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34 주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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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03-01 ㅣ No.377

연중 제 34 주일 - 가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

        에제키엘 34,11-12.15-27 1고린 15,20-26.28 마태 25,31-46

     2002. 11. 24.

 

주제 : 오른편에 설 수 있는 삶은 어떤 것인가?

 

안녕하십니까?  올 한 해 잘 지내셨습니까?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의 강생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에 일치할 수 있는 삶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주간입니다. 이런 한 해의 마감은 달력에서 남긴 30일이 넘는 기간의 계산방법과는 약간 다릅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한 해 마지막 주간의 첫날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주일로 지냅니다.  대통령 중심제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대통령이 아니라 왕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상한 느낌을 갖게 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에는 그 나라의 백성들이 선택하는 ‘민주적인 모습’이 있다고 여기는 데 비하여 ‘왕 제도’는 내가 가진 생각과는 관련 없이 혈통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또 우리의 거부감을 담은 말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문제의 탓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들에게 탓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현상에 대하여 우리말의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답고 좋은 표현을 만들지 않은 국어학자들에게 탓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므로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일일 것이고, 개인적으로 그 끝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의 하나가 내 생명이 끝나는 날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한창 기쁘게 살고 있으며 내가 지금 사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즐거움이나 기쁨이 끝나고 난 다음에 올 일에 대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내가 미리 걱정해서 피하고 싶다고 큰소리쳐도 끝은 오기 마련이고 내가 맞이하고 싶지 않아도 인생의 결말은 나를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그 일을 피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돌아보고 싶지는 않더라도 그 결말에 해당되는 일들을 한번쯤 예상해보고 만일 그때가 되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해두는 일은 현실 삶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수차례 들었을 내용이고, 여러 차례 묵상하고 삶의 모습에 돌이켰을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심판에 관한 말씀을 오늘 다시 한번 더 듣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경이 쓰이는 말씀을 들으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주제는 ‘나는 과연 오른편에 설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왼편의 염소가 아닌 오른편의 양으로 구별될 수 있는 삶을 살았다는 판단은 참으로 큰 축복의 소리가 될 것입니다.

 

이왕이면 아름답고 이왕이면 즐거운 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므로 일부러 염소가 가는 서글픈 운명을 미리 생각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살이라는 것이 내 생각대로,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내 생각대로만 움직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아무런 불만 없는 생활일 것 같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은 그 현상을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양의 무리로 선택받은 사람들은 심판자를 향하여 ‘나는 칭찬받을 만한 선한 일을 특별히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선언은 과분한 것’이라고 말하는 데 비하여, 염소의 무리로 규정된 사람들은 심판자를 향하여 ‘이 사람도 대충 살고 저 사람도 대충 산 것 같은데, 왜 나만 그 축복에서 제외시키느냐고 묻는 것이며 그 일로서 내가 축복을 받는 사람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왜 미리 예고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이며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걸고넘어지려는 사람의 삶은 힘겨울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그 혼자 외로운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삶에 대한 판정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들판에 흩어진 양떼를 찾아 거둥하시는 날, 그 하느님이 주실 축복에 참여하고 싶다면 다른 양들이 모여 있는 들판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이 목청 놓아 부르시는데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곳에 가 있다면 축복을 얻는 일에 참여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성실하게 보내고 나서 하느님의 축복을 얻는 사람들이 갖고 살아야 할 삶의 정신은 두 번째 독서 고린토 서간에 나옵니다.  그 정신을 짧게 표현하자면 현재의 생활은 미래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언제인가는 잘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나는 부활할 거라는 것입니다.  이 부활에 대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며 가장 핵심이고 아주 중요한 삶의 정신입니다. 부활을 이루려면 반드시 죽음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죽음의 힘을 이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부활을 이루신 예수님 삶의 모범을 기억하고 산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 영광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보다 앞서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다시 살려주실 수 있는 분, 지금 고생하는 나의 현실 생활을 올바르게 평가해 주실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고,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예수님을 내가 진정한 마음으로 따르고 살아야 할 왕[王, King]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통치자인 대통령보다 하느님을 왕으로 섬기는 우리는 훨씬 더 나은 행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나의 주님을 ‘왕’으로 생각하고 내 삶의 참된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피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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