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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26: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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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6)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서다
- 최양업 신부가 산골 우물가 무궁화 나무 아래서 동네 사람들에게 천주가사 중 ‘사향가’를 가르치는 모습을 인형작가 임수희씨가 인형으로 표현한 작품. 출처=가톨릭 굿뉴스.
최양업 신부는 민족의 주체성뿐 아니라 문화적 주체성을 뚜렷하게 지닌 사목자였다. 그는 스승이며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장인 리브와 신부에게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때 조선의 현실과 풍속을 익힌 후 보내라고 요청했다. 또 공자ㆍ맹자가 조선인이 아니며 사대부 양반들의 글인 한문도 우리나라 글이 아닌 외국어라고 했다. 조선 문화와 중국 문화를 구별하여 중국도 외국이고 유교도 외국 사상이라고 했으며, 조선의 종교 문화에는 불교ㆍ유교ㆍ도교ㆍ무속이 혼재하고 있다고 했다. 또 가톨릭 교리에 대한 학문적 탐구 없이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비난을 일삼는 지식층의 폐쇄성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어떤 사상이나 종교가 민족과 사회의 발전에 유익하다면 동서양을 구분하지 말고 개방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교회가 올바른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 하고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 최양업 신부는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 섰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 천주가사 중 공심판가를 옮긴 필사본. 가톨릭평화신문 DB.
천주가사 통해 신앙과 신자의 삶의 방식 가르쳐
- 최양업 신부는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겼다. 사진은 「천주성교공과」절두산순교성지 소장본.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짓게 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든다. 첫째, 천주교가 지속적인 박해로 점차 민중 종교 운동으로서 성격을 띠게 됐다. 둘째, 여 교우와 하층민 출신 신자들이 증가했다. 셋째, 교리교육의 대상과 실상이 바뀌었다.
한문 모르는 중하층민 신자 늘어
한글의 유용성, 전교에 활용
-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 등 4가지 근본 교리를 154조목으로 나눠 문답식으로 설명한 「성교요리문답」. 한문본인 이 교리서를 최양업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교우촌을 사목하면서 한글이 교리교육에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 최 신부는 신자들이 교리를 쉽게 배우고 이해하는 데 한글을 적극 활용했다. 최 신부는 또한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 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은 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다.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사용됐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2일, 리길재 기자] 0 1,97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