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성체성혈 대축일-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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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2-06-01 ㅣ No.360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해)

 

            신명기 8,2-3.14ㄴ-16ㄱ     1고린 10,16-17   요한 6,51-58

      2002. 6. 2.

 

주제 :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지혜

신자 여러분,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여행을 하면 세상이 넓어진다는 말을 우리는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지 여행했다고 해서 실제로 세상이 넓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고 별 관심이 없던 일까지도 여행을 하고 나면 내 관심사에 포함되기에 세상이 넓어진 것으로 보게 된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즉 예나 지금이나 다가올 미래까지도 절대적인 크기로 생각한다면 세상의 크기는 조금도 변함이 없지만, 그 변함없는 세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넓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세상이 커진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람은 참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이제야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런 말을 사용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는 똑같은 일에 대해서 내가 반응하고 삶에 보이는 모습에 따라 우리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은 그 존재하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축일입니다. 성체(聖體)는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고 성혈(聖血)은 예수님의 피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성체는 ‘예수님의 실제 몸’으로서 미사에 참여하는 준비된 신앙인이 거기에서 힘을 얻는 빵의 형태로 보이며, 성혈은 우리가 가까이 만날 일은 드물지만 예수님의 실제 피로써 우리가 보기에 포도주와 물이 적당히 섞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밀로 만들어진 빵과 포도주와 물이 섞인 것으로 봅니다만, 거기에는 사람이 간단히 보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신비가 포함된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은 신앙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서 보여주시는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이었습니다.  그보다 앞선 주일은 성령강림축일이었습니다.  성령이 우리 사람들에게 내려오셔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의 모습과 행동이 무엇인지 알려주셨고, 그 중에 우리가 가장 본받아야 할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의도를 가진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삶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몸과 피의 의미를 특별히 기억하는 성체와 성혈 축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살아가는 세상의 길이는 다릅니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만큼 세상을 살다가 떠나야 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생명, 즉 몸과 피를 바쳐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기억하자는 교회의 의도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기는 해야 하겠지만, 사람이 사용하자고 정해놓은 말과 표현이 부족하니 하느님께서 실제로 드러내 보이려고 하시는 일과 사람이 알아듣는 일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들으려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알아듣고 이해하는 만큼만 표현하고 그 만큼 사랑하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들은 복음말씀은 주일이면 늘 거행하는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저도 오늘 말씀을 쉽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라는 스승을 몇 년간 따라다녔던 제자들 역시 그 말씀이 알아듣기 어려워서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요한6,69)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더 이상 따라 다니지 않았다는 소식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몸과 피, 지금도 미사를 통하여 그 모습과 효과가 재현되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는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자조작을 이용하여 병자들에게 필요한 장기(臟器)를 만들겠다고 덤비는 세상이 되고,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 돈만 있으면 그대로 실현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기는 했어도 세상에는 여전히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생각이고 인류를 위해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느님이 하신 일을 전하는 것이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설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와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이끌고 갔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백성들 앞에서 이룩한 놀라운 일들은 자신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라 모두 하느님의 업적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길을 인도해주신 일, 떨어지지 않는 생명의 음식으로 만나를 마련해주신 일도 하느님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내 이름 몇 글자를 드러내고 싶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특혜를 베풀어주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세상에서 본다면 모세의 자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고 백성들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랐던 하느님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며, 함부로 말할 수 있다면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고 무작정 기다린다고 해서 사람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도움이 되는 일을 했으면서도 무작정 기다리는 하느님의 모습은 여행하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옹기종기 비좁은 곳에서 내 땅과 네 땅이라고 금을 긋고 경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조금만 벗어나면 널리 펼쳐진 자연과 더불어 놀라운 힘을 느끼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를 대고 그것을 쉽사리 행하지를 않습니다.  이기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세상이 바뀌기를 바랐던 하느님의 어리석음, 하지만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그렇게 보는 한, 우리가 얽혀 사는 세상에 행복이란 자리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깊고, 하느님의 뜻은 사람의 뜻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잠시, 내 삶을 돌이켜 내게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겠는지 살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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