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사순 4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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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3-09 ㅣ No.38

사순 제4 주일(가해)

        사무엘 상 16.1ㄴ.6-7.10-13ㄱ  에페 5,8-14  요한 9.1-41

     1999. 3. 14.

주제 : 눈으로 본다는 것

 

사람에게는 눈이 있습니다.  이 눈은 밖의 사물을 관찰하거나,  내 몸 이외의 다른 사물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 눈은 두 개가 있어야 흔히 정상이라고 합니다.  아마 한쪽만 있으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사물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탓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머무는 세상에는 두 눈을 가지고 같은 사물을 봐도, 뒤돌아서면 서로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원인은 눈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사물이 다른 것이 되든지, 아니면 눈 이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든지 어딘가에 그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본다는 것, 눈을 통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눈으로 올바르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잘 보인다고 하는 사람들이 갖는 의무는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몇 년간을 움직였는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소경에 대해서 묻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제자들이 보기에도 ’육체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는가 봅니다.  이런 질문은 당시 사회에서 소경에 대해서 바라보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설하십니다.

 

어릴 때에 저희 집은 무덤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을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때에는 아무리 뛰어도 발걸음이 도대체 빨리 떨어지지 않기도 했고, 없는 꽁지가 빠지라고 열심히 뛰기도 했지만, 가끔씩은 짧은 기도를 무작정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다음날 용기를 내서 같은 장소에 가보면, 귀신은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제 키 세·네[3 또는 4] 배 되는 나무에 허연 비닐이 걸려 펄럭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보게 만들었으니, 눈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사람이 갖는 마음, 정신의 과정이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훨씬 훗날의 일입니다.

 

이러한 경우처럼,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다른 차원의 답을 하십니다. 몇 마디의 말씀과 눈을 씻은 후에 그의 눈이 정상인처럼 보게 되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간단한 이 행동은 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항의와 오해가 나타나게 되고, 이것이 예수를 향한 조직적인 반발의 또 한가지 원인이 됩니다. 세상일의 특성은 그렇습니다. 왜 다른 사람의 행동은 내가 세운 기준에 꼭 맞아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행동은 그대로 놔두면 왜 잘못된 것인지 가끔씩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사무엘도 눈으로 볼 수 있었기에 사울의 후계자를 새롭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겉모습을 보고 판단했다고 하느님께 꾸중듣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 눈으로 본 것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무조건 비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눈으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본다고 자랑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말라.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눈을 심어주신 분이 인간에 대해서 내리시는 선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으로 보고, 체험한 것에만 모든 확실성을 두려고 합니다.  사람이 자신감을 산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선언을 인간의 자신감을 꺾으려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거기에 담긴 뜻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인정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마음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心眼: 사물을 살펴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의 작용도 감정이 개입하면 틀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이 나에게 섭섭하게 행동했다고 했을 때, 그 때에 판정하고 규정하는 것은 틀릴 확률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보는 일에 감정의 개입을 조절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는 마음의 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강조합니다.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맺게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그 반대되는 잘못에서 우리가 돌아설 수 있도록 잘못을 깨우쳐 주는 일,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두 눈을 갖고 이 세상의 빛을 보고 삽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시력이 떨어지면, 안경으로 그 힘을 보충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가진 눈으로 세상의 사물을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할 일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남기시는 말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참된 빛을 이웃들이 더 널리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소리치는 것으로서 신앙인들이 할 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기만 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우리의 미래에 다가올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더 나은 빛으로 볼 수 있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내리실 심판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눈으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 같은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경에게 밝은 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셨던 예수님께 우리도 어둠에 머물지 않도록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사순 4 주일 강론 조회 횟수는 기존의 53회를 제외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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