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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23: 고행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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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17 ㅣ No.730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23) 고행의 길


올바른 믿음 없는 고행은 의미 없는 고통일 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고통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믿음에 일치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노력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된 것도(사도 11,26 참조) 그들이 안티오키아 도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강하게 심어줬기 때문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은 박해 시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표적인 행동으로 순교를 떠올렸습니다. 물론 극한 고통이나 죽음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완성하신 구원의 힘을 믿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순교의 길로 나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을 뿐만 아니라 영적 발전을 통하여 완덕에 거의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순교라는 고행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종교 자유 시대가 오자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고행의 길로써 절제의 삶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특히 일상 생활과 결혼 생활 그리고 가족 안에서의 삶에서 절제의 삶을 실천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인간 육신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인간 육신 때문에 죄에 기울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인간이 살아가는 통상적인 모든 삶 안에서 절제를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경향이 교회 안에서 수도 생활을 출현할 수 있게 했습니다. 게다가 절제의 삶은 수도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승화돼 복음삼덕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가난,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정결, 그리고 자신의 의지 및 이기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명의 길을 걸으며 수덕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중세 초기 수도자들은 극한의 육체적 고행과 금욕의 삶을 더욱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됐습니다. 동방 교회에서 실천하던 수도 생활이 서방 교회에 세밀하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온난한 이집트 사막 기후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럽에 옮겨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행의 길을 걷는 삶이 됐습니다. 또한 초기 형태인 혼자 있는 은수자의 삶을 추구하는 것도 고행의 길로 여겼습니다.

중세 중기 수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고행의 길의 모범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려고 때로는 편태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육신에 직접적으로 고통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세 말엽에 와서 수도자들의 이런 노력들은 내면의 의미를 헤아리기보다는 감성적인 외형에만 치우치면서 가톨릭 신학에서 벗어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출현으로 인식의 관점이 바뀌기 시작한 근세에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규정하고 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각자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 주변에서 이 세상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대면하고자 진지하게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수덕 생활의 방향도 인간 육신을 극복하는 고행의 길에서 인간 정신을 극복하는 정화의 길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즉, 이기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육신에 고통을 가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이기적인 자아를 끊으려고 노력해야만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영웅주의적 수덕 생활이 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셨다는 데에서 착안하여 자신이 걷는 고행의 길은 죄인을 위한 대속적인 수덕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대속적인 수덕 생활은 하느님의 구원 은총의 능력과 역할을 축소시키거나 무의미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됐습니다.

결국,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한 고행의 길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없이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는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행의 의미를 잘 알고 실천해야 완덕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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