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9일 (수)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강론자료

연중 06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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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2-12 ㅣ No.187

연중 제 6 주일 (나해)

            레위기 13,1-2.44-46       1고린 10,31-11,1     마르코 1,40-46

     2000. 2. 13.

주제 : 삶에서 깨끗하게 사는 일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자로 살기를 원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에서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정말 그에 합당한 자세로 살고 있는지 자신이 처한 현실의 모습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르신들이 사용하시는 말씀 가운데,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읍니다. 이 말씀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해석한다면, 커다랗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물론 ’좋고 나쁨’의 판단을 적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고양동 교우 여러분,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연중 6 주일,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첫 날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특별히 변한 세상은 아닌데, 우리는 처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씁니다. 물론 시작을 잘했다고 해서 반을 성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시작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의 새로운 시작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맞으셨습니까?

 

정치가들은 종교에 대해서 무척이나 비판적입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통치자들에 대한 복종의 당위성(13,1-7)’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해석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 이외에 어느 한쪽의 이익을 강변(强辯)하지 않읍니다. 그들은  ’신문의 행간(行間)’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권리는 누리고 책임은 피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자주 말해지고, 뉴스에서는 한결같이 정치 혐오증을 사건들을 볼 때 더욱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바뀌는 데는 사람들이 갖는 욕심이 한 몫을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그 복음이 삶을 바꿔 놓을 수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의 의도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었읍니다. 그런데,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달리 행동합니다. 기적의 체험이란 자신에게 엄청난 큰 것이지만, 눈앞에 일어난 작은 것을 크게 생각하다보면, 참으로 크게 여겨야 할 것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풀어주신 치유 기적의 의도는 레위기에 나오는 선언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병자가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었는데도, 너무 놀라운 체험을 앞세운 나머지 하느님께 드려야 할 감사의 마음자세, 공동체와 함께 사는 일에 대한 보고를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켜 ’망각의 동물’이라고는 합니다만, 이것만은 참으로 곤란한 망각인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물고기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적당한 먹이를 구하며 살고 싶다면, 너무 깨끗한 곳은 피해야 합니다.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적당한 부정과 부패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한가지만을 생각하고 그 속뜻, 신문의 행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 뜻을 실현하던 사제들은 단순히 잘못된 일에 대한 심판관으로 그의 역할을 다했던 것은 아니었읍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거나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에서 스스로 멀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알아듣는다면, 사람들 사이의 융화를 이루는 것이 사제의 삶이고, 그 역할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이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갖는 임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사제직과 왕직과 예언직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장소, 내가 고개를 돌리고 싶은 장소에서 처음의 생각대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곳도 함께 살아가는 삶의 장소로 바꾸는 것이 신앙인의 역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움직임이 과연 하느님께 얼마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침착하게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가 하는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돼야 한다고 바울로 사도는 부탁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전혀 움직이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행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서양의 어느 철학자는 말했읍니다. 우리가 그 말을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지 사람은 행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고 싶은 그만큼 다른 사람의 행복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신앙인이 나가야 할 올바른 길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나 혼자만 행복하다면, 잠시 기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기쁨이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연중 6주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읍니다.  한 주간의 첫날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미사에 오신 여러분들은 행복에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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