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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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45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1782-1839, 부인, 기해박해 때 참수)

 

 

조증이(趙曾伊)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남이관(세바스티아노)과 결혼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게 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후 30세 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워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리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고,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 성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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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세바스티아노의 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지요. 그 때 나는 그의 아내 바르바라가 어떻게 이웃을 권면하고, 수많은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면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지요. 모든 교우들이 바르바라를 성녀라고 불렀어요." 교우들로부터 '살아 있는 성녀'라고 칭송을 받고 있던 조증이는 남편과 남이관과 함께 시해박해 때 순교했다.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열여섯 되던 해에 남이관과 결혼했다. 4년 뒤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했고, 남편은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다. 바르바라는 의지할 데가 없어 이천 친정으로 돌아와 생활하기에 급급해 자연히 냉담하게 되었다.

 

1811년 서울로 올라온 조증이는 열심한 신자 친척집에 머물면서 신앙을 되찾아 지난날을 보속이라도 하듯 기도와 통화로 신심생활에 전념하며 지냈다. 또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이 북경으로 성직자를 모시러 가는 계획을 세우자 그를 도우며 여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지에서 돌아오자 그와 함께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이들은 "앞으로 우리 나라에 또다시 큰 박해가 일어날 것이오. 우리는 지금부터 치명할 것을 잘 준비하여 그때에 순교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의 영혼을 구합시다"고 하며 같이 순교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바르바라는 남편을 피신시킨 뒤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형리들은 남편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그녀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그러나 그녀는 형리들에게 "만번을 죽어도 내 천주를 배반할 수 없고 또 내 남편이 어디 숨어있는지 알지를 못합니다"고 말했다.

 

어느 교우의 배신으로 붙잡힌 남이관은 형장으로 가면서 부인에게 "동일(同日) 동지(同地) 동사(同死)하려고 했으나 이는 못할 것 같으니 동지 동사나 할 수 있도록 내 뒤를 따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남편의 소식을 들은 바르바라는 순교할 결심을 더욱 굳혔다. 마침내 조증이는 남편이 순교한 지 3개월 뒤인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녀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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