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33 주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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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3-02-28 ㅣ No.376

연중 제 33 주일 (가해)

         

         잠언 31,10-13.19-20.30-31   1데살로니카 5,1-6   마태 25,14-30

   

 2002. 11. 17.

 

주제 : 내가 만들 삶은 어떤 모양일까?

안녕하십니까?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서울보다 퇴계원이 더 춥다는 것을 안 것은 며칠 전이었습니다. 날이 차가워지고 기온이 떨어지면 우리는 어르신들의 건강을 걱정합니다. 하는 일은 젊은 사람들보다는 적어도 그분들이 곁에 있어야 마음 든든하다는 생각을 갖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자리에 와 앉으신 어르신들뿐 아니라 어르신보다 젊은 분들도 날씨에 따라 조심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있을 것입니다.  꼭 필요한 일에 소홀함이 없었으면 합니다.

 

오늘 연중 33주일은 1965년까지 있었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다음 제정된 ‘평신도 사도직의 날 혹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 주일이 되면 본당 공동체의 주인인 신앙인들이 어떤 모양으로 살고 있으며 나는 과연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이키자는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하느님 말씀은 세상의 끝이라고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날,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 적용되는 날, 즉 세상의 삶이 완성될 때에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어떤 기준으로 판별하실지 판단기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내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내가 어떻게 사용했느냐?’하는 것이고 그 시간을 보낸 모양에 따라 우리에게 다가올 축복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산 사람의 모범이라고 이야기하고 어떻게 산 사람이 하느님의 선한 판결을 받을 삶인지 가르쳐주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저마다 인간이기에 각자의 상황에 따라 올바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정말로 말하는 것과 같은 가치를 갖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갖고 태어나는 능력은 저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건물을 짓는 일과 관련된 것을 구분해 봐도, 건물을 설계할 능력이 있는 사람, 설계도면에 따라 그 건물을 지어내는 사람, 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만들거나 판매하는 사람, 그렇게 필요한 자재들을 운반하거나 옮겨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의 종류입니다.  어떤 광고에서 볼 수 있듯이 ‘내 몸이 천 냥이면, 간장은 구백 냥’이라는 소리로 특별히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한 가지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세상에서 각자가 가진 능력을 어떻게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겠는지 오늘 복음의 내용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하느님 나라 비유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들 저마다의 능력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능력의 차이는 다섯 달란트를 자연스럽게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 두 달란트를 힘겹지 않게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 한 달란트의 돈조차 버거워하는 사람들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격을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조건 많은 것을 벌어들인 사람만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다섯 달란트를 이용하여 합계 열 달란트를 만들어낸 사람에게나, 앞선 사람보다는 적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두 달란트를 이용하여 합계 네 달란트를 만든 사람에게나 돈을 맡겼던 사람의 판단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각자에게 있었던 한계는 그대로 인정하고 우리들 각자의 삶을 판단하신다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통하여 모두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의 잘못된 시각을 담아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오도(誤導)하는 사람들의 판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에게는 적용된 기준이 다릅니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선언은 내 삶을 마친 다음에 그저 평범하게 다가오는 판단을 넘어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사형선고보다도 더 큰 위력을 갖는 선언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드러내기를 거부했던 사람, 타인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것을 넘어 왜곡된 시선을 가지려고 했던 사람, 그 잘못되고 편협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다른 사람도 자신과 꼭 같은 방법으로 따라 주기를 원했던 사람은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쫒기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누가 그런 사람인가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질문은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각자가 가는 길과 그 삶이 맺을 결실은 각자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의 판단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이미 자신의 삶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잠언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내를 고생시킬 생각만 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사람의 태도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한 사람의 고생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들으니 요즘 결혼하려는 연령층의 사람들 가운데 돈 때문에 부부가 함께 직장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70%에 이른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세상의 풍습이라고 한다면 그 세상에서 살아야 할 마음자세는 특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완성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하는 전쟁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은 갑자기 망하지 않을 일입니다.  다만 세상 전체의 끝이 오기 전에 우리들 각자가 만들어내는 개인 생명의 끝이 먼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심판에 나는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살았으며, 얼마나 제대로 내가 가진 능력을 드러냈는지 올바른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을 왜곡되게 심판하실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삶을 하기를 바라는 분이십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끊임없이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삶으로써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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