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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성령칠은5: 효경의 은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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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50

[성령칠은 제5강의] 효경(孝敬 piety)의 은혜 (2) - 하느님의 사랑 (9월 7일 월요일 오전)

 

 

1고린 2:7-13 :

 

(1고린2:7)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 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8)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성서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10)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십니다. (11)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만이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생각은 하느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 (12)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그 은총의 선물을 전하는 데 있어서도 인간이 가르쳐 주는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눈으로 본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인 없는 그 일 너머로 다가 오도록 하느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느님의 선물을 체험하라고 초대하신다.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체험해야 이 선물의 맛을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효경의 은혜 즉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 계속합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형제적인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적인 사랑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버지는 당신의 아드님을 영원으로부터 사랑하십니다. 아버지는 무한한 사랑으로 그분을 탄생시키십니다. 아드님은 사랑하는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은 성자에게 유일하고 신뢰 가득한 아빠이시다. 예수님은 한 남자 한 여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 받는 딸과 아들을 보십니다. 오늘도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딸들이 탄생된다. 우리를 초대하셔서 하느님 아버지께 “아빠”라고 부르도록 하신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입니다. 우리들 사이에 있어야 할 삼위 일체의 친교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통교를 이루시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효경의 은혜이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형제적인 사랑을 봅시다. 우리 각자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묵상 중에 이것을 새롭게 합시다. 나는 기도하고 나서 여러분을 사랑으로 선택했습니다.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을 불러 모아 한데 모았습니다.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서 여러분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을 볼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탄생하는 것을 봅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이 나를 따르도록 초대했습니다. 나의 삶에 동참하라고 ‘와서 보라’고 초대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을 초대해서 하느님이 나에게 맡긴 사명에 참여하도록 초대했습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나는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가르쳤습니다. 사랑으로 하늘 나라의 비밀을 여러분에게 나타냈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사랑에 동참하도록 여러분을 사랑으로 초대하여 쉬게 하였습니다. [(마태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나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나의 기도에 초대했습니다. 내 기도 속에 여러분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의 동반이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여러분에게 드러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이 나와 함께 ‘아빠’라고 부르도록 초대했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여러분의 삶의 폭풍우를 잠재우러 했습니다. 사랑으로 내 권능을 나누어 가지도록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여러분의 이름이 하느님의 심장에 새겨져 있음을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으로 수없이 되풀이해서 여러분이 마지막 자리를 택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리를 택하려고 할 때마다 사랑으로 꾸짖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의 발치에 왔습니다. 여러분의 발아래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선물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인 여러분을 섬겼습니다. 사랑으로 내 피와 살로 여러분을 먹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 대한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나의 전부를 주었고 마지막 피를 흘렸습니다. 여러분이 자고 있을 때에도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했습니다. 여러분이 후에 믿음에 굳건히 서라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형제 자매들을 굳건히 해 주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천국의 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사랑으로 나의 어머니를 주었습니다. 나는 끝까지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내 심장을 열고 사랑으로 나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여러분이 천국에 올 때에 여러분을 섬기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장면들을 이렇게 여러 곳에서 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 당신 제자들에 대한 형제적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면 내가 이 사랑과 용서를 형제들에게 전할 수 없다. 이 사랑의 영을 묵상하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생애 안에서 형제적인 사랑을 묵상하려면 루가 14장 12-14절을 볼 수 있다.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근본적인 성서구절이다.

 

루가 14,12-14 :

 

(루가14:12)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 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루가14:13)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루가14:14)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 (루가14:15) 같이 앉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루가14:16)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루가14:17)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루가14:18)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을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 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루가14:19)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루가14:20)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루가14:21)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 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루가14: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 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루가14: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루가14:24)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초대받은 사람 중에 착한 사람들도 있고 악한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건설하려고 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시려고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잃지 않은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난한 자들 장애자 즉 마지막 자리에 있는 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가장 장애가 많은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입니다. 말을 할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목소리가 없고,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장애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장애자들 죄인들 작은자들을 우리의 진정한 형제로 초대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사랑의 공동체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진정한 형제 자매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먼저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내가 스스로 체험하지 못하면,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 체험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들의 형제가 될 수 없다. 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그들의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 내가 그들 장애인들 보다 더 잘 본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의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다. 나도 역시 하느님의 빛과 영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고, 하느님 앞에서 역시 사랑과 확신을 갖고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한 그들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이 루가 14장의 성서구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하신 직후에 나온 말씀이다.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생각하자마자 우리는 결코 그들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으로 탄생시키시는 것을 체험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볼 때에 하느님이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탄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재로 우리의 형제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부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신다. 그것을 사랑의 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죄 많은 여인이 나타납니다. 바리사이파사람이 이 죄가 많은 여인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받아야 할 죄 많은 여인의 빛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이 받아야 할 빛을 받을 필요를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이 여인의 형제가 될 수 없다. 다음 주일에 탕자의 비유에 관한 복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탕자의 비유가 아니고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두 아들이 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아들은 사랑의 아들이 아니라 하인의 아들처럼 행동했습니다. 노예처럼 열심히 일했는데 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않다니요. “내가 갖은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방탕한 아들의 용서의 빛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흥청망청 베푸시는 사랑을 체험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 죄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어렵다.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 성령의 은총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일이 많아서 조용히 앉아서 장애인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관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이런 빛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신비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울 수 있고 여러 방법론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책들을 파고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먼저 하나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베푸는 사랑을 예수님이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능력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신다. 그래서 우리들을 보시면서 다른 형제 자매들을 보시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는 욕구들을 알고 계신다. 하느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재창조해 주시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알고 계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발치에서 행하신 사랑의 섬김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시고, 발치를 택하신다. 그것은 은총입니다. 모든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의 의미를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다. 사를르 후꾸오는 “예수님은 항상 마지막 자리를 차지 하셨다”하고 하셨다. 우리는 결코 그런 마지막 자리에 이를 수 없다.

 

여러분의 요청에 따라서 빈민가에서 살았던 체험을 말씀드리지요. 2가지 말씀드립니다.

 

1.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누려고 애를 쓸 때에,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쓸 때에, 그들의 삶을 나누려고 애를 쓸 때에, 우리는 즉시 우리의 한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즉시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말씀을 되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왜 그들을 버렸습니까?” 그것은 그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려는 한 형제의 기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형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는 인간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아들의 기도입니다. 인간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만 해답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어느 날엔가 이것이 우리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한계를 느끼고, “아버지 왜? 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가난합니까? 왜 장애를 갖고 있습니까? 왜 죄를 짓고 있습니까?

 

이 왜? 라는 부르짖음은 어린아이의 부르짖음과 같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해답을 주시리라는 것도 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삶을 나눌 때에 한계를 느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를 쓰지 말란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안으신다는 신뢰와 확신 안에서 그렇게 애를 쓰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의 비참과 한계를 체험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아침에 강론에서 김신부님이 북한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항상 충격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도에 가신다면 여러분의 첫 반응은 충격일 것입니다. 거기서 참다운 형제 자매를 보신다면 정말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들여다본다면 정말 큰 충격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구원받아야 할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해야 될 바를 하는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갔을 때에 “내가 섬기러 왔다. 내가 해결책을 제시하러 왔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의 사랑의 구원 계획에 따라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달라고 청해야 한다. 겸손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주려고 하는 한 우리가 해결책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에 갇히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에 확신을 갖고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가야 한다. 형제들의 고통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과업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비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에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 빈민가에 갔을 때에 제일 먼저 저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내가 절대로 제일 낮은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만이 제일 낮은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정말 가난한 형제들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이시고 제일 낮은 자리를 차지하신다. 적어도 “낮은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그 기도마저도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넣어 주신 초대”임을 알게 된다. 마음을 열고 내 공동체 회원들의 형제 자매가 되라는 초대이다. 그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항상 다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신비이다. 빠스카의 신비를 통하지 않고는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형제 자매가 되려고 우리 마음을 열지 않는 한 공동체 건설은 불가능하다. 여러분에게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성령의 은혜를 청하자. 효경의 은혜를 실재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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