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24 주일-가해-1999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9-10 ㅣ No.149

연 중  제  24  주 일 ( 가 해 )

        집회서 27,30-28,7 로마 14,7-9 마태 18,21-35

     1999. 9. 12.

 

주제 : 우리는 얼마나 용서하고 살수 있는가?

 

불가에서 특별한 깨우침을 얻기 위하여 골똘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가리켜 ’화두(話頭?)’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화두는 명상이나 깨우침을 얻기 위하여 고행을 시작하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화두는 스승이 제자에게 정해주는 것이고, 그 의향을 올바로 깨달은 사람은 깨우침의 길에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두 번째 주일, 전례력으로 가해 연중 24 주일입니다.  제가 첫머리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불가의 화두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같은 입장에서 우리가 한 주간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하는지 끊임없이 우리 안에 울려 나오게 하는 말씀도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서 계속 반복하여 나오는 화두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오늘 연중 24 주일의 화두는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화두로 남아있다면, 우리 삶은 보다 나은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일 성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들은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잘못한 이웃이 있을 때, 내게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짊어져야 할 나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응답이 간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 둘이 만나서 먼저 타일러보고, 증인을 대동해서 충고해보고, 교회의 이름으로 선처하고  그 다음에 안되면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이런 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내가 감내해야 할 부담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담을 쌓고 내가 보지 말아야 할 사람을 정해놓고 살며 가끔씩은 이렇게 저렇게 듣고 본 소견으로 한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분명 이러한 자세는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9월에 우리가 가져서는 안될 나쁜 일입니다.

 

그러면, 그 잘못에서 우리가 어떻게 탈출해야 하는가?  그 내용이 오늘 성서의 말씀입니다.  주어지는 질문이 쉽지 않았던 것처럼, 그 응답으로 제시되는 것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죠" 이렇게 물은 베드로 사도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쫓아다닌 것이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멍청한 질문을 해서 우리를 왜 부담스럽게 한담!’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대부분이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느낌일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경직돼있는 것이고, 용서한다는 일이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진리이든지 진리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가끔씩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신 있게 내가 그 질문을 꺼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흔히 갖지 않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서를 통해서 듣는 말씀은 ’용서하라’는 것이지 다른 이의 잘못을 들춰내서 그 사람을 나의 기억에서 또는 내가 사는 공동체에서 사장(死藏)시키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회서의 말씀을 듣다보면, 세상에 발을 뻗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몇 명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원망과 분노, 미움은 반드시 버려야 할 나쁜 일’이라고 누구나 알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어려운 인생살이와 그것을 버리지 못했을 때 위협으로 다가오는 내용이 너무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보이셨던 삶의 모범, ’순수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타인을 위해서 죽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은 순교자 성월 두 번째 주일입니다.

순교란 힘드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확신이 없는데도 막연해 보이는 하느님의 것에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 바로 순교입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바뀐 오늘날, 우리가 들은 성서의 말씀을 실천하면 살기로 다짐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이 시대의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렵기는 하지만, 이 시대의 참된 순교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55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