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사목신학ㅣ사회사목

[가정사목] 사랑과 생명의 샘으로서의 가정 공동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2 ㅣ No.49

사랑과 생명의 샘으로서의 가정공동체

 

 

머리글

 

가정은 무엇보다도 사랑과 생명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일치를 가장 충만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장소로서의 가정은 단순히 우연적인 공간 안에서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곳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관계를 통해서 사랑과 생명을 더욱 확고히 함으로써 또 다른 여러가지 관계를 창조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하나의 제도로서의 가정은 사적인 것에서부터 공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일에서부터 사회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많은 면들이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정은 그 구성원들이 보다 완전한 개인적인 성장에 도달하기 위해서나, 또한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하나의 작은 교회, 곧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인 '가정 공동체'가 정의하는 것처럼 '가정 교회' 라고 말할 수 있는 가정은 시민 생활의 영역에서이든, 교회 공동체에서의 영역에서이든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서의 공동체로서의 중요성을 지닌다.

 

가정이라는 주제는 그리스도교 윤리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서 설명되어질 수 있는 주제이지만 필자는 이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정'이라는 하나의 제도에 관한 그리스도적-인간학적 분석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선적으로 가정을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부터, 곧 더욱 깊게는 인간학적인 관점에서부터 접근하는 것이며, 이러한 접근을 위해서 과거와 현대의 가정 모습을 살펴 나가면서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가정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을 가장 충만하게 실현시키고 생명을 성숙시키고 또 보장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를 지닌다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한다.

 

 

I. 오늘날의 가정

 

1. 과거의 상황

 

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변화와 함께 가정의 개념 자체도 일종의 위기로서 느껴질만큼의 크나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과거와 비교해서 가정의 개념이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 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제 오늘날의 가정은 더 이상 과거의 가부장 제도에서 볼 수 있었던 보호 장치로서의 가정 개념과는 점점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실상 과거의 가정이라고 하면 가족 구성원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내적 및 외적 제도라고 말할 수 있고, 그러한 제도 안에서, 또 그 제도를 위해서 일과 도움, 교육까지도 보장이 되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제한된 자유나 결핍까지도 인정될 수 있었다.

 

둘째, 산업화 시대를 맞으면서 가정은 과거의 가부장적 제도의 가정이 안고 있는 단점을 더 보완한다는 의미에서 각 구성원의 책임을 나누어 갖는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가정의 모습에서 물론 각 구성원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율성이 부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의 가정은 결과적으로 일종의 소비 철학에 의해 조정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결국 분할화된 가정의 모습은 가정의 구성원들이 일의 노예가 되면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아야하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가정 구성원의 정체성, 즉 남자로서, 여자로서, 혹은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상실되어 갔고, 사회와의 관계에서 볼 때, 결국 가정은 사회의 요구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비가 가정의 본질을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유용성이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비추어졌고,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기본가치가 점점 무너지면서 하느님은 단순히 흥미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셋째, 이렇듯이 가정은 위의 두 가지 현상으로 볼 수 있듯이 후기 산업화 시대가 보여주고 있는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체 가정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의 사고 방식으로 인해 등장하는 새로운 모습의 가정 형태는 아주 광범위한 분야에서 보여지고 있다. 특별히 소비 사회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양상 안에서 젊은이와 여성들 사이에서 외적인 모습을 중시하는 요구에서부터 보여지는 행동들이 가정 안에서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게된 것이다. 또한 생명과 관련되는 모든 분야에서 보여지고 있는 소위 말하는 '자율성의 문화'는 매우 심각하다. 가정 안에서 유용성과 쾌락만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현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2. 후기 산업화시대의 가정

 

소위 말하는 후기 산업화 시대의 개방화된 가정이 지니는 특징을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일반적으로 부부의 관계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부부로서의 결속보다는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늘 감성적이기를 원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늘 성급하게 확인한다. 왜냐하면 그들 대화의 정상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은 곧바로 육체적인 관계로 이어져야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와같은 사고는 그들 부부의 삶을 위한 여러가지 기본적인 임무에 대한 것들도 항상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2) 상대적으로 그들의 관계 안에는 참된 사랑을 위한 자유의 제한까지도 요구하는 혼인 제도와 그 제도가 지니고 있는 신뢰라는 가치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깔려 있다고 보인다. 결국 종교적 형태이든 사회적 형태이든 혼인이라는 예식이 서서히 사라져가게 되고 단순한 동거 형태의 부부가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된 이유는 어쩌면 여권신장주의자들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혼인 관계에서 오는 육체적 결합의 중요성, 상호 협력이라든가 삶의 기쁨과도 같은 가정의 여러가지 가치들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된 것이다.

 

3)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후기 산업화의 시기에서 보여지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의 문화적 뿌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새로운 급진주의를 잉태하게 된다. 여기서의 자연적이란 것은 루소가 주장하는 자연의 의미가 아니라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뿌리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본능적이고 직설적인 것들을 추구하기 위하여 합리주의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들여 변형시키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개인적인 이익과 온갖 혜택을 누리기 위하여 실천적인 면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써 모든 현실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부부 관계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경향은 결국 극도의 개인주의로 치닫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자신들만의 기쁨을 위한 동거생활이 될 것이기 때문이고 나아가서는 부부생활에서 요구되는 신뢰라든가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다양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가정의 모습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결국은 전통적인 가정의 본질적인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5) 후기 산업화 시대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특징은 가족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별로 커다란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가정이 하나의 특징으로 갖는 '자유로운 시간'이라는 개념은 아마도 '자유의 시간'이라는 의미 보다는 '무료한 시간'이라는 의미가 더 어울린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오늘날의 가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의 '개방'이라는 의미는 어느 정도 열려져 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완전히 돌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개방일 것이다. 다시말해서 수용의 의미에서의 개방이 아니고 어떠한 돌발 사태에라도 즉각 대처하여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개방이라는 것이다.

 

 

3. 예상되는 한계

 

이렇듯이 오늘날 가정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형태를 띠어가고 있는 오늘날 가정에 대한 해석은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부부 생활과 가정 생활 안에서 상호간의 신뢰에 대한 열망 - 이 열망은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열망이다 -은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고방식에서 드러나고 있는 '개방'이 지니고 있는 정확한 개념 확립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1) 먼저 이러한 열망은 '즐거움', '충만한 기쁨', '자유', '자유로운 시간'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것이며, 따라서 산업화 시대의 가정 이전까지의 전통적 가정이 안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여러가지 것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반면에 가정에 대한 급진적인 개념이 지배하는 후기 산업화 시기의 가정은 결국 전통적 가정 개념이 안고 있던 부자연스러운 것들을 더욱 악화시킨다.

 

급진적으로 개방된 가정은 무한정한 자유가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방어에 급급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만을 가져오는 폐쇄성을 면치 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정은 자율성을 성숙시키는 참된 자유에 역행하는 것이며, 충만한 인간적 의미에서의 고유한 실존을 실현시키는데에 방해만 될 것이다.

 

2) 따라서 급진적인 개방이란 거짓된 개방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구조적으로 이기주의, 소비주의를 낳기 마련이며, 그 자체로서의 가치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았고 성신 안에서 새로이 창조되었으므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하느님의 손에서 흘러 나오는 것으로 보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피조물을 주신데 대하여 고마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청빈과 자유의 정신으로 피조물들을 사용하고 그 헤택을 누리며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세계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고린 3,22-23)".

 

3) 개방이라는 이름의 허황성은 결국 '삶의 두려움', '이기주의', '죽음의 문화'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 달란트를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주인의 인색함을 핑게삼아 그것을 땅에 파묻어두는 어리석음과도 같다. 결국 삶에 대한 두려움, 곧 모험에 대한 두려움, 결국은 죽음의 문화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따라 혼란이나 동요까지도 예상되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성서 말씀과도 같이 가정 안에서의 올바른 관계는 절대적으로 서로를 내어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거짓된 개방의 모습의 가정은 단지 눈 앞에 닥치는 감성적인 것들에만 열려 있는 모습일 것이며, 결국은 현대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노이로제를 유발시키는 근원지가 되고말 것이다.

 

 

II. 참된 의미의 개방적 가정의 건설을 위하여

 

질적으로 새로움을 주고, 또한 신뢰할 수 있으며, 참된 자유와 진실된 사랑의 요구에 부합되는 참된 가정의 건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후기 산업화 시대의 가정이 표방하고 있는 '개방'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개방' 개념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개방'이라는 개념이 가정 내의 각 구성원 사이에 편안함과 안정을 제공해 줄 수 있고, 또한 서로를 존중해 줄 수 있는 의미로서의 개방이어야 할 것이며, 각 구성원들 서로가 전적으로 서로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참된 개방성을 지닐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정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와 친교는 가부장적인 가정과 산업화 시기의 가정이 가졌었던 단점들, 나아가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가정 개념의 단점들을 진정으로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다.

 

 

1. 참된 개방성

 

1) 참된 개방성이란 인간의 삶이 역동적이며, 또한 일종의 모험이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강조하는데서부터 이해될 수 있다. 존재의 역동성이란 실재와의 연관성 안에서 성숙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역동성은 각자에게서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로 드러난다. 실상 사랑이란 수학적인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수학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항상 둘이 되지만 사랑의 공식에서 하나 더하기 하나는 열이 될 수도 있지 않는가? 스스로를 빈곤하게 만들고 폐쇄시키는 모습을 과감하게 탈피하면서 적극적으로 삶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전체성 안에서 이해하게 될 때, 그 삶은 무한하게 풍요로와질 것이며, 삶 자체의 본질에 더욱 가깝게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2) 따라서 본질적으로 참된 개방성이란 '사랑'과 '삶'의 의미와 동일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개방성이란 삶을 치장하거나 겉치례로 화려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항상 인간을 구체적으로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인간을 바라볼 수 있기를 요구한다. 사랑과 생명의 표지로서의 참된 개방인 것이다. 이는 가정 안에서 각 구성원의 참된 성숙을 위해 열려있는 것을 의미하며, 가정 안에서의 어떤 불안이나 염려에 대해 결코 동요하거나 초조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랑과 생명이 지니는 가치가 바로 참된 개방성의 가치이며, 이러한 가치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가치는 우리 모두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이상적인 가정을 위해, 곧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성숙을 위한 참된 표지이기 때문이며, 이는 분명 인간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총체적 가치, 좀 더 구체적으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이렇듯이 참된 의미의 개방적 가정의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혼인과 가정에 관한 성서 텍스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곧 복음은 사랑과 생명이 지니는 최고 가치를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으며, 거기서 참된 개방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가족적 친교의 원리와 힘으로서의 사랑과 개방의 역동성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불가해(不可解)한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生)은 무의미하다". 이는 또한 교황의 사도적 권고인 [가정 공동체]가 가정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가정 공동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에 의해 세워지고 생명을 받는 가정은 인간들의 -즉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친척들의- 공동체이다. 가정의 첫째 임무는 진정한 인간 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계속적 노력을 쏟으면서 일치의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 임무의 내적 원리, 영원한 원동력, 최종적 목표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이, 가정은 인간들의 공동체일 수 없고, 또한 사랑 없이는 가정이 살아남고 성장하여 인간 공동체로서 완성될 수 없다".

 

따라서 사랑은 부부의 혼인 계약에서부터 시작되는 가정의 일치와 친교를 가능하게하는 역동적 움직임이다. '친교', '계약'의 개념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복구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혼인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교회법에서도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사랑은 부부및 가정의 친교와 계약을 기초하는 것 외에도 그것들을 보존하고 성숙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혼인의 특성에 있어서의 '불가해소성'과 '단일성'의 개념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데, 그 도움이란 어떤 제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서로에 대한 신뢰와 견고한 책임감, 그리고 서로에게 대해 진실됨과 충실함을 보여줄 수 있는 도움이다. 고유한 선택으로써 서로 동질의 삶을 계속하는 가정의 본질적인 삶과 하느님께 신뢰하고 늘 창조에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정 안에서 보여지는 사랑의 본질적인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충실함이라는 사랑의 행위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측면으로 이해되며, 나아가 사랑을 더욱 성숙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는 매일 매일의 삶 안에서 부부 서로를 동질화 시켜주는 참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매일 매일의 삶이란 아주 자그마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자그만한 부분이 항상 새로움과 일치를 가져다주는 가장 커다란 부분일런지도 모른다.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자그마한 부분이다. 이렇듯이 충실함이란 참된 가치의 성숙을 위해 가장 필요한 한 조건이 된다. 따라서 충실함이란 어떤 특별한 것이나 욕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또한 항상 무엇인가를 성급하게 처리하려는 욕망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2)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와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에 의하면 가정의 최종적인 원형(原形)은 우리에게 부부 관계에 있어서의 참된 개방성에 대해 결정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창세기가 말하고 있듯이(창세 2,18-24 참조) 둘이 한 몸을 이루는(창세 2,24; 에페 5,31) 사랑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외로움을 이겨나간다. 이렇듯이 전적인 개방성이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적인 완전한 실현을 향해 열려 있다는 의미이다.

 

- 사랑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창조의 주역이 된다. 창조의 측면에서 그들은 하느님과 닮게 된다는 것이다 (창세 1,24-28 참조).

 

- 사랑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만남을 갖게 되고(인격적 및 육체적 만남) 서로를 보충해 주는 존재가 된다. 

 

- 따라서 사랑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부부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고, 이 부부 관계는 다른 모든 인간 관계의 모범이 되며, 동시에 다른 사물들과의 조화를 이루는 에너지가 된다.

 

- 사랑의 신비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능력, 곧 살아 계신 생명의 수여자로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고유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부성애와 모성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사랑은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본연의 모습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일치의 창조적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부부 일치를 위한 활력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일치시키는(에페 5,22-33 참조)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인간에게 선사된 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3. 사랑을 통해 드러나는 생명

 

생명의 개념은 지금까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동시에 생명은 사랑의 원천이며, 사랑의 충만된 표현이며, 또한 하나의 결과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사랑을 통해서 생명이 출현한다. 생명이란 곧 부부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사랑의 표현이며, 모든 혼인에서 생겨나는 참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부의 상호 표현은 전체 부부 생활을 통해 계속된다. 

 

2) 사랑을 통해서 "인간 생명의 은혜를 위한 자유롭고 책임있는 협력"이 나타나게 되며, "출산력은 부부애의 결실이고 징표이며, 아울러 부부 상호간의 완전한 자기 봉헌의 산 증거이다".

 

3) 사랑을 통해서 생명은 점점 더 확장되고 심화된다. 곧 "부부애의 결실은, 특별히 인간적 차원에서 이해된다 할지라도, 단지 자녀의 출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자녀들을 통해서 교회와 세계에 건네주는 도덕적, 영신적, 초자연적 생활의 결실로써 확장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4) 사랑 안에서는 삶의 어떠한 역경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생명 그 자체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삶의 방법, 나아가서 베푸는 사람은 자기 선심을 받는 사람에게서 혜택을 입고 있음을 느끼는 '가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개방적 가정'의 그리스도적 개념과 함께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개방성의 기준은 아주 다양한 범위, 즉 가정의 각 구성원, 부부, 나아가 가정 공동체의 범위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생명의 심오한 체험에까지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가정의 그리스도적 개념을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고유한 범위이며, 여기에서 보다 유일하고도 신비로운 개방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개방성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인 '가정 공동체'에서 '가정 교회로서의 가정'이라는 개념으로 씌여지고 있다.

 

 

III. '가정 교회'로서의 가정

 

그리스도인 가정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각 구성원들간의 상호 임무와 그 절대적 독창성은 교회의 산 모상이요 역사적 표현으로 심화되어 드러나야하며, 이런 의미에서 가정은 '소규모의 교회(가정 교회)'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가정의 교회론적 구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가정 문제에 관한 주교 시노드의 개막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을 생활하고 완수하는 곳이 곧 가정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시노드의 주요 테마입니다. 복음화에 관한 1974년도의 시노드나 교리 교육에 관한 1977년의 시노드가 모두 가정과 관련되는 주제를 다루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가정에서부터 그 모든 것의 참된 활력이 솟아난다는 점을 강조 하였었습니다. 가정은 복음화의 가장 기본적인 대상이며, 또한 교회의 교리 교육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곳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가정은 가장 필수적이고도 다른 것으로 대체 불가능한 주체, 곧 창조적 주체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가정이 주체가 되고, 교회 안에서 항구하고 영성적인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 또한 가장 기초적인 범위 안에서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서(ecclesia domestica), 가정은 반드시 특수한 양상으로 교회의 사명에 대해 늘 깨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사명을 위한 고유한 몫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황의 이러한 연설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본질적인 범위나 내면적인 역동성은 곧 그리스도적 가정의 고유한 특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적 가정의 교회론적 구조의 이러한 고유성이 교회 자체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2. 교회론적 구조의 구성요소

 

그리스도적 가정의 교회론적 구조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하고 또한 구성요소들을 제시하기 위하여는 다음의 몇 가지를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그리스도교의 구세사적 경륜 안에서 가정은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참여의 기초, 내용, 특성을 좀 더 잘 인식하자면, 교회와 그리스도인 가정을 연결하고, 가정을 '소규모의 교회: 가정교회'로 설정하는 여러가지 깊은 유대를 고찰해야 한다. 이 유대로 인해서 가정은 독특한 방법으로 교회의 신비의 산 모상이요 역사적 표현이 된다".

 

2) 깊은 유대란 무엇인가? 가정이 비록 교회 안에서 사회학적으로 상관 관계가 있는 어떤 실제와 관련된다 하더라도, 또한 가정이 교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하더라도 이는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윤리 유형과는 거리가 멀다.

 

이 유대란 혼인성사에서부터 솟아나는 어떤 관계이며, 이 관계에서부터 가정은 성숙되어진다 (이는 단순히 의지적 행위로부터만 성숙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유대는 본질적이고도 초자연적인 어떤 끈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유대란 가정을 그리스도 신비체의 생동력있는 하나의 세포로서의 그리스도적 가정을 형성시키는 교회인 것이다.

 

이미 로스미니(A.Rosmini)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그리스도적 가정은 동일한 반석 위에 세워진 세계 교회의 축소판이며 상징으로서 집의 벽으로 둘러 쌓인 작은 교회이다. 그리고 이 가정은 커다란 교회와 함께 영원하며, 교회와 함께 발전하고, 또 번영한다".

 

3)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살펴보자면, 그리스도교 혼인의 신비는 성서 안에서 정확한 윤곽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말해 주고 있는, 혼인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일치의 표지로서 이해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혼인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혼인 계약의 계시, 표지, 상징으로서 이해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육화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사이에 맺어진 유대로서도 언급되고 있다. 사실상 복음사가와 사도들이 전혀 특수한 구분을 하지 않으면서 신랑과 신부에 대해서 언급할 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혼인과 관련되는 주제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러한 성서적 가르침은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22-23에서 보다 정확하게 드러난다. 이 텍스트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 더 이상 혼인의 모델이 될 수 없으며, 보다 정확한 의미로는, 친밀하고도 총체적인 관계로서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그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 부부는 전적인 자기 증여와 부드러움,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온전한 관심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실상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비와 관계 안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열정이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인은 하나의 거대한 신비이며, 곧 믿는 사람들에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감추어진 하나의 비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적 혼인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신비에의 참여이며 표지가 되며 이런 의미에서 결국 혼인의 특성으로서의 '불가해소성'과 '단일성'은 더욱 견고해진다.

 

4)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비로운 결합은 따라서 부부와 그리스도인 가정이라는 실재를 성스러운 끈을 통해 교회의 친밀한 생명에로 연결하는 '깊은 유대'가 되며, 더 나아가서는 부부의 삶, 곧 가정 전체를 '성체성사적 삶'과 연결시켜 준다. 왜냐하면 혼인 안에서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거룩하게 되기 때문이다. 곧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인간적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실현 -인간적이고도 종말론적이며, 동시에 총체적인 구원- 을 위한 신적 에너지를 통해서거룩하게 변화되기 때문이다. 부부애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 모든 역동성 때문에 남편은 아내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이며, 그 반대로 아내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가정 곳곳에 퍼져 나가는 신비로운 힘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질적인 변화라고 말할 수 있고, 성체성사적 변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가정 교회의 사명

 

위에서 살펴본대로 존재론적인 구조의 사고에서부터 즉시 다음과 같은 가정의 역동적인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1) 가정은 그 자체의 성장을 통해서 교회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가정은 교회로부터 영양을 받아 자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느님의 말씀, 성사, 애덕의 실천 등등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다.

 

2) 교회 역시 가정을 필요로 한다. 부부와 부모에게 주어진 선물은 동시에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그들의 신분과 역할에 고유한 은혜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구원받는 공동체가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며 구원하는 공동체가 될 소명도 갖는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인 부부와 부모들은 "지칠줄 모르고 너그러운 사랑의 모범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사랑의 형제적 유대를 맺어 주고, 결실 풍부한 어머니인 교회의 증인이 되고 협력자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당신 신부를 사랑하시고 그들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 사랑의 표지가 되며, 그 사랑에 참여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3) 가정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가정은 독창적이고 특수한 양식으로 교회의 사명에 적극적이며 책임있게 참여할 소명과 아울러, '생명과 사랑의 친밀한 공동체'로서의 됨됨이와 기능을 활용하여 교회와 사회에 봉사할 소명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가정의 이러한 특수성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협동과 증거로써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부로서의 배우자 상호간에, 그리고 가족으로서의 부모와 자녀들 간의 협동과 증거생활을 의미하며,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적 친교의 선물은 공동체적 봉사로 드러나게 된다. '가정 공동체'는 이렇게 언급한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 내부의 관계를 그리스도가 신앙과 성사를 통해서 활성화시키는 공동체인 까닭에, 가정이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는 양식은 공동체의 유형을 따를 필요가 있다 부부인 배우자들과 가정을 이루는 부모와 자녀는 함께 교회에 세계에 봉사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활력을 주는 사도적 열성을 나눔으로써, 또한 교회와 시민 공동체에 대한 봉사에 공동으로 투신함으로써 신앙 안에 '한 마음과 함 뜻'(사도 4,32)이 되어야 한다".

 

4) 그러면 어떤 것이 공동체적 활동과 증거의 내용이 되는가? 그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부부애와 그 견고함, 일치, 그리고 신의와 출산력까지도 포함하는 가정의 가치와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사랑을 늘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배우자 및 가족들간의 삶의 모습이며, 그 모습은 곧 가정의 일상에서 생겨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인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예언직, 사제직 및 왕직이라는 소명에로 참여하게 되며, 그외에도 가정의 존재론적 본성과 오늘날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사회에서의 여러가지 요구 사이에서 결코 혼란을 겪지 않으면서 적절한 해답을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봉사의 내용과 범위

 

그리스도인 가정에게 요구되는 봉사의 고유한 내용과 범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를 좀 더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내용: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는 배우자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으로서의 소명의 실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희망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할 준비를 갖추어야"(3,15)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곧 사랑이 보여주는 확실한 '새로움'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 무엇보다도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친교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곧 오늘날의 사회 전체가 놀랄 정도로 세분화되어가는 특징을 띠어가고 있기 때문에 친교의 참된 모습은 교회 안팎에서 절대적으로 요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친교에 대한 증거는 다음의 행동을 요구한다.

 

- 그것은 곧 가정이라는 선물의 고유한 현실에 대한 신앙과 그 수용이다. 가정 생활의 시작의 모습을 가정의 삶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유지시키고 활성화시켜 나간다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특별히 불가해소성과 단일성의 기원으로서의 하느님을 믿는 신앙이 관건이며, 하느님을 부부 사랑의 원천으로서, 새로운 에너지의 샘으로서 믿고 신뢰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혼인 예식이 부여해 주는 참된 의미와 윤리성에 늘 깨어있는 것이 요구된다.

 

- 가정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전례적 체험은 또한 매우 중요하다. 성체성사는 사실상 가정의 식탁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도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다. 성체성사 뿐만 아니라 고해성사나 그밖의 다른 성사들도 배우자와 가족 구성원들을 성숙시키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노인과 젊은이들 상호간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경청하는 자세를 통해서 가정이 계속해서 성숙할 수 있는 친교의 체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대화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더 요구한다. 가정에서는 더 나아가서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원의를 미리 잘 알아차릴 수 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또한 함께 계획하여 실행하고, 구성원 각자의 역할과 책임감을 수용하고, 미래에 주어질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함께 기다릴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하다.

 

- 친교의 체험은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영적인 희생"(1베드 2,5)에서 따르는 체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배우자 혹은 가정의 삶은 가정 안에서의 매일 매일의 크고 작은 부분에서 항상 사랑을 지향하는 삶이어야만 한다.

 

- 이런 의미에서 특별히 가정은 공동체의 모습을 지향해야만 하며 이러한 모습은 공동체적인 세상의 모습을 지향한다. 이러한 공동체 건설을 위해 가정 안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의 법'에 대한 긴장 형태로서의 '정결', 친밀감의 달콤함으로서 뿐만 아니라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 자신을 깨고 드러내는 계속되는 새로움으로서 이해되는 '부드러움', 그리고 가장 먼저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선물로서의 '거저 줌' (Free Giving)'이다.

 

2) 범위: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비인 혼인에 기초하고 있는 공동체적 실재로서의 가정의 교회론적 임무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선포하는데서(1베드 2,9) 표현되어야 하며, 또한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이들의 총체적인 친교로 이해되고, 또한 모든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봉사와 그리스도의 몸과의 일치를 건설적으로 지향하는 교회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부부, 그리고 그리스도인 가정이라는 현실은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시민 사회의 내적인 면과의 친교를 증진시켜야만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 가정 공동체 안에서 이루는 교회 공동체와의 내적 친교: 먼저 본당은 "가정들의 가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일들을 연결시키는 활동이 필요하며, 여기서 본당 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각 가정들이 연결된 단체라든가 각 가정이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모임들을 개발,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본당의 활동 계획 안에 가정을 참여시키는 방법이다. 전례와 교리교육, 그리고 애덕의 실천 등에 가정이 참여함으로써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가정 공동체' 51항에서 언급되고 있는 가정 공동체의 교회론적인 모습이 발견된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을 존경스럽게 듣고 자신있게 선포하는 교회의 삶과 사명에의 참여자이다".

 

- 하느님 말씀의 경청: 복음이나 전례에서의 말씀 외에도 '시대의 징표' 역시 경청의 임무에 속하는 본질적인 내용이며, '문화적 배경'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현실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구체화시켜 적용시키도록 도와주는 경청의 내용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하느님 말씀의 선포: 그리스도인 가정 공동체는 다른 가정들에 대해 복음화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자녀들의 가정 교육에서부터 교리 교육에 이르기까지 가정 안에서 보여지는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는 것도 선포의 한 기능이다.

 

- 가정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를 통한 사회적 선도: 먼저 출산의 기능을 들 수 있겠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여러 차례 부부가 가지고 있는 출산의 역할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범위와 아내가 가정에 남아 있어야 할 정당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생명력있는 세포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일치와 나눔의 체험으로서의 교육적 기능을 들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에 대한 증거로서의 사회-정치적인 기능을 들 수 있다. 정치적인 중재는 가정의 보호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 기능은 가정을 위한 정치에 있어서 주역이 된다는 의식을 자라나게 한다.

 

결론적으로, "소규모의 교회로서의 그리스도인 가정은 '대규모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세계적 일치의 징표가 되고, 전세계가 목표로 삼고 전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평화를 증거함으로써 예언적 역할을 수행할 소명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는 글

 

지금까지 우리는 새로운 모습의 가정, 다시 말해서 개방적 가정, 참된 의미에서의 개방적 가정의 생동하는 모습에 대해 몇 가지를 제시하여 보았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활력에 넘치는 친교를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생명 안에서 그들의 고유한 선택과 가정에서의 체험을 쌓아나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으로서, 그리스도인 가정이 지향하고 있는 사랑과 활력에 넘치는 친교의 공동체, 참으로 개방된 공동체로서의 가정을 위해 요구되는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1) 부드러움. 이는 '서로를 잘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영신적이고도 육체적인 봉헌, 신의, 협력, 상호 신뢰이며,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희생과 기도를 가능하게하는 유대이다.

 

2) 정결. 이는 성(性)을 이기적으로서가 아니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서 가능하며, 또한 '거저 줌'의 논리에서 이해되는 일치를 살아갈 때 가능하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부부 사이, 그리고 가족 상호간의 깊은 이해와 주의가 요구된다. 이기주의적인 모습이 아니고 상호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며, 소유가 아니고 친밀함과 생명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가능하다.

 

3) 종교심. 이는 무엇보다도 신비의 회복이며, 또한 각자의 가정 안에서 교회의 모습을 이루는 성사적이고 초자연적인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즉 그리스도인 가정이 지니는 교회론적 특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살아 있는 세포가 된다.

 

4) 봉사. 이는 광범위한 인간 공동체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분해서 언급하자면, 가정 안에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 자녀들을 교육하는 임무, 노인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주는 모습 등의 결코 불가능하지 않은 행위에 늘 열려 있는 삶의 모습이 곧 가정에서의 봉사의 삶일 것이다.

 

[사목, 1994년 2월(181호),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62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