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강론자료

삼위일체 대축일-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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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신부 [gold] 쪽지 캡슐

2001-06-09 ㅣ No.329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

 

        잠언 8,22-31    로마 5,1-5    요한 16,12-15

    2001. 6. 10.

 

주제 : 사랑의 단계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6월, 예수 성심성월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두 번째 주일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람들의 역사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신앙생활에 함께 참여하는 우리는 무엇을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신앙의 역사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드러나 보이신 역사를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부의 아들로써 인간에게 구원자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공동체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하느님의 업적을 알리고 사람들도 거기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힘으로써 성령으로 구별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별은 어디까지나 신학적인 구별이고, 사람이 알아듣기 위해서 하는 작업이지 사람의 지성(知性)이 닿을 수 있는 구별은 아닙니다. 이렇게 구별하는 하느님은 '세 가지 역할로 드러나는 한 분 하느님'이라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앙신조(信仰信條)의 골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업적을 구별하는 일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지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특성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어야 우리가 알아들을 내용도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전통신학에서 '성부와 성자는 사랑으로 굳게 연결된 관계'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인류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이 택하신 방법이 성자의 십자가 죽음이었는데, 그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수 차례 번민과 고난을 거듭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할 수 있는 생각과는 달리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실행되기 힘든 관계였을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신학에서 성령을 알아들으려는 시도도 같은 '사랑의 입장'에서 접근합니다. 우리 본당에서 매월 첫째와 셋째주일에 바치는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도 나오는 것처럼,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에서 나온다'고 규정합니다. 이런 신학적인 내용과 해석의 차이 때문에 1054년에는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가 갈라지는 원인이 되기도 됩니다.

 

사랑이 커다란 힘을 발휘하고 훌륭한 삶의 결실을 이루어내는 것은 하느님이 보여주신 본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는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갖춰야 할 것도 많습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視線)도 신경 써야 한다는 데 문제는 있습니다. 자칫 소홀하게 여기면 작은 문제들이 커다란 걸림돌로 돌변하고 맙니다. 아주 작은 문제가 생명의 문제로 연결된 것을 그리스 신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르시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나르시스'는 정령들의 사랑을 받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령들의 사랑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이 마음을 닫고 살았기에 문제는 상상 이상으로 바뀝니다.  결국 '나르시스'는 '네메시스'라는 여신의 벌을 받아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게 됐고, 결국에는 우물가에서 물을 먹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다음에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목숨을 던지고 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생활에 적용할 요소를 찾는 이 자리에서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던 '나르시스'를 비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사람 역시도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선택하지 못할 때 심각한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본받을 것을 찾는 때입니다.  그렇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방법은 사랑이라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용서 또는 화해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다지 원하지 않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많은 사람과 부딪힙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진정되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이 완성되고 나면,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그 자세가 완성되면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은 저절로 우리에게 선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함부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우리네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자세는 어떠한지를 돌이켜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어린이가 사랑을 키우는 방법은 먼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다음으로는 이웃에게 눈을 돌리며, 끝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드러내는 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우리도 본받을 것을 기억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도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모아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웃의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잠시, 그 준비를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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