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24 주일-다해-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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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신부 [gold] 쪽지 캡슐

2001-09-15 ㅣ No.345

연중 24 주일 (다해)

 

        출애굽기 32,7-11.13-14.     1디모 1,12-17       루가 15,1-32 (또는 1-10)

    2001. 9. 16.

주제 : 하느님의 욕심-하느님이 바라시는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지난 한 주간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만, 지난 주 화요일의 사건 이후, 세상에서 평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 거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요즘은 멀리 떨어져있다고 해서 나와 아무런 상관없다고 하기는 힘든 세상입니다. 세계 무역센터 빌딩 폭파 때문에 희생된 이념(理念)의 희생자들을 미사 중에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고 말들은 하는데, 행복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만들어내는 모습도 다릅니다. 우리들 각자 안에 숨겨진 잘못된 자세가 하루라도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필요한 세상입니다.

 

거창하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만,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연대파업이나 테러는 힘이 약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수단이라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그렇게 공동체의 힘으로 덤비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 때문에 하는 행동이겠습니다만, 자신의 권리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로 인해서 희생될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는 행동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너나할 것없이 우리들 각자가 가진 욕심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세상의 행복이란 사람이 가진 욕심을 어떻게 중화(中和)시켜야 할 인가하는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권리(權利)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권리라는 말은 '의무를 다한 다음에 오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무례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기만 하면 자기 권리가 높아지고 강화될 거라고 생각하는 세상은 분명 어디서부터인가 잘못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출애굽기 독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상당히 극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바다를 건넌지 '석 달'만에 '시나이 산'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듣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러 그 산 위로 올라간지 40일만에 마음이 돌아섭니다. 노예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때는 짜릿하고 사람 사는 맛이 무엇인지 느꼈을 그들이었겠지만, 지도자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하나로 그들은 신을 만듭니다.  모세를 통해서 일하던 하느님, 야훼는 눈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갖고 있던 금붙이를 이용하여 송아지 형상을 빚어 하느님이라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해낸 하느님이라고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이 행동이 애써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했던 하느님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해봐야 소용없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이런 일은 우리는 심심찮게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그 일들이 만들어낸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고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은 그냥 봐줄 수 없는 잘못이라고 판단하는 일, 하느님은 너그러운 분이시니 내가 하는 일을 모두 이해해주실 거라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일에는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는 일들이 설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분명 잘못된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만이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잘못된 기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발전하기를 바랄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세상에 대해 가진 생각을 추론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복음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두 세상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실지 짐작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의 이야기, 두 번째는 은전 한 닢을 잃어버린 어떤 여자의 이야기, 세 번째는 집을 무작정 나가버린 작은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는 재물과 관련된 이야기이고, 뒤의 한 가지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멀쩡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올바로 모실 수 있다는 이상주의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교육'을 목표로 한 이야기입니다.  목자에게 기쁨을 가져온 것은 들판에 온전하게 있었던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아니라 고생 끝에 되찾은 한 마리 양(羊)때문이었고,  집안을 온통 쓸고 닦으며 헤맨 여인에게 기쁨을 가져온 것은 잃었던 은전 한 닢이었습니다. 혹시 이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 나도 하느님께 기쁨이 되고자 일부러 길 잃어버린 양이 되고 싶다거나 주인의 손바닥을 벗어난 은전 한 닢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욕심이 많은 분이십니다. 그 욕심은 사람이 생각하는 재물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의 첫 자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나이 산에 도착해서 금송아지로 하느님을 대신하는 우상을 만들고 싶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봐도 아는 일이고,  죄인들과 의인들을 구별해서 나 혼자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했던 이상주의자들의 모습을 봐도 아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욕심은 우리가 가진 재물을 성당에 무조건 가져다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방법에 따라 재물을 봉헌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가진 재물 많지 않아도 하느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길을 떠나는 아들을 붙잡지 못했으면서도 그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던 아버지 하느님, 그 아들이 다시 돌아오자 모든 체면을 벗어 던지고 뛰어나가 반기시는 하느님 아버지, 우리를 위하여 잔치를 벌여놓고 그 잔치에 우리가 함께 하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잠시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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