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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황새바위와 해미 생매장지: 남형으로 숨져 간 순교자들의 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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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207

황새바위와 해미 생매장지 - 남형으로 숨져 간 순교자들의 넋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순교 터가 되어 온 곳은 공주와 해미, 그리고 홍주였다. 이 중에서 해미는 병마 절도사의 읍성이 있는 데다가 내포 지역과 가까웠으므로 1799년에 인언민(마르티노)과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순교한 이래 박해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는 1817년에 해미 포졸들이 몰려와 신자들을 해미로 끌고 가서 처형한 애환을 담고 있는 교우촌이다. 또 그 이웃에 있는 '용머리'(현 삽교읍 용동리의 주래)는 인언민의 생매장지로, 1991년 이래 삽교 본당 신자들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적지가 있다.

 

관찰사가 주재하던 공주 감영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다른 어디보다도 많았다. 지금의 공주시 반죽동 사대부고 자리에 봉황산을 뒤로하고 감영(監營)이 있었는데, 순교자들의 처형은 이 곳이 아니라 교동에 있는 금강변의 '황새바위'(옛 공주 형무소 자리, 일명 항쇠(項鎖)바위)에서 행해졌다. 또 영장이 주재하던 홍주에서는 주로 관아(현 홍성읍 오관리) 인근의 형지나 옥 안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정에서 순교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원칙적으로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한 경우와 문초를 받다가 장형(杖刑)에 못 이겨 순교한 경우도 많았다. 교수형은 일반적으로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벽에 뚫은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 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두껍고 큰 널 가운데로 여러 구명을 뚫고 줄을 꿴 다음, 신자들의 목을 구멍에 넣도록 하고 양쪽에서 줄을 당겨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1866년 11월에 홍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교우가 이 형벌로 순교하였다.

 

한편 홍주와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한국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형(濫刑)이 자행되었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형구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대들보 형틀을 내리쳐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해미와 홍주에서 있었던 생매장이었다.

 

생매장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가해진 특이한 방법으로, 각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참수하기가 어렵게 되자 지방 관아에서 제멋대로 행한 것이었다. 해미의 경우를 보면, 읍성에서 조금 떨어진 조산리(造山里) 숲 속으로 끌고 가서 구덩이를 파고 신자들을 산 채로 묻어 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은 훗날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가 진행되었고, 1935년 4월 1일에는 마침내 그 현장이 발굴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병인년 해미에서 있은 대박해의 진상은 벌써 70년이나 되는(1935년 현재) 옛적 일이므로 소년이나 청년 중에는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노인 몇 분이 아직 생존하여 보고들은 바를 자세히 말해 주었으므로, 틀림없는 역사를 발견하여 천주의 영광과 치명자의 승리를 전하게 되었다.

 

노인들의 증거에 따라서 모든 사정을 자세히 조사한 후, 금년(1935년) '조산리'에서 치명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의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없이 몇 십 명이 되나, 아직 남아 있어 수습된 유해는 10여 명 가량밖에 안 된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만, 증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똑똑히 안 후에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한 결과 유해를 많이 얻게 되었다("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5호-제30권 822호).

 

혹독했던 병인박해와 관련된 순교 터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적지로 조성된 곳은 해미로, 대전교구에서는 1975년 10월 24일 이 곳에 순교 탑을 건립하였으며, 1983년 12월에는 생매장지를 확보하여 본격적으로 사적지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1995년 9월에는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되어 있던 생매장 순교자들의 유해를 순교 탑 아래로 옮겨 안치하였다. 다음으로 공주의 황새바위 순교 터는 교동 본당과 중동 본당에서 그 터를 매입한 뒤 1985년 11월 7일에 순교 탑과 기념 경당을 건립하였다. 또 황새바위 순교자 중에서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출신의 배문호(베드로)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였으며, 1990년 겨울에 그 무덤이 확인된 후 지금까지 사적지 조성 사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순교자들이 겪은 시련은 혹독하다 못해 처참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천상의 행복과 신앙 후손들에 대한 희망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순교자의 피가 또다른 순교자를 낳고, 그들의 피가 공동체의 모퉁잇돌이 된 것이다."

 

[사목, 1999년 9월호, pp.121-123,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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