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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8) 그리스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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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8

제8강의 : 그리스도의 사랑(5월 11일 오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비로우신 주님,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내려주소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을 깊이 알고 사랑하고 의식하게 해주소서.

 

오전 강의에 이어서 살펴보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과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더 찾으시고 더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 아오스딩은 "좋은 친구는 나의 모든 것 나의 단점을 알면서도 나를 받아주는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친구를 갈망합니다. 나의 잘못, 약점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받아주는 친구! 이 얼마나 좋은 친구입니까?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이런 친구를 만나기란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바로 이런 친구이십니다. 그분은 참으로 시편 139편의 말씀처럼 "나를 훤히 아시고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죄와 나의 부족함도 다 아시면서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결코 죄를 용인하시거나 과소평가 해서가 아닙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하느님과 인간의 생명의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죽음과 멸망에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더 하느님의 연민은 깊으십니다. 죄 때문에 떨어져 죽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죄는 오히려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오시게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서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려졌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느님께서는 "너 어디에 있느냐?"하고 그를 찾아 나서셨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의 백성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면 하실수록 멀리 도망치는 백성을 거듭거듭 찾으십니다. 예언자를 보내셔서 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거듭 권고하시고 촉구하시고 위협도 하시고 달래시고 여러 가지로 호소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는 결국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성야 때 부활 초를 축성하고 부르는 부활 찬미가에 다음과 같은 성 아오스딩의 표현이 있습니다. "Oh! Felix Culpa!(오! 복된 탓이여!)" 원죄를 가리켜 '오 복된 탓이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원죄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기적으로 고쳐주셨으나 이 병자들을 찾아 나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죄인의 경우에는 찾아 나서셨습니다. 세리, 죄인, 창녀들과 먹고 마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보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들판에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루가 15,1-6 참조)고 반문하시며, 이어서 잃었던 은전의 비유를 드십니다. 그리고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루가 15,7)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에서 죄인들을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마태 9,12)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은 죄인을 찾아서 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렇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나서시는 예수님의 마음! 착한 목자의 마음!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서 목자로, 사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 것인가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루가 15, 11-32)에서 잘 드러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이미 너무나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 보면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아 가지고 먼 곳에 가서 방탕한 생활로 그 재산을 탕진해 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곳에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의 집에 가서 돼지 치는 더부살이를 해서라도 굶주림을 면해 보려고 하였지만 그렇게도 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픈 나머지 그제야 제 정신이 들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는 가장 가까운 동기는 잘못하였다고 뉘우치는 그것보다는 굶주림 때문이었습니다.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몰골이 흉하게 된 자식이지만 그 자식이 집을 떠난 이후 하루도 그 자식을 잊지 못해 그 자식이 떠난 길을 매일 같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몰골이 아주 흉하게 된 자식이 멀리 길모퉁이를 돌아올 때 누구보다 먼저 아버지가 그 자식을 알아보고 아버지 편에서 먼저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매일 같이 그 길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몰골이 달라져도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본 것입니다."저게 내 자식이다!" 아버지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달려가서 자식이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안고 입을 맞추고 종들을 불러서 "얼른 목욕시키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당신을 떠난 죄인을 항상 불쌍히 여기시고 지켜보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고, 죄인의 회개를 가장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죄인에 대해 인내하시고 깊은 애정으로 대하십니다. 그분의 이러한 모습은 요한 복음 4장 4절에서 42절 사이에 기록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의 얘기는 여러분도 잘 아십니다. 이 얘기는 참으로 아름다워서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불린다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길을 한나절 걸려 오시고, 야곱의 우물에 가셨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시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에수님 편에서 물을 좀 달라 하셨습니다. 목마르시기도 하셨지만, 예수님의 그 목마름은 육신의 목마름보다 영혼에 대한 목마름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인으로부터 오는 반응은 아주 냉랭했습니다. '당신은 보아하니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여인인데 어떻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하고 퉁명스럽게 답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아주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이렇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결국은 당신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게 하는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그 여자에게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과거를 다 알아 맞추심으로써 여자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날 그 여자에게 당신에 대해 밝히신 내용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의 물이 되신다. 샘솟는 물이 되시며, 당신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그리고 영적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라고 하는 말씀들을 그 여자에게 다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엄청난 내용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을만한 무슨 자격이 있었습니까? 그 여자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예수님 말씀처럼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거기다 현재에도 남편 아닌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처지의 여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삶이 깨끗하다고도 할 수 없는, 죄도 많고 어쩌면 남자를 다섯 번이나 바꾸는 변덕도 많은 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자에게 예수님 당신이 누구신지! 당신이 주시려고 하는 그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자세히 보면, 그 날 유다 지방을 떠나서 갈릴래아로 가시는 길에 야곱의 우물가가 있는 지방 시카르에 오신 것은, 복음 시작에서는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소식이 바리사이파들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라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해석을 한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괜히 필요 없는 갈등을 불러 일으켜서 시끄러운 불씨가 일어날까 봐 피하셔서 갈릴래아로 가시는 길에 시카르에 들르신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께서 그 날 그 자리에 오신 것은 그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자를 찾기 위해, 그를 만나기 위해, 그를 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4장 31절 이하에서 먹을 것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와 그 날 나누신 대화와 그렇게 하심으로서 그 여자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한 것, 또 여자가 예수님에 대해 알리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가게 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면, 예수께서 그 날 그 먼 길을 뜨거운 햇볕 아래 아주 피곤하셨다는 표현도 나오는데 그렇게 피곤할 만큼 걸으신 것은 이 죄 많은 불쌍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을 찾아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내가 죄인이라 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절대로 나를 멀리하시지 않습니다. 죄는 오히려 주님으로 하여금 나에게 가까이 오시도록 하는 매개가 됩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는,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는 죄가 많아서 그 때문에 희망이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모든 면에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 앞에서는 여전히 값진 사랑스런 주님의 아들·딸들입니다. 주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이렇게 사랑하시고 절대적으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거듭거듭 죄인을 찾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마태오 복음 18장 21-22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숫자적으로 일곱 번씩 일흔 번은 490번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수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용서에는 한도가 없으며, 끝없이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얼마나 예수께서 당신을 겸손되이 비우시고 낮추셨으면 이렇게 까지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한없이 깊은 겸손의 마음, 자비의 마음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 인간은 조그마한 남의 잘못하나 용서할 줄 모릅니다. 이런 우리의 옹졸한 마음을 예수께서는 지금 말한 마태오 복음의 말씀에 이어지는 비유 말씀인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잘 깨닫게 해주십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종들과 셈을 합니다 그런데 종 하나가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는데 그 빚을 갚으라고 하니까 그 종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임금에게 탄원을 합니다. 그래서 그 임금은 그 종의 간절한 애원을 들으시고 그냥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종이 나가다가 친구 하나를 만났는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했고, 그 친구 역시 그에게 말미를 좀 주면 곧 갚겠다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도 금방 임금에게서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는데, 그것도 잊어버리고 자기 친구를 가혹하게 대할 뿐 아니라 그를 붙잡아서 옥에 가두기까지 하였습니다. 무자비한 종! 이것은 대단히 함축적인 뜻을 지닌 내용입니다.

 

백 데나리온! 데나리온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옛날에는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현금이 없을 때는 하루 일을 해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100 데나리온이니까 100일 동안 일을 해주면 되는 것이지요. 지금 이 관습이 그냥 중동에 그냥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문에 났죠. 우리 나라 사람 하나가 거기서 빚을 졌다가 잡혀서 1년인가 2년인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여기서 송금을 해 주어서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그 때 그런 기사가 신문에 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직도 그런 관습이 중동에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1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면 현금으로가 아니고 일을 해서 갚으면 6천만 일 동안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1년 365일, 인간이 오래 산다고 해서 100살을 산다고 해도 36,500일입니다. 이것은 6천만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뭐 백살까지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태어나자마자 시작해 가지고 죽도록 일을 해도 갚을 수 없고, 그러니까 영원히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는 그런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우리가 하느님께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는가?, 내가 무슨 잘못을 하느님께 그렇게까지 지었는가?'라고 얼른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런 빚을 지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 생각 나의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환산할 수 있습니까? 거기다가 내가 이 상태로 있으면서 하느님께서 나를 구하시지 않으면 나에게 오는 것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런 나에게 무상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얼마나 큰 빚입니까? 아무리 갚아도 갚아도 못 갚는 그런 빚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묵상해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라미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너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네가 알았더라면."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 시간 우리에게도 던지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을 나는 아는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물론 그분이 역사적인 인물로서 언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 몇 살까지 사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무슨 기적을 어떻게 어디서 베푸셨는지, 언제 죽으셨는지 그 분의 이력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주님을 알고 있습니까? 이 주님을 아느냐·모르느냐는 말씀에는 우리가 사느냐·죽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친히 요한 복음 17장에 있는 대사제의 기도에서 영원한 생명은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도 잘 모르는데, 과연 예수님을 정말 아는가? '안다는 것'은 성서의 말씀대로 '사랑한다는 것'과 뜻이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할 때 비로소 알 수 있는데, "과연 나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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