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 (일)
(녹) 연중 제10주일 사탄은 끝장이 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솔뫼와 다락골: 첫 한국인 사제들의 생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205

솔뫼와 다락골 - 첫 한국인 사제들의 생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첫 한국인 사제로, 서로 동갑내기인데다가 인척이었으며,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이국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였다. 다만 김대건 신부가 훗날 피의 순교자며 성인이 된 반면에 최양업 신부는 한국 사제들의 모범이 될 땀의 순교자가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이 언제부터 '솔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생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의 집안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증조부인 김종현(金淙鉉)이고, 그 때 솔뫼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증조부 진후(비오)를 비롯하여 조부 택현과 종조부 종한(안드레아), 희현(루수)이 입교하였으며, 이러한 신앙 전통이 부친 제준(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대건 신부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821년 대건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증조부인 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하였고, 종조부인 종한은 경상도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에서 순교한 뒤였다.

 

김제준 성인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 솔뫼를 떠난 것은 김대건의 소년 시절인 182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서울 청파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寒德洞, 이동면 묵리)을 거쳐 이웃 골배마실(내사면 남곡리)로 이주하였다. 바로 이 곳에서 김대건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선대는 본래 서울에서 세거하던 집안이었으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1791년의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증조모가 아들 인주(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와 함께 충청도 청양 다락골로 낙향하게 되었다. 인주는 이 곳에서 장성한 뒤 이웃 '새터'(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로 옮겨 새 삶의 터전을 가꾸었으며, 차츰 이곳으로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최양업은 1921년에 이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신앙을 먹으며 성장하였다.

 

최경환은 이후 가족들과 함께 다락골 새터를 떠나 서울의 낙동(현 회현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이 곳을 떠나 지방을 전전하였고, 양업의 나이 만 11살이 되던 1832년 무렵에는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에 정착하였다. 이 뒤뜸이 마르은 얼마 안 되어 신자들의 비밀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업은 1836년 초 바로 이곳에서 신학생으로 추천되었으며, 경환은 훗날 수리산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이주한 뒤 교우촌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반면에 다락골과 새터 교우촌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병인박해 이후 여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솔뫼 생가 터는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후손들에게 매입되었고, 같은 해 6월 4일에는 순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대전교구의 '솔뫼 성역화 추진 위원회'에서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 개발을 시작하여 이듬해 동상과 기념탑을, 1983년에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반면에 병인박해 때의 무명 순교자들이 안치되어 있던 다락골 줄무덤은 1982년에야 비로소 청양 본당 교우들이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사목, 1999년 9월호, pp.117-119, 차기진]



39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