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연중 21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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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8-15 ㅣ No.144

연 중  제  21  주 일 ( 가 해 )

          이사야 22,19-23  로마 11,33-36  마태 16,13-20

       1999. 8. 22.

 

주제 :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람만큼 자유로운 대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유를 누리거나 기억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게 해도 그것이 구속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무관심하다고 말하는 것이 사람이 갖는 특징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특징을 갖는 것이고, 사람이 왜 이런 특징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일까요? 연중 21주일인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오늘은 연중 21주일입니다. 이제 낮에는 무덥고 밤에도 무덥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숨을 쉴 수 있는 좋은 시기에 들어섰습니다.  세상 어떤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없겠습니까마는 특히 얼마 전에 갑작스런 천재지변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할 일은 없겠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있었던 현실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세상 창조 이야기에서도 흙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단점을 뺀다면 인간에게 제한된 여타의 일들은 순전히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을법한 제약이란 흙에서 출발했으니 흙이라는 물질이 갖는 한계만이 늘 사람들 곁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욕심을 갖게 되었고 이 욕심은 사람의 자유를 진짜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제한하는 모습은 ’죄의 형태’를 띠고 사람들 곁을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죄가 처음부터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오늘 연중 21주일 복음의 말씀에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다가설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다시금 자유롭게 설 수 있는 권한을 주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주변의 사람들보기에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면, 우리는 같은 사람들앞에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걷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연함도 죄가 내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이 죄를 떨쳐버릴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죄를 떨쳐버릴 수 있는 삶의 시작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는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만 참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에게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받은 것은 그가 고백한 믿음과 믿음에 걸맞는 삶의 자세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보이지 않게 형태를 갖추지 않고도 드러나는 믿음은 그렇게 커다란 결실을 맺습니다.  현실 생활에서, 이 무더운 계절을 지내며 우리가 갖는 믿음의 자세도 지금은 우리가 모르지만 언젠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의 자세를 갖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본보기는 첫째 독서에 나오는 셉나<히즈키야 임금시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쳐들어왔을 때, 유다의 시종무관을 맡고 있었던 사람. 그가 행한 기록은 성서에 따로 나오지 않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권력지향형의 인물이었던가 봅니다.  그랬던 그에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의 선언이 내려집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을 통해서 어떤 삶의 정신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려고 합니다.  내가 행복하게 살려면 지금 현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움직여야 합니다.  더위 때문에 찡그려지기 쉬운 우리의 얼굴을 펴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에 대한 탓을 남에게 돌리지 말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나의 삶을, 내가 나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우리를 귀중한 사람으로 봐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중요한 정신을 갖추지 못한다면, 셉나에게 내려지는 심판 외에 다른 좋은 소리는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갖출 수 있는 자세는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베드로처럼 축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의 자세를 갖추는가, 아니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는 셉나의 자세를 갖고 사는가에 따라 우리 삶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을 졸라서 받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일 뿐입니다.

 

더운 여름, 탈없이 잘 지내시고 하느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시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달라지고,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이 허락하신 삶의 활력소를 이웃에게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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