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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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천호와 여산 성지: 순교자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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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211

천호와 여산 성지 - 순교자들의 고향

 

 

전주 시내 북쪽에 호남 고속 도로를 끼고 좌우로 있는 '여산 숲정이'와 '천호 성지'. 순례자들은 논산 인터체인지를 나와 먼저 여산을 순례하고, 이어 그 길로 문드러미재를 넘어 천호 성지에 닿을 수 있다. 반대로 이리 인터체인지를 나와 동북쪽으로 천호 성지를 찾아 본 후 다시 여산으로 갈 수도 있다.

 

해발 500m 천호산 아래에 위치한 천호(天呼) 마을(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은 본래 다리실 혹은 용추네로 불리던 전통적인 교우촌이었다. 후대에 그 이름이 '천호'로 바뀐 것은 박해를 받던 신앙 선조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던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조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 산간 지대로 모여들었고, 기해박해를 전후해서는 교우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천호 성지 맞은편에 있는 무능골과 인근의 시목동이 당시의 교우촌들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4명의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에 여산에서 순교한 김성화(야고보) 외 7명의 무덤이 조성되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중에서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 성인 등은 신리골(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하다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명서 성인은 성지동(완주군 소양면 유상리)에서 살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4명의 성인 시신들은 다리실의 무능골과 시모동, 유상리 막고개, 진안의 어은동 모시골에 안장되었다가 천호 성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러나 전주의 성인 중에서 막고개에 안장되어 있던 조화서와 정원지 성인의 유해는 훗날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으나 유실되었다. 또 조화서 성인의 아들로 1866년 12월 18일 서천교(전주시 서완산동) 밑에서 매를 맞아 죽은 조윤호(요셉) 성인의 시신도 다리 너머에 있는 요머리 고개에 안장되었으나 끝내 그 곳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처럼 성인 부자가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순교한 이유는, 조선의 형률에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고 규정한 때문이었다.

 

1909년에 되재 본당의 베르몽 신부와 천호 공소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 천호산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이곳 순교자 무덤 앞에 순교비와 십자가를 건립하였으며, 1983년에는 유해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1988년에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모셔져 있던 이명서 성인의 유해를 손선지, 한재권, 정문호 성인의 곁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김성화(야고보) 외 7명의 시신이 천호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어 1988년에는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하여 수청리에 안장되어 있던 김영오(아우구스티노) 순교자의 시신도 천호 성지로 이장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천호 성지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순교자들의 고향이 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도 지역에서는 병인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곳곳에서 순교하였다. 광주대교구의 '나주 무학당'(나주 초등학교 자리)에서도 순교자가 탄생하였고, 전주 시내 전주천 다리(일명 싸전 다리) 건너에 있는 '초록 바위'(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에서는 미처 피어나지도 않은 성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성 홍봉주의 아들이 어린 나이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다음 1867년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또 '여산 숲정이'(익산군 여산면 여산리)에서는 고산, 진산, 금산 등지에서 끌려 온 신자들이 1866년 겨울에 백지사, 교수형, 참수형 등으로 순교하였다.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산의 순교자들 23명 중에서 17명은 고산 땅 넓은 바위(廣岩, 완주군 동산면 광암리)에 살던 신자들이었다. 지금은 대아리 저수지에 잠겨 버려 흔적을 찾을 길이 없지만, 그 옛날 이곳은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숨어 살던 교우촌이었다. 이때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62세 된 김성첨(토마스)의 가족 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 일행은 형장에 이르러서야 목에 쓴 큰 칼을 벗을 수 있었고, 얼마나 굶주렸는지 짐승처럼 형장의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김 토마스는 "지금까지 우리가 기다려 온 천당 진복을 받을 때가 왔는데, 이만한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부디 감심하여 고통을 참아 받자."라고 모두를 격려하였다고 한다.

 

순교 후 그 시신들은 형장 곁에 있던 미나리꽝에 던져졌다. 이것을 눈여겨 보고 있던 신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신들을 건져냈는데, 겨울에 입는 솜옷 속에는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 솜을 먹어 버린 탓이었다.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일단 한 곳에 가매장하였다가 훗날 일부를 찾아내 천호산에 안장하였다.

 

박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연풍 성지에 묻혀 있는 황석두(루가) 성인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은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 없다 해서 얼굴을 지표면에 엎어 놓는 풍습과 같다. 이 순교자들도 그런 상태였다.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니, 죽어선들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였음이 분명한데도(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998년, 324면).

 

여산 지역에서는 이후 100여 년 동안 참혹했던 당시의 정황이 계속 구전되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참상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지역의 신앙으로 승화되어 왔으며, 순교 터의 흔적이 사라졌지만 숭고한 순교자들의 피는 언제나 신앙 후손들의 마음 안에 간직되어 있었다. 이에 여산 본당 신자들은 1980년대 초부터 여산 동헌 옆의 백지사 터와 숲정이 순교 터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순례 기념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목, 1999년 11월호, pp.124-126,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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