육화’는 그리스도교 교리 내용의 하나로, 영적인 하느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육신을 취하신 것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축제일로 기억하는 때는 12월 24일부터 25일에 걸친 시간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육화(肉化)의 교리는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의 진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간간이 사용하는 말 중에 ‘알아듣지 못하겠다면 외우라’고 하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대림절 시기를 지내면서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거나 그 존재를 거부해도 좋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너나없이 바쁜 세상에서 허겁지겁 살아가는 우리는 관심가질 사항이 많다는 소리를 앞세워 때로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무시하거나 밀어붙일 때가 있습니다.  연말이면 습관적으로 맞이하는 송년회도 그런 일의 하나일 것이고 한 해를 보내면서 다음 해를 준비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그와 같은 의미가 조금 담긴 일을 반복하는 것의 하나일 것입니다. 또 오늘이 12월 8일이니 날짜 계산으로는 이제 20일이 남지 않은 성탄축제일을 맞이하는 일도 자칫 잘못하면 늘 맞이하는 날의 하나로 생각하고 별다른 의식 없이 지내는 하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살 수 있을 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도래’를 준비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축제일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중요한 사실을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일이었고 관심을 끌 이유가 조금도 없는 옷차림이었습니다. 낙타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광야에 살던 초라한 사람이 ‘하느님께서 오시니 합당한 준비를 하라’는 선언은 당시 사람들의 기준에 따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일의 한 가지였습니다.  세월을 지내고 나면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 처음부터 우리네 삶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시작은 작았지만 올바른 정신을 갖고 그 일을 대하니 그것이 중요한 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2002년 12월을 지내고 있는 우리의 삶에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오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는지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별 감흥이 없는 사람들은 이사야 예언서 독서를 통해서 그 의미를 짐작해 봐야 할 것입니다.  바빌론 제국과의 한판 승부에서 밀려 나라가 망하고 노예로 전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예언자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고이 간직하려는 사람에게나 힘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이것도 포기하고 저것도 손을 놔버린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약속이 와도 달라지는 일이 없는 법입니다. 외국 민족의 노예로 전락하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희망을 버리면 잘못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사야 예언자는 목청을 높입니다.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고 벌을 받을 만큼 받았으니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준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스레 만든 비뚤어진 길을 이리저리 돌아서 하느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 길을 내고 벌판에 길을 닦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은 깎아내리고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야 하는 임무’가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기쁨에 참여하려면 하느님에게서 벗어난 그만큼 돌아올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말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셔 들이는 일이 사람들에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려는 사람들은 그 하느님과 함께 올 축복의 기쁨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사람이 계산하는 방법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기쁨을 누리려고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할 만큼 길다고 하는 데 비하여, 힘겨운 일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항의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그렇게 다르게 말하기는 해도 분명 손목에 얹힌 시계의 초침과 분침 그리고 시침은 늘 일정하게 같은 속도로 움직입니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시간계산을 알고 올바로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대로 보내려면 베드로 사도가 쓴 독서의 끝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화목과 화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만이 뛰어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다 못났다고 말하는 세상,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큰소리로 말하는 세상에서 화목은 어떤 방법으로 실천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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