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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2천년 동안 교회가 아시아에서 지닌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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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9-11 ㅣ No.138

[2010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 2천년 동안 교회가 아시아에서 지닌 사명

- 복음화, 성덕, 순교의 물결들

 

필리페 고메스 신부(Fr. Felipe Gomez, S.J.)

 

 

예수회 회원으로서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1966년 베트남, 사이공에서 서품받았고, 1975년 공산당국에 의해 추방되기 전까지 성 비오10세 신학과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베트남어 편집자였고, 1976년에는 마닐라의 동아시아사목연구소에 발령받아 신학을 가르치며 그 연구소 잡지의 첫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아시아 주교회의의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종교간 대화에 기여했다. 7년간 파리에서 일한 뒤 필리핀에 돌아와 베트남을 위한 사무국과 동아시아사목연수소에서 교수 겸 사서로 일하고 있다. 지금은 이 사무실이 사이공으로 이전했다. 그는 여러 잡지에 글을 실은 것 외에도, 베트남어로 쓰인 6권의 책과 영어로 쓰인 책, 3권의 저자이기도 하다.

 

 

들어가는 말

 

제3천년기의 문턱에 서서, 우리는 우리 뒤에 있었던 지난 2천 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도록 초대받습니다. 그냥 - 너무나 그리스도교적인 - “기억하기”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희망을 향해 열린 미래에 도움이 될 교훈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새롭고 또 놀라운 인류의 한 시대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제1천년기와 제2천년기의 특징적인 차이점을 제시해 보고자 기대합니다.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같은 교회와 같은 사명을 요구하는 신원의 지속성 안에서, 그러나 새로운 아시아와 새로운 방식의 교회 존재와 더불어서 입니다.

 

우리는 순교와 성덕에 대한 특별한 관심으로 “복음화의 물결”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파도, 물결들”이라는 비유는, 선교화와 그리스도교의 삶이 지닌 높고 낮은 수준이라는 현상을 사건들 속에서 추론하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드넓은 지역에 높은 그리스도교의 존재가 있었던 만조의 시기와, 그 뒤를 이어 모든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할 황폐한 땅을 남겨둔 채 그리스도교가 뒷걸음치던 간조의 시기들을 관찰함으로써 말입니다. 이 현상은 다른 대륙에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정확한 과학”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기의 구별은 다른 선택을 배제하지 않는 편의성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전체 역사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그것을 기본 파도, 제1천년기, “Pax Mongolica", 대발견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라고 부릅니다.

 

 

기본 파도 : 사도들과 사도시대 이후의 복음전도자들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식별할 수 있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스림, 예배를 지닌 지역교회들이 세워지기까지의 사도들의 시대를 “기본”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은 아시아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는 모든 선교의 절대적 원천이십니다. 비록 선교사는 아니셨지만요. 우리가 여기서 이해하는 선교는 성령이 오신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은 근접국가들과 다른 먼 땅으로 뻗어갔습니다. 위대한 성조들의 교회인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로마는 이름 없는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로마제국경계의 바깥에 있던 에데싸 좌는 주님의 일흔 두 제자들 중 하나였던 아따이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역사는 열 두 사도들이 주로 복음을 선포했던 지역들이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마태오는 페르시아와 바르티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비록 다른 전승은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했다고 하지만요.) 그리고 토마스 역시 그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에데싸에 묻혔습니다. 다른 전승은 토마가 인도에 왔으며 그의 무덤이 첸나이에 있다고 합니다. 유다는 아르메니아에서 가르쳤고 페르시아에서 순교를 합니다. 어떤 전승은 바르톨로메오를 아르메니아와 인도에 연결합니다. 열성당원 시몬 역시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 전승들의 역사성과 성 시몬이 인도에 있었다는 증거가 아주 강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요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즉 복음은 서쪽을 향해서와 마찬가지로 동쪽을 향해서도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대다수가 아시아에서 죽었습니다. 실제로, 3세기가 지나자 유럽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중동이라 부르는)아시아에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여전히 박해하고 있을 때,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 영토인 오스렌은 206년 아브갈4세 왕의 회두와 더불어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수도 에데싸는 유럽확장의 시대가 있기까지 중요한 그리스도교 지성생활의 중심지였으며, 가장 강한 선교 허브였습니다. 계몽자 그레고리가 자신의 모국 아르메니아에 복음을 전했고 295년 티리다테스2세 왕이 세례를 받아, 그 교회의 첫 Catholicos가 되었습니다. 약 330년경 콘스탄티누스의 시대 동안 그루지야는 전설적인 여인 성녀 니노의 활약으로 그리스도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아시아의 선교를 펼친 것은 에데싸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아디아벤의 아르벨라에 이르렀고, 그곳 역시 선교적 확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시리아의 문화는 농경문화라기보다는 상업문화를 촉진했으므로, 그런 사고체계 속에서 수도자들 역시 나그네 복음전도자들이었습니다. 2세기 말에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인 박트리아에 그리스도인들이 생겼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6세기에 쓰인) 아르벨라 연대기는 225년 바르티아 왕조가 페르시아의 사싸니드에 함락되었을 때 유프라테스에서 힌두쿠쉬에 이르는 중동지역 전체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을 때, 페르시아의 주교였던 “요한 페르시아노”는 인도와의 접촉을 요청합니다. 4세기 중반 바스라에서 인도에 이르는 페르시아 해 연안을 따라 수도원들이 생겨났으며, 토마의 그리스도인들을 에데싸와 연결했습니다. 주로 틸로스 지역(오늘날의 바레인)의 아랍부족들 사이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서방세계에서 박해를 멈추자, 페르시아의 박해가 시작되었으며, 특히 샤푸르2세(340-401년)때 그러했습니다.

 

이 그리스도신자들은 소위 네스토리우스파나 야고비트로 불리며, 칼체도니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정권은 자신의 제국에서 어떤 그리스도인도 원수인 로마(비잔틴)와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 동방의 교회는 아람어를 사용했고, 성조들의 체제와 시리아 기원 전례에다, 몹수에토의 테오도로 교부에 더욱 더 기초를 둔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5세기 경 교회가 중동지역, 페르시아, 인도와 어쩌면 스리랑카까지 전역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뿌리는 단단히 내려졌는데, 나머지 그리스도교 세계로부터 떨어져 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1천년기

 

동 시리아교회는 페르시아의 사싸니드 왕과 회교 지배아래서 산발적인 박해와 관용된 소수(dhimmis)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3,4세기 동 시리아 공동체의 선교정신은, 그 중심지인 에데싸를 근거로, 괄목할 만하게”, 북쪽(아르메니아)과 동쪽(아라비아와 인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410년에는 파트리아르카 아래 5명의 메트로폴리타가 있었고 38명의 주교가 있었습니다. 650년(이슬람 정복)에는 9명의 메트로폴리타와 106명의 주교가 있었습니다. 497년에는 샤카바드가 하야하여 훈족에게로 도망쳤고, 그와 함께 네스토리우스파 평신도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이 동행했습니다. 성직자는 7년, 두 평신도는 30년을 선교사로 살았고 커다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쿠르크족, 타르타르족, 몽고족들 사이에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티벳에 복음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아마 인도네시아에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파트리아르카 티모테오 치하에서(780-823) - 샤를마뉴 대제와 거의 동시대에 - 동 시리아 교회는 가장 확장되고 번성한 그리스도교 시대를 이루었습니다. 800년경 니시비스와 군데샤푸르는 유럽이 13세기에 이르도록 도달하지 못했던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위업은 중국의 복음화입니다. 그 유명한 781년의 “경교비문”은 당나라 수도에 635년(로마가 중부와 북부를 복음화하고 있을 때) 수사 알로펜이 도달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짧은 기간 동안 무럭무럭 자라나, 8세기에는 거의 모든 지역에 네스토리우스파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곧 불교 측의 박해를 받습니다. 845년 우중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불법으로 여기고 “비 중국적”종교로 선언합니다. 당 왕조가 망하자(907년) 그리스도교는 사라졌으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가 중국을 교화했을 때, 불교역시 “비 중국적”종교로 여겨졌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서안장경의 제작자일수도 있는 아담 주교는, 불교승들을 도와 산스크리트 수트라스를 중국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불교는 “중국적”이 되었고, 반면 그리스도교는 “시리아적”이거나 “페르시아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Pax Mongolica

 

두 번째 선교의 파도는 Pax Monglica 라고 불리는 시기에 발생했는데, 그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시피 한 오랑캐주의의 폭력과 전쟁들이 난무한, 모순처럼 해석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1219년 징기스칸의 회교지역 서부 정복이 이루어져 사마르칸드에 도달하고 메리(1221년)를 참살했으며,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같은 그리스도교 영토들이 황폐화되었습니다.(1236) 징기스칸의 손자 훌레구는 바그다드(1258)에서 역사적 대학살을 저질렀고, 몽고에 대한 공포는 유럽의 심장부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순되게도 종교적으로는 관용을 보여 그 광활한 제국으로 선교활동의 신선한 파도가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들과 관료들은 그리스도신자가 되었으며, 위구르 출신 옹구드의 케라이트와 그의 여러 아내가 왕궁 안에서 그리스도신자가 되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자신들의 공동체를 중앙아시아와 다른 여러 곳에서도 재건했습니다. 그들은 몽고 정복자들을 따라 중국으로 갔으며, 원 왕조와 몽고왕조(1271-1368) 치하에서 성당과 수도원과 주교 관할구들을 늘여 나갔습니다. 1281년 수사 마르코스는 아마도 위구르 지방에서 야발라하2세라는 이름으로 파트리아르카로 뽑혔으며, 30개 지역 250개 교구를 다스렸습니다.

 

이 두 번째 물결 속에서 새로운 것은 가톨릭의 존재입니다.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가 아시아에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몽고는 구만인들 속에 있던 도미니코회 선교지를 약탈하고 90여 명의 수사들을 살해했지만(1241), 교황의 외교권이 어쩌면 처음으로 칸 대제들에게 대사를 파견했을 때, 선교활동 가운데서 능동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1214-1294) 교황에게 선교사들을 요청합니다. 1286년 야일락 황후가 가톨릭신자가 될 것 같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톡타이 칸과 그 가족은 1290년 세례를 받습니다. 1291년 조반니 몬테코르비노는 타브리즈를 떠나 교황 니콜라스4세의 대리인으로서 쿠빌라이 칸의 왕궁에 갔습니다. 한 이탈리아 상인과 도미니코회 수사 니콜라 디 피스토이아가 조반니와 함께 인도로 여행을 떠났고 수사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조반니와 상인이 1294년 캄발리크(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쿠빌라이 칸은 막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몬테코르비노는 거기서 즉각적인 성공을 맛봅니다. 그는 나아가 옹구드의 네스토리우스파 왕자 조르조(Korgiz)에게 가톨릭의 일치를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약과 성무일도를 번역했고 전례봉사를 위해 청소년들을 훈련했습니다. 11년 후, 독일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쾰른의 아놀드가 그에게 파견되었습니다.(1303년 혹은 1304년) 그리고 1307년 교황 클레멘스5세는 조반니 몬테코르비노를 베이징의 대주교로 축성하기 위해 프란치스코회의 주교들을 파견했는데, 세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여러 주교가 서품되었고 프란치스코회 수도원들은 여러 지방에 세워졌습니다. 1336년 마지막 몽고제국 황제 통군 테무르는 선교사들을 요청했고, 베네딕도12세는 50명을 보냅니다. 희망은 너무나 컸지만, 중국은 몽고를 몰아내고 명 왕조를 건설합니다.(1368) 그 다음 해 모든 그리스도신자들은 중국에서 추방됩니다.

 

흥미롭게도, 중국인들은 그리스도교의 두 버전(가톨릭과 네스토리우스파)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만 외국인이며 몽고의 동맹이었습니다. 교회는 원 왕조의 몰락을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다른 곳, 중동지역에서 도미니코회 수사들은 활동적으로 일했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에서 몇몇 수도원들을 가톨릭의 일치 속으로 돌아오게 하는 성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더 먼 동양에서 도미니코회 수사 조르단 카탈라 데 세베락은 인도의 킬론에서 일하였고 요한22세는 그를 1329년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회칙 아시아 교회”는 슬프게 결말을 내립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지방들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주로 이슬람교의 성장, 지리적 고립, 지역 문화들에 대한 알맞은 적응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시의 큰 종교들과 만날 준비의 부족이었습니다.”(9항) 아마 그렇겠지요! 오직 하느님만 아실 것입니다. 아시아의 14세기와 15세기는 그리스도교에 비극이었습니다. 이슬람의 극단화는 - 타메를레인의 유혈 선전(1336-1405)을 생각해 보십시오 - 그리스도교에 죽음의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이 창궐하여(14세기 중반), 선교사들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분열되고 복음적이지 않은 교회의 죄가 나옵니다. 실제로, 어느 추정자료에 의하면, 2천 백만에서 3천 4백만에 이르던 아시아의 그리스도신자 숫자가 1200에서 1500명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대발견의 시대

 

우리는 동쪽으로 포르투갈 탐험대가 나서고, 서쪽으로 스페인이 영토 확장을 함으로써 열린 시대를, 유럽중심의 시각으로 표현하여 “대발견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하자(1498) 그것은 ‘회칙 아시아 교회’가 “선교 열정의 새로운 시대”(9항)라고 불렀던 현실을 위한 길이 트였습니다. 실제로 고아(인도)와 마카오(중국)의 포르투갈 정착촌은 16세기와 17세기의 활동적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아시아 선교사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태오 리치, 로베르토 데 노빌리, 알레싼드로 발리냐노, 알렉산드로 드 로드, 이 모든 분들은 포르투갈 Padroado의 우산을 쓰고 왔습니다. 물론 시스템은 결함이 있었고 갈등을 분출했습니다.

 

우리는 물론 교회의 시작부터, 상인들이 - 평신도들이 - 첫 선교사가 되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전문적 선교사들 - 성직자, 수도자들 - 이 그들을 뒤따랐습니다. 도달해야할 장소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있을 수 있는 보호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첫 시기는 물론 성공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42년 인도에 왔고, 인도네시아에서 일했으며(1546-47), 1549년 일본에 도착합니다. 그의 방법론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십 년이 지나자, 일본에는 2십만 명의 신자들과 250개의 성당이 생겼습니다. 다른 선교사들 역시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처럼, 일본에서 일했습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1597년 초) 일본의 가톨릭신자는 5십만 명을 넘었습니다.

 

저는 A. 발리냐노의 선교적 시각이나 (올해 서거 4백 주년을 기념하는) 마태오 리치의 중국선교를 부각시키거나, 인도의 로베르토 데 노빌리의 유사한 선교 방식이나, 알렉산드르 드 로드의 유연한 베트남 접근 방식을 음미하려고 시간을 끌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일어난 De Propaganda Fide(현 인류복음화성)설립과 그 역할을 언급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시대적 중요성이었고, 세상의 이 부분이 지녔던 선교 요구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선교 활동에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황청의 직접 개입이었으며, 교황대리인 파견, 방인성직자들에 대한 끈질긴 요구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한국교회의, 오로지 토착민들에 의해 심어진 단 하나뿐인 교회의 믿기 어려운 놀라운 행적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나서, 한국에서 벗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많은 새 신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교회는 1836년까지 현실적으로 사제 없이 살아남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비오11세가 “골치 아픈 중국 제사 문제”라고 불렀던, 아직까지 흉터가 채 가시지 않은 문제 때문에 사도적 열정은 얼마간 손상을 입었습니다. 역사는 이 “파도”가 또 한 번, 결국 18세기 말의 불행한 상황 때문에 주어진 실패라고 마무리 짓고 싶은 유혹을 당했을 것입니다.

 

 

선교적 자각의 19세기

 

나폴레옹의 전쟁이 끝나고(1814) 유럽은 괄목할 만한 교회의 쇄신을 체험했습니다. 특히 선교의 열정이 감동적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하느님의 백성 전체는 어린이 선교회, 성 베드로 사도 후원회, 또는 기타 단체들을 통해 동참할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 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선교수도회가 생겨났습니다. 두 가지 특징이 주목할 만합니다. 여성들의 대규모 참여와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기습입니다. 현대의 대다수 지역교회는 이 시기에 세워진 것입니다.(필리핀을 제외하고는)

 

이 선교적 공세는 유럽의 식민지 확장정책과 동맹을 맺고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많은 관찰자들로 하여금 양쪽에서 다 같은 기도를 보게 만들었습니다. 이 선교는 체계적이었으며, 유럽교회를 그들의 신앙과 체계와 문화를 지닌 채 고스란히 복제한 것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선교학이 탄생하고, 새로운 사고들을 향해 문을 열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더욱 활동적이었으며, 특히 비오11세의 Maximun illud(1919)에서 더 드러났고, 다음의 사실이 이어졌습니다. 1925년 교황님은 제사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1926년 첫 중국인 주교들을 서품했고, 이어서 (1927년) 일본 주교와 (1933년) 베트남 주교가 서품되었습니다.

 

이 기간의 결과들은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에서 아주 긍정적이었지만, 아시아에서는 썩 그런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의 뿌리가 심어졌으며, 우리에게 이르러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식민시대 이후의 선교와 현재 상황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교회와 세상에는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1962-1965), 특히 선교 활동을 위해 드넓은 지평을 열었습니다. 물론 공의회의 뒤를 이어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고, 20여년이 지나서도 회복을 위한 싸움이 존재했습니다. 세상 전체에 그랬듯이, 식민통치로부터의 회복은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지역 나라들에 국가로써의 존엄성을 부여했습니다. 이 시대의 도래는 때로 평화스러웠고, 때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선교는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떤 나라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새로운 선교사들을 향해 많은 나라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거기다가 서방세계의 세속화는 현재의 “교회들”을 이룬 “선교”의 적임자들이 유럽에서 흘러오던 것을 메마르게 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의 교회들은 스스로, 다시 말해서, 자신의 유지와 성장의 전적인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맹(FABC)안에서 하나가 되어, 그들은 교회로 존재하는 새로운 길을, 따라서 선교를 하는 새로운 길을 창조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이제 선교를 위한 노력은 아시아의 것이고, 아시아 방식이 되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선교 대회가 열렸으며(2006), 이 아시아 방식을 “역사와, 비유, 상징을 통한 호소력있는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방법론으로써 대화를 통해, 전 교회는 선교적이 됩니다. “전 공동체, 모든 그룹, 모든 사람은 자신의 봉사와 관계된 사람들과 함께, 복음화의 에이전트가 됩니다.” 감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를 희망하는 것이 오늘 그 어느 때 보다 더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통계는 아시아의 가톨릭신자들이 전체 인구의 1.8%에 해당한다고 계산합니다.(Agenzia Fides 22.10.2005) 오직 한국만이 진정한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1999년 이래 한국은 해마다 2-3%의 성장을 보였고, 일본은 감소하였으며, 1956년 7.5%였던 베트남은 2008년 현재, 평균이 7.18%로 줄어들었습니다. 인도는 실제로 1965년과 다름없이 1.55%의 가톨릭신자들이 있는(2005), 등입니다.

 

저는 우리가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새로운 물결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저의 짧은 연구를 마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이버 미션”입니다. 한 세대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인터넷은 “새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디지털 대륙의 가장 큰 인구를 차지하는 것도 역시 아시아입니다. 선교의 가능성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대단합니다. 선교 훈련은 “i-복음전도자”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웹 역시, 하느님을 아직 알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한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들의 뜰’과 같은 하나의 공간으로 제공되어 있음을 우리가 어찌 보지 못 하겠습니까?” 선교에 있어서 우리가 토착화를 강조하는 것 이외에도, 교황님께서는 이 사이버 사도직을 “문화의 부제직”으로 부르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숙고해야 합니다.

 

이 역사 속에서 저의 마지막 요점은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간단한 언급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주님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께 속한 충실한 평신도들이 주님의 왕직 수행에 참여하며, 역사 속에서 그 왕국을 확장하도록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교 무역상들이 네스토리우스파와 가톨릭선교 속에서, 복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여성들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몽고 위정자의 아내들, 특히 징기스칸의 며느리이자 쿠빌라이 칸과 몽케 칸의 어머니였던 솔각타니 베키 공주가 있습니다. 이제 평신도의 역할은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것처럼 더욱 결정적입니다. 전체 평신도가 대규모 선교사의 무리가 될 때 교회는 아시아에서 진정한 봄을 체험할 것입니다.

 

 

성덕과 순교

 

“성덕, 거룩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선교의 역사 속에 아주 다른 지평선을 펼칩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디아스 추기경님의 이런 말씀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복음화의 주제는 하느님과 반항하는 천사들 사이에 격렬한 적대감이 일면서, 에덴동산에서 우리 선조가 겪었던 넘어짐으로 시작되는 영적 전투라는, 더 넓은 맥락 속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근시안적 시각 때문에 이런 맥락이 무시된다면, 그리스도의 구원은 부적절한 것인 양 슬쩍 지워져버릴 것입니다.”

 

이런 원칙의 빛 속에서 역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실패”를 기록한 곳에서 하느님은 승리의 미소를 띠고 계실 것입니다. 모델은 갈바리 동산입니다. 그건 패배였습니까? 개선이었습니까? 우리에게 알지 못하는 땅을 향해 - 아브라함처럼 - 행진하는 선교사들의 물결이 다시 다가올 때, 우리는 거기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도적 신앙과 순명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의 영광, 곧 모든 그리스도교 활동의 최종 목표입니다. 이 사도적 열의가 거룩함의 정의인 영웅적 차원으로 흔히 도달합니다.

 

프랜시스 X. 클라크는 아시아의 성인과 복자인 486명의 가톨릭신자에 대해 썼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먼저 하느님만을 섬기기 위해 세상을 버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중국과 인도까지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지역 그리고, 아랍인들, 페르시아인들, 투르크인들, 위구르인들, 타르타르인들, 인도인들과 중국인들....모든 인종들을 커버하며, 수도원들을 채웠던 동 시리아와 야코비트의 수 천 명의 수도자들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둠을 이긴 빛의 승리이며, 따라서 선교 그 자체의 성공입니다. 중세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수도원들로부터 현시대의 수도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을 아시아의 종교인인 가톨릭신자라고 선을 그으면, 우리는 모두 복음의 성덕에 대한 탁월한 증인들이며, 선교의 완성입니다.

 

순교는 성덕의 절정이며, 아시아는 가장 많은 순교자를 지닌 대륙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선교의 성취인지요!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멈추었을 때, 페르시아의 사싸니드가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샤푸르2세 치하(309-379) 339년부터 401년까지, “추정하는 바로 190,000명의 페르시아 그리스도인들이 공포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로마의 박해에서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현대에 와서, 간단히 기억해 보면 인도에서 곤잘로 가르시아와 존 데 브리토가 1629년에, 그리고 1947년에 정식으로 시성되었습니다. 일본은 가장 체계적이고 - 효과적인 - 박해가 있었고, 어쩌면 바오로 미키와 그 동료들 같은 2십여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만 명 이상의 순교자라는 영예를 지니고 있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서울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 김효임 등 103위를 시성했습니다. 베트남은 2십 만 명이 넘는 순교자가 있으며 1988년 시성된 117명 가운데는 안드레아 둥락과 그 동료들이 있습니다. 중국은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120명의 순교자들을 시성했습니다. 그 중 33명은 선교사였고 87명은 중국인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17, 18, 19세기에 걸쳐 산발적인 박해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소위 의화단 반란사건이라고 불리는 박해는 1900년에 일어났고 약 32,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육 당했으며, 그 중에는 222명의 정교회 신자가 있습니다.

 

필리핀에는 순교자가 없습니다. 로렌조 루이스와 동료들, 그리고 교리교사 페드로 칼룽소드는 2000년에 시복되었는데, 그들은 “일본산”입니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로 간주되는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시아에서는 1915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 인종청소를 언급해야 하는데, 결과로 2백 십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박해는 이곳 저곳 번졌고, 태국에서는 송콘의 순교복자로 불리는 7명이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회교 사회에서는 순교가 흔한 가능성이며, 인도에서도 힌두광신자들은 여러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정의의 일꾼들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맺음말

 

역사학자 한 분과 더불어 끝을 맺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역사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역사를 앎으로써만 우리는 일본의 박해나 아시아 교회의 몰락과 같은 시대의 사건들을 해석할 희망을 지닐 수 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함으로써, 귀머거리 같은 침묵만을 만나게 되는 것이 결코 놀랍지 않다. 옛 교회를 잃는 것도 잃는 것이지만, 너무나 철저히 그 기억과 체험을 잃는 것은 상처를 내지 않는 적이 없는 하나의 재앙이다.” 역사는 교사이지만, 교훈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번지르르한 무용담은 여러 가지로 칭송되었습니다. 오늘날 강조되는 것은 “육화”로써, 한 신학자의 설명처럼 “복음이 아시아의 월드뷰라는 프리즘을 거쳐 갈 때에만, 그 광채와 색과 아름다움을 아시아 민족들에게 드러낼 것입니다.” 어쩌면 아시아를 위한 하느님의 시계는 다른 리듬으로 똑딱이며, 우리는 신비를 우러러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펠리페 고메즈, 예수회 신부 

동아시아 사목연구소 

마닐라,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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