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9일 (수)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강론자료

사순 6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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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3-28 ㅣ No.52

수난 성지주일 (가해)

          이사야 50,4-7  필립비 2,6-11  마태 26,14-27,66

       1999. 3. 28.

       

오늘은 사순 6주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직접 고난을 받아들이신 성주간의 첫날.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오늘의 미사 양식은 조금 다릅니다. 미사라는 것 자체가 우리 고유의 풍습을 담고있지는 않아서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평소에 하지 않던 다른 의미의 일을 한가지 더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면서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한 일입니다. 그것을 전례에서는 성지(聖枝)가지 축성이라고도 합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행한 나뭇가지 축성의 유래는 예수님을 왕으로, 구세주로 고백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던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후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마태오 21,9)'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위대한 성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여, 간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전례에 사용한 나뭇가지를 갖고 가서, 집의 십자가에 걸어놓습니다. 그 의미는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요 구원자'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처럼, 여러분이 갖고 가신 성지가지를 통하여 같은 마음자세 다짐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런 고백을 하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지도층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하여 자신의 목소리나 생각을 실제행동으로 이루지도 못하던 사람들, 즉 땅의 사람들[암하렛츠]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잠시 전에 읽은 '마태오가 전하는 수난기'에서 예수님을 살려내기 위한 반대의 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하고 군중에 묻혀 안타까움을 삼켜야 했던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한 영화 '나자렛 예수'를 보면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고 들은 마태오의 수난기는 우리가 '복음'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모습을 통하여 삶의 희망을 받고 용기를 받아 가는 것 대신에,  사람들의 질투와 오해 가운데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묵묵히 실천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담고 있기에 그렇게 말합니다.

 

가톨릭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은 인간의 입장이라면 거부하고 싶은 '수난과 죽음' 뒤에 다가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수난과 부활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서 그렇지, 이러한 일은 우리 인간의 일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가정에서 우리가 편안하고 하는 일이 잘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인생에서 많은 노력을 들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이루어진 행복이요, 안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기쁨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거나 또는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는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을까?  어찌하여 그렇게  비참한 죽음의 길을 걸어가셔야만 했을까 하고 질문하지만 우리가 직접적인 응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도 같은 생활, 같은 삶을 통하여 예수님이 보여주신 일을 체득해나가는 방법 외에 다른 일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수난기의 구조는 이러합니다.  '유다가 스승을 은전 30닢에 파는 이야기 - 과월절 음식을 드는 이야기 - 제자의 배반예고 - 베드로의 장담 - 올리브 산 게쎄마니 골짜기에서 하신 기도 - 성전에 붙잡혀 가심 - 거짓 증언들 - 하느님 모독의 사형선고 - 해골산의 십자가 처형 - 백인대장의 신앙고백 - 반대로, 백성의 지도자들이 보인 철저한 불신'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도 드러나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얼마 만에 이루어진 사건일까 질문한다면, 단 하룻밤 새, 서른시간 내에 이루어진 일사천리의 일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가리켜, 강도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고, 그래서 그 싹은 빨리 잘라버릴수록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보인 불신은 예수를 죽음에 붙이고 난 시간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만일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았더라면, 무엇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대열에 우리가 머물렀겠는지, 지금의 우리자세를 돌이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행동이 됩니다.

 

좋지 않은 마음, 바뀌어야 할 마음이라면 빨리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씩은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동시에 득(得)이 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이 참다운 인간의 삶이 되는 것이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행동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잠시 우리 삶의 참된 모습을 위하여 다짐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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