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최양업 신부와 배티의 무명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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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201

최양업 신부와 배티의 무명 순교자

 

 

최 신부는 이후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약 2년 동안 배티의 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아 서양 선교사들이 다니기 어려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오지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그리고 휴식 기간에는 다시 이곳에 들러 이웃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거나 동생들을 돌보았으며, 사목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신자들을 위해 "천주가사"를 저술하였다.

 

실제로 최 신부의 사목 순방은 고난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을 안마당 드나들 듯이 하면서 교우촌을 찾아 수십, 수백 리를 걸어야만 했고, 때로는 신자 한 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골짜기를 올라가야만 하였다. 또 어느 해에는 밀고자 때문에 한겨울에 신자 집에서 쫓겨 나와 맨발로 산야를 헤맨 적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을 따르려 한 순교자적인 삶이었다.

 

원컨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최양업 신부의 1846-1847년 서한 중에서).

 

이처럼 그는 조국 땅을 밟은 뒤 11년 6개월 동안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는 신자들을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과로와 장티푸스로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문경에서 선종하였으니, 만 40세의 한창 때였다. 그의 시신은 문경 부근에 가매장되었다가 그 해 10월 말 신학교가 있던 제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백색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배티 일대는 이러한 최 신부의 신앙과 땀이 배어 있다는 두 번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배티 성지가 지니고 있는 세 번째 의미는 순교자들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현재 이곳 배티 골짜기에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그중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들이 섞여 있다. 특히 오반지(바오로)의 경우는 순교 후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안장하였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무덤 소재지를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1858년부터 1862년까지 이곳 배티에 거처를 정하고 충청, 경상, 경기, 강원 일부의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어 칼래 신부가 삼박골에 와서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곤 하였는데,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문경에서 쫓겨와 삼박골, 북면의 소학골을 거쳐 내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오랜 박해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신자들은 피신처에서 나와 새 복음의 터전을 닦아 나갔다. 배티, 용진골, 삼박골은 공소로 승격되었고, 배티에는 교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터전을 얻기 위해 하나 둘 이곳을 떠남으로써 어느 교우촌은 단 한 명의 신자, 단 하나의 가옥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일대는 순교자들의 보금자리요, 최양업 신부나 선교사들의 고난 어린 발자취가 스며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최양업 신부의 현양 운동에 동참하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를 통해 그분의 삶과 신앙이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사목, 1999년 7월, pp.127-129,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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