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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여성 평신도의 표상을 보여준 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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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27 ㅣ No.252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여성 평신도의 표상을 보여준 조이들 (1)

굳게 신앙 지킨 124위 중 여성 평신도 수는 24명


- 여성 평신도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여성 평신도의 숫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성 평신도의 표상으로 일컫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를 포함, 하느님의 종 가운데는 24명의 여성 평신도들이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나이 많은 여성 혹은 과부를 뜻하는 이두 ‘조이(召史)’라는 이름으로 불린 여성들이 많다. 이들은 주로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됐지만, 그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적인 덕행을 실천했고 순교의 삶까지 나아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김조이(아나스티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이성삼(바오로)과 결혼한 여성이다. 본래 원만한 성격을 가진 그는 남편으로 인해 천주교를 알게된 후부터 모든 이에게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자신의 가정을 성가정으로 이끌기 위해 자녀들의 교리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교리를 실천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체포된 김조이는 자신이 바라던 참수형을 당하지 못하고 옥중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목숨을 다했다. 그의 열성적인 교리교육으로 딸 이봉금(아나스티아)의 이름도 124위에 올랐다.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한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아 12세의 나이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또 하나의 조이, 심조이(바르바라)는 홍봉주(토마스)의 아내다. 1801년 순교자 홍낙민(루카)이 그의 시할아버지였고, 훗날 함께 체포돼 순교한 홍재영(프로타시오)은 그의 시아버지였다.

심조이는 지능이 매우 낮아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많은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실제로 시아버지의 유배로 인해 심조이가 전라도 광주에서 살고 있을 때,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자신의 집으로 의탁해오자 짜증을 내지 않은 것은 물론 음식을 아까워하지도 않았으며, 짐이 된다는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체포돼 고문을 당할 때 한 살 된 막내아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보았음에도, 심조이는 이를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사형을 선고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19일, 오혜민 기자]


평신도 - 여성 평신도의 표상을 보여준 조이들 (2)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신앙 굳건히 지켜내


하느님의 종 124위의 조이(召史, 나이 많은 여성 혹은 과부를 뜻하는 이두)들 가운데는 최조이와 이 조이도 있다.

최조이(바르바라)는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대부분의 여인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웠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딸로서 일찍부터 매우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던 그에게 장성한 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것이다. 시아버지 곁에 홀로 남은 탓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는 결코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천주와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를 보였다.

남편을 잃은 후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도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고, 미약한 힘이라도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최조이는 체포돼 전라도 전주로 압송됐으며 감사 앞에 나아가 오래 전 순교한 최창주의 딸이라는 것을 밝혔다. 또 자신의 시아버지 신태보도 올봄 전주에서 순교했다는 사실도 낱낱이 고백했다. “죽는 길밖에 없다”는 감사의 답을 들은 그는 1840년 1월, 당시 50세 나이로 참수됐다.

이조이(막달레나) 또한 19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인물로 그의 남편은 죽기 전 그에게 수계를 열심히 지키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천주께 비교적 덕을 닦기 쉬운 처지에 두어주신 것을 감사했다. 가난했지만 대재와 소재를 지키며 극기를 실천했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힘썼으며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839년, 이조이 또한 최조이를 비롯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돼 전주로 압송된다. 갖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는 옥에 돌아와서도 교우들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데 남은 힘을 쏟았다. 32세의 나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하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께 충실해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26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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