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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사제열전7: 한기근 신부 - 경향잡지 통한 문서선교의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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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9-19 ㅣ No.469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한국교회 사제들 - 한국교회 사제열전] 7. 한기근 신부(1867-1939)


'경향잡지' 통한 문서선교의 개척자

 

 

한기근 신부.

 

 

"소중한 복음 성경을 번역할새, 책 볼자로 하여금 읽을 때에 서슴치도 아니하고, 뜻도 해박(該博)히 알아듣기 위하여, 말마디를 각각 나누고, 글자의 음이 길고 짧은 것을 분별하고, 숨쉬는데 점을 두었으니…."

 

한기근(바오로) 신부가 1910년 「사사성경」(四史聖經) 발간 무렵에 한글 띄어쓰기와 부호사용 원칙을 밝혀둔 내용이다.

 

한 신부는 말마디를 나누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 신 자여…"를 "하늘에계 신우리아 비신자여…"로 붙여 읽기가 쉽다며 띄어쓰기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언문에 통달한 자도 그러하거늘 언문에 서툰자와 아이들이 어찌 바로 읽겠느냐?"고 말했다. 당시 출판물들은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별다른 보조부호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한 신부는 천주교회가 박해를 이겨내고 기반을 닦아가는 과정에서 문서선교의 새 장을 연 인물이다.

 

유길준과 주시경 같은 개화기 한글학자들이 「대한문전」과 「국어문전음학」 등을 통해 어문규정을 정리한 게 1905~1908년인 점에 미뤄볼 때, 한 신부는 적어도 천주교 내에서 선각자요 계몽운동가로 불릴만하다.

 

「사사성경」은 4복음서를 처음 우리말로 완역한 신약성경인데, 개정과 중간(重刊)을 거듭하면서 1971년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나올 때까지 무려 60년간 널리 이용됐다.

 

지금도 구교우 집안에서 가보(家寶)처럼 전해 내려오는 「요리강령」도 한 신부 번역으로 빛을 본 교리서다. 매 장마다 한편에 그림을 싣고 그 옆에 설명을 붙인 프랑스 교리서를 갖고 번역한 이 책은 출간 당시 호화판(?) 그림이 실려 있는데다 값도 싸서(68전)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정보에 어두운 시골 신부들은 그 교리서를 접하고 "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걸 진작 알려주지 않았느냐"며 교구청에 항의를 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한 신부는 1867년 경기도 양지 추계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모친 방 바르바라를, 9살 때 부친 한 안드레아를 잃은 후 서울에 사는 백부 한영직(베드로)의 집에서 살았는데, 그때 세례를 받고 종현학당에서 공부하다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박해를 피해 양지로 숨어든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도 세례를 늦게 받은 이유는 병인박해로 교회가 와해된 상태라 사제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살 소년 한기근은 정규하 등 신학생으로 선발된 친구 3명과 사제의 꿈을 안고 말레이반도 페낭신학교로 향했다. 여행 경험이 없고, 외국어도 모르는 어린 신학생들이 뱃길을 이용해 페낭에 닿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정규하 신부 유학 회고기에 남아 있다.

 

"(배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우리 방으로 가져오려니 하고 점심을 기다리나 무소식이라. 3일 동안을 기다리나 아무 동정이 없으니 두 아해들은 (배가 고프고 막막해서) 눈물을 흘리더라. 배 위층으로 간신히 올라가니 양인(洋人)이 지나감에 손짓으로 입을 가리키며 먹을 것을 애걸하매, 얼마 있다가 면보(식빵) 세 개와 홍주 두 병과 황유(버터) 두갑을 청인이 갖고 오더라. 그것을 먹으매 정신이 나더라.

 

(홍콩 항구에서 소형선을 타고 상륙할 때) 청인을 불러 궤짝을 싣고 노를 저어 가나 당가(경리부) 신부 댁을 찾을 길이 난처하더니, 선인은 선가(배삯)를 주어야 가겠다며 중간에서 가지 아니하고, 두 시간이나 힐난(詰難)을 하나 결말이 나지 않으매, 선가는 10원이오 주머니에 있는 돈은 3원 뿐이라. 포구에 내리매, 영국 순사와 사람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한 신부는 그토록 어렵사리 페낭신학교에 가서 공부했으나 도중에 토혈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래서 그해(1884년) 귀국길에 올라 용산 예수성심학교에서 사제수업을 받고 1897년 사제품을 받았다. 국내 신학교 개교는 종교자유를 획득한 한불수호조약(1886년) 이후의 일이라 그 전에는 기후적응조차 쉽지 않은 페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한 신부는 황해도 해주에서 잠깐 본당 사목을 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교리서와 성경 번역작업에서 드러났다.

 

한 신부는 한자와 라틴어 실력이 뛰어났다. 「사사성경」만 해도 마태오복음서를 손성재 신부 등 3명이 번역했으나 나머지 마르코ㆍ요한ㆍ루카 복음서는 한 신부 혼자서 했다. 한군자(韓君子)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조용한 성격에 학구파적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번역의 선구자 한기근 신부가 역주(譯註)한 「사사성경」은 1971년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나오기 전까지 60년간 신자들을 복음 말씀으로 인도했다. 한 신부는 초판 인쇄본을 일독한 후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쇄에서 오식은 불가피한 것이나 요왕(요한)복음 17장 4~5절을 제외하고는 대단하지 않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는 성격이 온화하고 진중하며 침묵을 좋아했다. 남의 말이나 원망 같은 것은 일체 입밖에 내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쓸데없는 농담이나 객담을 싫어했다. 어느 신부보다 많은 일을 하지만 밖에 드러나는 일은 없다. 70살이 넘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많은 수녀들의 고해와 고아들 고해, 매일미사를 맡아 해주었고, 틈만 나면 수녀원에 와서 국사 한문, 심지어 수학까지 힘닿는 대로 가르쳐주었다."(「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100년사」 260쪽)

 

한 신부의 문서선교는 「경향잡지」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1914년부터 20년간 「경향잡지」를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에 복음을 전했다. 그의 생애 전부를 이 잡지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매달 2회 발행하는 잡지를 홀로 편집하고 발행하는 한편 성서출판소에서도 번역ㆍ교정ㆍ편찬을 도맡아 했다. 67살에 「경향잡지」를 그만뒀을 만큼 문서선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그는 한 평생 글을 벗하고 살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한 글은 남긴 게 없다. 자신은 낮추고 오로지 하느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신자들 계몽을 위해 복음을 실어 나르는 일에만 몰두한 사제다.

 

그는 1939년 10월 18일 성모병원 병실에서 지상의 벗들에게 "성덕에 나아가기를 진심전력하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화신문, 2009년 9월 13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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