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32 주일-다해-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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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8-11-07 ㅣ No.4

연중 32 주일 (다해)

        2마카베오 7,1-2.9-14     2테살로니카 2,16-3,5     루가 20,27-38

    1998. 11. 8.

     

사람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길이는 얼마나 될까요?

엊그제 두 번째 견진교리에서 &#39;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나이 100살에 두 번째 아들을 보았고<창세 21,5>,  나이 175살에 죽었다<창세 25,7: 125살로 이야기한 듯한데....>&#39;고 했더니 학생들이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아직은 그만큼을 살지도 못했고 요즘의 상황으로 봐서 그렇게 오래 동안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에 우리가 놀라는 일일 것입니다.  사람은 과연 몇 년이나 살 수 있을까?  육체가 건강하고 돈도 그런 대로 있다고 한다면, 아마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누릴 만큼의 조건을 먼저 이루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하는 오늘 연중 32주일 &#39;다 해&#39;의 성서 말씀은 삶에 대한 주제를 다룹니다. 복음은 부활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첫 번째 독서는 하느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육체의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본보기에 대해서, 두 번째 독서는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가톨릭 교회의 특징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39;부활(復活)의 종교&#39;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종교인이라고 해서 죽음으로  끝맺지 않는 사람이 없겠습니까마는, 다른 종교에 대한 것은 잠시 접어두고라도 &#39;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부활&#39;이라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사실은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육체를 움직여 우리가 음덕(蔭德)을 쌓으면 그 덕이 누군가에게 전달되겠지 하는 자세,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한 가지 요건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 통하는 이야기 가운데 못된 일의 한 가지는 &#39;못 먹는 호박 찔러보기&#39;, &#39;구걸하는 사람의 쪽박 깨트리기&#39;가 있습니다. 내가 가지 않을 길이라는 것을 세상의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는데, 복선(伏線: 뒷일의 준비로써 미리 암암리에 베풀어 두는 것)을 깔고서 예수님께 질문하고 곤경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폐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부활을 믿지도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그렇게 주장하던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부활이후의 삶을 묻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7형제 모두가 한 여인을 아내로 삼아 살던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자식이 없이 죽었다. 만일 이들에게도 부활이 있다고 치자, 잘은 모르지만, 그들이 부활하면 누가 그 여인을 아내로 데리고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은 질문의 차원을 바꾸어 주는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가 지금 보이는 것과 다른 생명인 부활을 얻고자 한다면, 뭔가 치뤄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오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시달리시던 예수님도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그 값을 치뤘습니다.  살아있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어떤 값을 치루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11월 6일에는 제가 봉성체를 했습니다.  마지막  6번째 방문한 집은 벽제 화장터를 지나서 대자리 삼거리를 지나서 고양시 수도사업소 가까이 있던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여기 고양동보다는 아직 덜 발전된 곳이었는데, 거기에도 개신교 교회가 있었습니다. 무척 많이 낡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간 분들과 오고간 소리. &#39;개신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교회를 잘 세운다&#39;는 것이었고, 천주교는 거기까지 관할 구역을 둘 정도로 왜 그렇게 교회가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러갔습니다.  몇 가지 말이 오고갔지만 결론은 없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질문하는 사람들은 치뤄야 할 대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부활이라는 열매가 관심 있어 묻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라는 대가를 우리에게 얻어주기 위해서 당신의 인간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습 때문에 여러 가지로 비판받는 개신교 사람들은 그 대가를 얻기 위해서 이 지상에서 교회에 돈을 열심히 가져다 바칩니다.  십일조가 그런 의미를 띠고 있으며, 감사헌금이 그렇고, 또 수시로 하는 헌금들이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회에서는 그런 말을 하면 안되는 것으로 은근히 강조합니다. &#39;천주교는 돈얘기 안해서 좋다&#39;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강조합니다.  대신 천주교에서는 생명을 우리가 바칠 것을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그런 것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현실에서 내가 잡을 수 있는 돈에 대한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사실은 돈을 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현실의 것에 우리가 매여 있다면, 그것은 사람생활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39;생명의 봉헌&#39;에 대해서도 우리는 소홀히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봉헌을 제대로 하는 수단으로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39;일년에 두 번은 고해성사 하기, 주일에 빠지거나 소홀히 하지 말고 미사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형편이 닿는 대로 헌금과 교무금 내기&#39;등을 이야기합니다.  절대적인 평가를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실하게 그것을 이행하는지 의문입니다.

 

우리가 현세 생활에 이런 일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실은 무엇이겠습니까?  가톨릭교회에서는 지상에서 얻을 결실은 그다지 강조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가톨릭교회와 같은 고해성사를 강조하지는 않아도 현실의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재산상의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삶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아닙니다만, 신약성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요한 묵시록 3,15-16에 나오는 &#39;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39;을 통해서 &#39;차라리 차겁거나 뜨겁든지 하다면 확실한 판단을 내려서 처방을 할 수 있겠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너를 입에서 뱉아 버리겠다&#39;고 선언하십니다.  우리 생활의 모습을 돌아봐야 할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보다 원시시대에 살았다고 비판하는 구약시대에도 인간은 자신의 것과 하느님의 몫을 구별할 줄 알았습니다.  &#39;어미의 뱃속을 처음 열고 나귀를 대신하여 양을 제물로 바치고, 처음 태어난 맏이들은 하느님의 것이니 다른 것으로 물러내야 한다&#39;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20세기 과학의 똑똑한 세계를 사는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몫과 인간의 것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첫 독서에 나오는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의 이야기도 같은 뜻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더러 아무소리 하지 말고 죽으라고, 순교하라고 말하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그 일곱 형제와 어머니가 택한 삶의 방법이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구약성서 2경전 마카베오 하권 7장(303-306면)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현실에 사는 우리도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박해하겠다고 나설 사람도 눈에 띄지 않고, 우리가 현재 가진 믿음으로 과연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기준을 하느님의 뜻에 적용시키는 것은 분명 어렵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보내고 나면, 교회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올해는 11월 29일이 1999년 가해 대림 1주간 첫날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해를 마감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현실 삶의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세상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과 뜻이 속히 퍼져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시작을 위한 올바른 자세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시간을 빼앗으러 오시는 분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 생활을 제한하고 잘못하는 일에 협박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지는 우리가 더 잘 압니다.  다만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깊고 깊은 우물속에 들어가 있지 않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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