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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6)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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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6

제6강의 :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5월 10일 오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다시 이 시간 저희들과 함께 하여주시고 당신 사랑으로 저희들을 감싸주시며, 당신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에 대한 당신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오전에는 아브라함이 어떠한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뜻에 충실치 못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잘 아시는 대로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죠. 물론 이 계약은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맺은 계약의 첫 번째 것은 아닙니다. 첫 번째로 맺으신 계약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노아와 맺으신 계약입니다. 노아 시대에 하느님께서 홍수를 내리시어 사람들을 다 없애시고 난 다음 후회하시지요. 그리고 노아한테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을 하시면서 계약을 맺으시고,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그 다음 또 아브라함에게, 그가 많은 후손의 선조 되리라, 하늘의 별처럼 그렇게 많은 후손들의 선조가 되리라는 약속을 하시면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계약은 그보다 더 깊다고 할까요. 이제는 더 구체적이고 그리고 또 어떤 의미로 앞의 계약은 하느님 편에서 하시는 어떤 일방적 선언과 같다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시는 계약에서는 그들이 이 계약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의 핵심은 "당신만이 참된 신이다. 내가 너희 신이다. 나는 야훼다. 내가 신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너희가 내 말에 충실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고 너희를 약속의 땅에 인도해줄 것이고. 너희에게 구원의 넘치는 복을 주리라. 그리고 너희를 이 세상 모든 민족 위에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높여 주겠다"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아주 재미나는 표현이 나옵니다 : "내가 너희에게 내린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땅 위에 사는 만백성 위에 너희를 높여 주실 것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다음과 같은 온갖 복이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너희는 도시에서도 복을 받고 시골에서도 복을 받으리라. 너희 몸의 소생과 밭의 소출과 소 새끼나 양 새끼 할 것 없이 너희 가축에서 난 모든 새끼가 복을 받으리라. 너희 광주리와 반죽 그릇이 복을 받으리라. 너희는 들어 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 야훼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너희 창고와 너희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이 넘치리라"(1절-6절. 8절). 야훼 하느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면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며 이러한 약속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야훼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나만이 참으로 너희의 신이다. 내가 너희 하느님이다'하고 강조하시면서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질투하는 야훼, 질투하는 신이다'라는 표현은 굉장히 인간적인 그런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까지 표현하시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이렇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시고 또한 당신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기를 원하시고 온갖 축복을 다 주시는데도 거듭거듭 불충실합니다.

 

성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너무나 깊이 죄에 빠져 있어서 때로는 벌하시기도 하시지만 이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이었고 또한 그 목적은 이 백성을 다시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자비와 사랑의 뜻이 얼마나 깊은 지를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거듭거듭 뽑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맡은 사명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받고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도 박해를 받기는 했어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가장 고생을 많이 했다고 볼 수가 있는 예레미아의 경우입니다.

 

본래 예레미아는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을 때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예레 1,6)하고 거절을 합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하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말씀을 그 입에 담아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말을 하면 그 말로 인해서 매를 맞고 박해를 받기는 했지만, 또 하느님에 의해서 입에 담겨진 말을 안 할 도리도 없었습니다. 예레미아서 19장 끝과 20장에 보면, 예레미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범한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 진노의 벌을 내리시라는 예언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 때문에 예레미아는 성전 사제 바스훌에게 잡혀서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아는 다시 하느님의 분부를 받고 그 사제 바스훌에게 "야훼께서는 그대의 이름을 사면초가라 부르실 것이오. 다시는 바스홀이라고 부르시지 않기로 하셨소"(예레 20,3). 그래서 망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아서 20장에 보면, 예레미아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계속 고생을 하게 되자, 드디어 하느님께 불만을 드러냅니다 :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 받는 몸이 되었습니다"(7절-8절). 그래서 예레미아는 자기 스스로 다짐을 하는 거지요 :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9절). 이렇게 자기 스스로 다짐을 하는데,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뼛속에 갇혀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를 알 수 있지만, 더불어 하느님께서 얼마나 더 크신 사랑의 손길로 당신의 예언자를 잡아주시는 지 알 수 있고, 동시에 또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시려고 애간장을 태우셨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서 열왕기 상권 19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아마 잘 아실 것입니다. 엘리야는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서 그들의 농락에 떨어진 아합 왕의 탈선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7년여 동안 흉년의 고생을 당하는 가운데 거짓 예언자 450명과 갈멜산에서 누가 진짜 예언자인지를 가리는 대결을 하게 됩니다. 그 장면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결국 거짓 예언자가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짓을 다했어도 그들의 예물은 하느님께 바쳐지지 않았는데, 엘리야가 바친 예물은 타지 못하도록 물을 갖다 붓고 또 붓고 해도 결국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타서 진짜 예언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450명의 거짓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아합 왕의 부인 이사벨이 듣고서 옐리야에게 경고를 합니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반드시 죽이리라'(1열왕 19, 2)하고 통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너무 두려워 급히 도망을 쳤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합니다 :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못난 놈입니다"(19, 4). 엘리야는 이 때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면서 그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바친 후에 지친 상태에서 싸리나무 덤불에서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서 깨우면서,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19, 7)하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 불에 달군 돌에 구워낸 과자와 물 한 병을 놓아 두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으며, 하느님의 사랑과 진실의 증인들, 때로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실에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노여워하심의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하심도 또 내리는 벌도 결국은 당신 백성을 당신께 대한 불신에서 신앙으로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온 세상 모든 이 앞에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증거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호세아 예언자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아들이나 딸같이 혹은 약혼녀나 신부, 아내같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이나 딸같이 혹은 약혼녀나 신부같이 사랑하시지만 이스라엘은 거듭거듭 불효 막심한 자식 또는 부정한 아내밖에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내인 이스라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시고, 그를 아름답게 꾸미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들이시지만, 이 아내는 거듭 하느님을 배반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꾸며준 그 아름다움을 미끼로 해서 오히려 몸을 파는 창녀가 됩니다. 이 때문에 남편이신 하느님께서는 마음 괴로워하시고 벌하시고자 하지만 조강지처라 내쫓지는 못하는 그런 안타까움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인간의 죄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같이 애끓는 하느님의 사랑을 호세아 11장 1절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지기만 했다. 바알 우상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렸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죽을 것을 살려 주었지만, 에브라임(=이스라엘의 한 부족이지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11,1-4).

 

이렇게 그냥 극진한 어머니 같은 사랑으로써 그 못나고 어린 이스라엘, 고아처럼 버려진 이스라엘을 그렇게 애써 키우고 온갖 사랑을 다 쏟았지만 그 사랑을 몰라본다고 한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잘난 것 하나 없는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무슨 까닭에서 그렇게 사랑하시고, 젖먹이를 곱게 길러주시는 어머니처럼 사랑으로 길러주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은 그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하신 축복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뜻에서였습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약속에 성실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계속 배은망덕한 행동을 합니다.

 

호세아서 11장 8절과 9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는냐."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꾸짖으시고는 또 다시 후회하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는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주겠는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만들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의 이웃 도시로서 역시 죄가 많아 멸망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이스라엘을 만들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애끓는 사랑을 잘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하시는가? 이스라엘에게서 회개하는 기미가 보였는가? 아닙니다. 아닌데도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 지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과 자비의 눈으로 이스라엘을 보실 때 그 죄 많은 상태가 너무나 불쌍해서 마음을 고쳐먹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변함없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곧 우리 인간들을 사랑해 주셨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 8절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슬러 짓는 죄보다 더 크고 깊습니다. 즉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 짓는 죄보다 더 크고 강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로마서 5장 20절의 말씀,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려졌습니다"라는 말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변함없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그리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한결같은 사랑, 진실도 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시듯이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디모테오서 후서 2장 13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책에서 보니까 진실이란 말마디는 히브리말로 emet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정말 진실하신 분이라는 뜻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단어를 라틴어에서 veritas로 번역했는데, 그만 그 바람에 철학적 진리처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 8장 23절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결코 철학적 의미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고, 이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뜻입니다. 더욱 깊이 생각해 보면 바로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 사랑의 육화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 그 사랑의 육화가 사람에게 오시니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께서는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육화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가다 보면,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새롭게 하시어 새로운 계약으로 바꾸시고자 하는 그런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아서 31장 3절, 4절과 20절과 22절을 보면 : "나 야훼는 멀리서 나타나 주었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워 주리라. 너는 다시 일어서서 몸치장을 하고 소구를 치며 흥겹게 춤추며 나오게 되리라." 이처럼 이스라엘을 다시 새롭게 만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더 나아가서 구원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계약을 예시하시는 그런 말씀입니다.

 

20절에 보면, "오냐 에브라임은 내 아들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나의 귀염둥이다. 책망을 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잊은 일이 없었다." 이어서, "바람둥이 같은 딸아 언제까지 떠돌기만 하겠느냐? 욕먹는 계집을 정숙하게 만들어 세상에 없던 일을 나는 하리라." 여기서 다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 사랑의 약속을 새롭게 하시려는 어떤 새로운 계약의 예시를 하고 계십니다. 또 이런 비슷한 내용이 에제키엘서 16장에 나옵니다. 16장을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고아처럼 버려진 계집애였는데, 이를 주워다 잘 키우고 정성을 다해 돌보아 줌으로써 예쁜 처녀로 자라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꾸며 주신 것을 오히려 미끼로 삼아 창녀처럼 몸을 팔았다고 호세아서와 비슷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시면서도 63절에서는 "그러나 나는 네가 처녀였을 때 너와 약혼했던 것을 생각하고 너와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계약을 맺으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이 있는데 그것과 다른 의미로 이제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계약을 맺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36장 27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온갖 부정으로 인해 더럽게 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 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당신 은총과 사랑을 베풀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완전히 새 인간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새롭게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이스라엘은 생명의 법을 따라 살면서 참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거듭거듭 배반을 당하시면서도 또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새롭게 다짐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까를로 까레또가 쓴 {주여 왜} 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작정하시면 하느님의 사랑은 무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없애버리시기보다는 차라리 산산조각을 내시고 짓이겨서라도 기어이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92면 하단). 까를로 까레또가 참 재미난 표현을 썼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실 때에는 사랑하는 우리를 잃어버리시기보다는 우리를 그냥 짓이겨서라도, 산산조각을 내서라도 기어이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하고, 기어이 당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그런 뜻을 가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얼마나 크신 사랑입니까? 그래서 이사야서 5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무너지면 어떻게 됩니까? 천재지변도 보통 천재지변이 아니지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그러면 모두 다 세상 종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라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고 다짐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같이 아주 무서운 경험을 시켜서라도, 산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무너지는 그런 무서운 경험을 시켜서라도, 그래서 거기서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기어이 너를 구할 만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어떤 의미로 죽기까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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