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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대한민국 승인과 가톨릭교회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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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4-19 ㅣ No.126

[주교회의 세미나]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과 가톨릭교회의 역할 (1)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12일 유엔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6·25 전쟁 발발 직후 신속한 유엔군 파병으로 무력공산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오늘날에는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할 만큼 국제사회에서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기에 이르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게 했던 장면 박사의 업적과 공헌을 재조명하고, 그 위업에 가톨릭교회가 크게 기여한 바를 밝히는 자리가 잇따라 마련되었다. 주교회의는 2월 4일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과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주최했다. “경향잡지” 주관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열린 이 세미나에서 허동현 교수는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수석대표 장면의 활동’을, 여진천 신부는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인식과 기여’를, 장면 박사의 아들인 장익 주교는 ‘가족의 기억’을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이에 앞서, 서강대학교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 60주년 기념일을 맞아 국제 학술회의를 열었다.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 · 한승수 국무총리의 축사, 유엔 아시아 태평양경제사회 이사회 사무총장 헤이저 여사의 기조연설에 이어, 교황청 국무부 엔더 대주교, 박흥순 교수, 덴마크의 칼 섹서 교수, 허동현 교수가 발제자로 나섰다. 주한 교황대사 파딜랴 대주교도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특히 당시 교황 비오 12세를 정점으로 훗날 교황 바오로 6세가 된 국무장관 대리 몬티니 대주교, 훗날 교황 요한 23세가 된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 롱깔리 대주교로 이어지는 바티칸 외교 라인과 교회인사들이 유엔의 승인을 적극 지원한 사실을 밝혔다. 손병두 총장은 개회사에서 “장 박사가 유엔의 승인을 받은 후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가톨릭계 대학의 설립을 청원한 결과 예수회가 서강대를 설립하게 됐다.”며 서강대의 학술회의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는 학술회의가 유엔의 승인을 역사적 측면에서 재조명했다면 세미나는 교회사와 신앙적 측면에서 재조명한다고 말하고, 이 세미나를 통해 은혜로운 사건들을 기억하여 전승해 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했다.

 

이 글은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을 종합 요약하고, 아울러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심어놓은 장면 박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 대해 나눈 얘기들도 덧붙였다.

 

 

해방정국과 교회의 참여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가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38도선 이북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 일본군의 항복은 미군이 접수한다.”고 선언함으로써 38선이 공식적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11일 함북 웅기 상륙작전을 벌인 후 8월 말 북한 전역에 진주했다.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스탈린의 비밀지령에 따라 10월에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이북 5도 행정위원회를 설립했다. 10월 14일에는 소련이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한 김일성이 평양에서 군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947년 2월에는 사실상 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켜 1948년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4월 29일에 헌법을 채택,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해방 후 북한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 해방 직후부터 연길교구를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신앙생활을 제한 · 탄압 · 말살하는 정책을 썼다. 헌법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문규정을 두고도, 1949년 봄부터 북한에서 가장 큰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과 평양교구를 탄압하여 교구장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을 납치 또는 살해하고 교회재산을 몰수했다. 교황사절 방(Byrne, 方溢恩) 주교는 1949년 5월 14일 홍 주교가 행방불명되자 첫 공식 성명을 통해 성직자 체포와 투옥을 비난하고, 김일성에게도 항의서한을 보냈다.

 

한국 교회가 공산주의로부터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은 박해받는 연길교구와 북한 교회의 참상을 보면서부터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반그리스도교로, 공산주의자들을 교회와 인류의 공적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었고, 당시의 국민감정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교황 비오 9세, 레오 13세, 비오 11세, 비오 12세는 철저한 반사회주의 · 반공산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 교황문헌 “새로운 사태”, “사십 주년”, “하느님이신 구세주” 등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유물론 · 무신론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비판하고 거부했다. 이러한 인식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잔혹한 박해로 인해 더욱 견고해지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한 후 미군이 진주해 올 때까지 서울은 문자 그대로 혼돈상태였다. 서울교구 노기남 주교는 1945년 8월 17일 신자들에게 자중할 것을 당부하면서 “새로운 정부가 자리를 잡고 모든 정무를 완전 인수할 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기도하라.”는 고유문(告諭文)을 발표했다. 이 고유문을 각 본당 주일미사 중에 발표하도록 하고, 각 지방 교구장에게도 발송했다. 1945년 9월 8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군정이 시작되면서, 교회는 1930년대부터 도입된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에 더 큰 비중을 두어, 교회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인들과 교류·연대하고 정당 활동과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다. 9월 9일에는 뉴욕 대교구장이자 미 군종사령관 스펠만 대주교가 여러 미군 장성들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승전과 해방의 미사’를 봉헌했다. 이를 계기로 교회와 미군정 당국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노 주교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인 나이스터 준장의 부탁으로, 장면(요한)과 장시간 상의한 후, 한국인 지도자 60명(이승만 · 임정요인 · 송진우 · 김성수 · 김병로 · 장덕수 등)을 추천하면서, 혼란한 시국을 속히 진정시키고 좌익 계열의 민심선동과 모략선전에 특별 조처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천주교 신자인 초대 미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주일미사 후 노 주교를 비공식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교회와 미군정이 가까워졌고, 긴밀한 협조를 이어나갔다.

 

해방 이후 독립 운동가들이 입국하자, 교회는 건전한 민주국가를 건설해 줄 것을 바라면서 이들을 환영했다. 노 주교는 여운형이 8월 16일에 좌우연합세력으로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방문하여 격려했고,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귀국하자 그를 주교관에 초대하여 환영 만찬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는 몇몇 신부들과 장면 · 장발 형제, 교회 유지 몇 사람도 참석했다. 이에 이승만은 수차례 노 주교와 원(Larribeau, 元亨根) 주교 등을 만찬에 초대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11월 23일과 12월 2일에 귀국했다. 노 주교는 이들의 귀국환영 미사를 봉헌하고 환영식과 오찬회를 마련했다. 이처럼 교회는 미군정뿐만 아니라 우익세력과도 협조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당시 교회가 지지한 정당은 미군정 시절 사실상 여당이자 보수 세력을 대표하던 한국민주당이었다. 1945년 9월에 개최된 한민당 발기인 대회에는 서울교구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 조종국과 박병래, 장발 등이 참여했고, 노 주교의 권유로 16일의 창당대회 때까지 40여 명이 입당했다.

 

가톨릭교회의 언론 분야도 현저히 발전했다. 서울교구는 종합 월간지인 “경향잡지”를 1946년 8월에 복간했고, 일간 신문인 “경향신문”을 1946년 10월에 창간했다. 이 신문은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급격히 키워준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1947년 4월에는 종교 · 교양 월간지 “가톨릭 청년”이, 1949년 4월에는 대구교구의 주간신문 “천주교회보”가 복간됐다. 한편 윤을수 신부는 1949년 11월 28일 런던에서 열린 ‘국제 자유노동조합 연맹’(ICFTU) 결성식에 ‘대한독립촉성 노동총연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함으로써 노동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드러냈다.

 

 

정부수립

 

미국 · 영국 · 소련 3개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외상회의를 소집했다. 이 3상회의에서, 일본 통치의 잔해를 청산하여 독립국가 조선을 재건할 임시적인 민주정부 수립을 도울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 · 소 · 영 · 중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내용이 알려지자 충칭(重慶) 임시정부 추대를 주장하던 한국독립당 · 한국민주당 등 우익세력은 신탁통치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신탁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반면에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은 처음에는 반탁 입장을 취하다가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하고 온 직후 1946년 1월 초부터 찬탁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이 문제가 우익과 좌익을 가르는 분계선이 되었다. 이때 천주교는 다른 주요 종교들과 같이 반탁 입장이었다. 임정을 중심으로 한 우파는 1946년 2월 1-2일 반탁 및 자주적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비상국민회의’를 명동성당에서 개최했다. 서울교구 청년회연합회장 장면이 천주교 대표 자격으로 최고 정무위원 2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2월에는 미 군정청의 요청에 따라 정무위원회가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와 김규식)으로 개편되었다.

 

1946년 3월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 1차 회의에서 소련측은 신탁통치 반대 세력을 임시정부 수립문제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고 했다. 결국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인사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면 협의대상이 될 수 있다는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김규식은 지지에 서명했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 중장은 두 사람이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소련이 1946년 2월에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운데서 알 수 있듯이 통일정부를 세울 마음이 없었음을 알지 못했다. 이승만은 미 · 소 공동위원회 해체를 요구하고, 6월 3일에는 “북한지역에 사실상의 정부가 들어선 이상 남한에서도 질서를 유지하고 민생을 챙기기 위해 그와 비슷한 자유정부가 들어서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정읍선언을 했다. 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진영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나섰으며, 장면도 이에 동참했다. 미국은 1946년 6월 김규식과 여운형 같은 중도파를 내세워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소련과의 협조를 모색했다.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이 의장으로 있는 민주의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1946년 11월 정치적 자문기구인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구성했으나, 선거에서 한민당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파세력이 득세하자 좌파성향 인사 45명을 관선의원으로 임명했다. 이 좌우합작운동은 현실정치에서 좌파의 공산당과 우파의 김구 · 이승만 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민주의원이던 장면은 관선이면서도 민선의원들과 함께 하지의 뜻과는 달리 신탁을 반대했다.

 

한편 바티칸은 1947년 8월 12일 교황사절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교황사절 서리(Apostolic Visitor)로 초대 평양 지목구장을 지내고 일본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방 몬시뇰을 임명했다. 교황청의 사절 파견은 국제공법과 외교관례상 한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미국정부는 동유럽과 이란에서 소련의 팽창정책에 기만당했음을 깨닫고 반소 · 반공 노선으로 입장을 바꿔, 대한정책이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마샬 미국무장관은 1947년 9월에 한국 문제를 유엔에 회부했다. 제2차 유엔총회는 11월 14일 만장일치로 한반도에 유엔 감시하 자유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 이 결의로 1948년 1월 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이 입국하였으나, 북한이 자유선거를 거부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서의 선거가 불가능했다. 소련 및 좌파와의 모든 협조 노력이 이단적 · 반가톨릭적 행위로 단죄되는 가운데, 1947년 9월 이후 교회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남한 단정노선을 지지했다. 1948년 2월 19일 열린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전후해 이승만-한민당의 단정 수립 추진세력과 중도파 - 임정세력(한독당)의 통일정부 추진세력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어 갔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추구하던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 말 북한의 김일성과 협상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지만, 북한이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할 의사가 없었기에, 성과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주장한 통일우선주의는 고귀한 소망임에 틀림없었지만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꿈이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하자 서울에서는 환영했으나, 소련군 사령관은 위원단이 북한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해 2월 유엔이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여, 5월 10일 남한에서 사상 초유의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에 교회는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노선을 지지했다. 총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교구는 1948년 1월 11일 각 본당의 유지교우들로 ‘가톨릭 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본당 차원에서도 ‘본당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경향잡지”는 장면을 비롯한 8명의 신자 입후보자들의 사진과 주요 경력, 선거구와 기호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종로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장면은 ‘자기를 내세우는 게 싫어’ 유세를 자제했지만, 입후보자 9명 중 총투표수의 5할 이상을 획득하여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북한이 불참한 5·10 총선거의 효력에 대한 의견 차이로 양분되었던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5월 25일 선거의 공정성과 합법성을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 “5·10 총선거는 한국 인구의 거의 3분지 2이상이 거주하며,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었던 한국 내에서, 선거권자의 자유의사를 유효하게 표현한 선거”라고 선언했다. 제헌국회가 성립된 직후인 1948년 6월 20일 노 주교는 입후보한 신자들 중 유일한 당선자인 장면을 포함한 국회의장 이승만 등 국회의원, 경무부장 조병옥, 과도정부 요인들을 명동성당으로 초청, 독립촉성 기원 대례미사와 환영 다과회를 베풀었다. 7월 12일에는 국회에서 헌법이 채택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선출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전 세계에 공포되었다.

 

* 허종열 이냐시오 - 시인. 번역가. 가톨릭신문 서울분실장과 평화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흑야>, <새벽>, <꾸르실료 운동의 기본정신>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경향잡지, 2009년 3월호, 허종열 이냐시오]

 

 

[주교회의 세미나]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과 가톨릭교회의 역할 (2)

 

 

유엔 총회 수석대표 장면

 

이처럼 현실적으로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국제적 승인 획득 여하가 국가 생존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게다가 1948년 말까지 주한미군이 철군한다는 미국의 공식발표가 있었던 안보위기 상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철군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로서는 결판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신속히 인정받고자 유엔을 통한 국가 승인 외교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11일 장면이 제3차 유엔 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임되어, 대한제국 여권을 참조해 만든 제1호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았다.

 

장면의 이력을 보면, 그는 1899년 8월 28일 지금의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장기빈은 구한말 서울 관립영어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해 탁지부 방판에 임용되었고, 한일합방으로 1911년에 사직하기까지 인천 해관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영어능력을 활용해 1939년까지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타운센드 상사 한국지사에서 무역과 보험관계 업무에 종사했으며, 해방 후에는 군정청 재무부 고문과 부산 세관장을 역임한 바 있다. 장면은 생후 15일 만인 9월 12일 종현본당(명동성당)에서 박(Poisnell 朴道行) 신부 집전으로 세례를 받았다. 부친의 영향으로 그는 영어 학습의 필요성을 당시 거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이던 수원 농림학교 재학시절부터 자각했다. 그는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다가 1917년 농림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칼을 차고 다니던 일제치하 공무원 임용을 피해 YMCA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에 진학했다.

 

1년 전에 그는 부친이 간택한 같은 천주교 집안의 16세 김옥윤과 얼굴도 못 보고 결혼했다.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강사이기도 했던 그는 1919년도 “친필연보”의 3·1운동에 관한 기록에서 “나는 그때 덕수궁 앞에 나가서 만세를 불렀고 했는데, 당시 신학생이던 노기남 대주교는 “그날 몹시 흥분한 그분은 수업을 하지 않고 3·1운동에 관한 얘기만 해주었다.”고 회고했다. 농림학교 재학 때 그는 상급반 개신교 신자가 “천주교는 미신적이고 부패한 사교”라며 매도하고 조소했지만, 성경과 교회사 지식이 없어 항변을 못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외국으로 나가 원문을 읽고 교리와 교회사 공부에 정진하기로 결심했다. 민족의 영혼구제를 위해 천주교 신앙전파에 자신을 바치려 했던 것이다.

 

일제는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한국인이 서구에 유학하여 수준 높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게 일본 이외의 다른 선진국으로 유학하는 것을 억제했다. 특히 장면이 미국 유학을 결행한 1920년은 3·1운동 직후여서 더더욱 어려웠다. 당시 가톨릭 교단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만으로는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계통 개신교가 교세를 떨치고 있던 평안도 지역의 포교가 힘들다고 판단, 이 지역의 선교를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일임하려 했다. 이에 따라 메리놀회 총장 월쉬(Walsh) 신부가 1919년에 한국을 방문하는 등 평안도 지역 포교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 상황이어서, 한국 가톨릭 교단도 이를 지원할 인재 양성이 필요했다.

 

당시 서울교구장 민(Mutel, 閔德孝) 주교는 메리놀회의 선교전략을 지원하고자 자신과 특별한 친분관계를 갖고 있던 장기빈의 자제들을 활용하려 했다. 민 주교의 요청을 받은 월쉬 신부가 가톨릭계 대학 입학을 주선하여 장면은 1920년에, 장발은 1923년에 미국 유학을 할 수 있었다. 정혜 · 정온 두 여동생과 처조카 김교임도 메리놀수녀회 입회 추천을 받아 1922년에 도미했다. 장면은 1921년 1월 4일 메리놀회가 운영하는 소신학교 베나르드 스쿨(Venard School)에 입학하여 훗날 ‘교황사절 방 주교’가 된 교장 번 신부의 지도하에 6개월간 영어를 배웠다. 이후 그는 메리놀회 성직자들의 조언에 따라 1921년 9월 19일 뉴욕 소재 맨해튼 대학에 입학, 1925년 6월 4일 학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평균 성적표를 살펴보면 1학년 때 85점, 2학년 때 83점, 3학년 때 92점, 3년 87점인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그는 종교학(94), 철학(96), 교육학(94) 등 인문학 분야와 계량적 · 분석적 학문인 물리와 실습(93), 화학과 실습(92)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얻었고, 역사(86), 사회학(84), 수사학(80), 영문학(78), 영어(85), 불어(80), 대중연설(86)에서도 비교적 좋은 성적을 올렸다. 또한 그가 언어의 장벽을 호소했던 영어 과목의 성적이 1~2학년 때는 저조했으나 3학년 때에는 95점으로 높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는 당시 조선교구를 주도하던 파리 외방전교회와 한국 진출을 준비하던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의 성직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불어와 영어를 매 학기 수강했다. 특히 그가 맨해튼 대학에서 습득한 영어 · 불어 능력과 수사학 · 대중연설 같은 과목을 통해 얻은 소통 능력은 제3차 유엔 총회 파견 수석대표와 주미대사로 선발되어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과 6 · 25전쟁 시 유엔군 파병 등을 이뤄낸 출중한 업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는 1941년 말까지 민족문제보다 종교의 존립자체에 우선순위를 둔 외국인 선교사들이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교회를 이끌 성직자와 지식인층이 빈약했다. 장면은 1925년 맨해튼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길에 로마에서 거행되는 ‘한국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로 참석할 만큼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귀국 후 메리놀회의 전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해 1931년 4월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길 때까지 6년 4개월 동안 평안도 지역 선교에 기여했다. 당시 평안도 지역에는 베나르드 소신학교 교장이었던 번 신부가 1923년에 입국하여 신의주본당 주임(1926년) ‘방 신부’, 평양지목구장(1927년) ‘방 몬시뇰’로 활약하고 있었다. 동성상업학교 서무주임으로 부임한 장면의 담당과목은 영어였다. 그는 1936년 11월 교장에 취임한 후 1947년 12월 25일 교단을 떠나기까지 17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당시 동성학교 교사는 일본인이 10여 명이고 한국인은 한창우, 류홍렬, 이해남 등 4~5명에 불과했다. 사이고라는 일본인 교무주임은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보낸 사람으로 학교운영을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 장면은 교장이 되자 그를 내쫓아버림으로써 결코 외유내강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때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이 지금 까지도 화제가 되고 있다.

 

5학년 졸업반 수신(修身, 지금의 윤리)과목 시험에 “일본 천황의 칙유(勅諭)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3 · 1운동, 일제 식민통치 만행 등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자주 하던 선생님이 낸 문제가 아니라 총독부가 지시한 문제였겠지만, 민족적 자존심과 젊은 혈기의 반항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 신학생이 답안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교장이 그 학생을 호출하여 “어쩌려고 이런 답안을 쓰냐. 이게 밖에 알려지면 학교는 그날로 문 닫아야 하고, 너는 감옥에 가고, 교회는 또 박해를 받는다는 걸 모르냐?” 하였다. “그럼 그 답안지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하고 말대꾸를 하던 학생은 ‘철썩!’ 따귀를 한 대 얻어맞았다. 약 30년 후 한국의 첫 추기경이 된 그 학생은 장면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에서 “성인(聖人) 추대를 교회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며 장면의 고매한 인품과 깊은 신앙심, 이룬 업적을 칭송했다.

 

일제 식민통치 기간 중 양식 있는 한국인이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민족의 미래에 투자하는 교육운동과 상처 입은 민족의 영혼을 달래주는 종교운동에 투신하는 것이었다. 장면도 이 길을 선택했다. 그가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친일단체에 가톨릭 대표로 명단에 올라있는 점을 지적하지만, 그것은 일제하 국내에서 활동한 모든 민족주의 우파진영 인사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한계였다. ‘천주교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방어하는 역할을 전담’한 천주교단의 대표격이었던 그로서는 교단에 대한 일제의 박해를 초래할 저항적 종교활동을 전개할 수도 없었다.

 

해방 이후 국정을 운영할 정치적 경험을 가진 인재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소수의 인사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에 교회 차원을 넘어 전체 지식인 사회에서 굴지의 인물로 꼽혔던 그의 정계진출은 불가피했다. 해방 후 장면은 노기남 주교의 통역을 담당하여 미군정과 교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장면의 정치적 후원세력인 천주교단의 영향력을 활용하려는 정치적인 복선도 이승만이 장면을 수석대표로 선임한 중요한 이유였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친교가 있던 뉴욕의 스펠만 대주교도 한국에 대한 폭넓은 지원활동을 펼 것으로 믿었다. 또한 세계 각국의 성직자나 외교관 및 정치지도자와 폭넓은 교유관계를 갖고 있고 장면과 사제관계인 초대 주한 교황사절 방 주교도 장면의 대외 교섭력을 확대해 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장면은 하지 중장이 임명한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으로서, 주로 좌익과의 투쟁, 군정당국과의 절충, 미 · 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정책 수립에 주력했다. 그는 미군정청 하지 중장과 민정장관 아놀드 소장과 빈번히 접촉하면서, 한국문제에 대한 우파 민족주의 정치세력과 미군정과의 견해 차이를 좁히는 조정역할을 수행했다. 해방 이후 ‘종교적 반공주의’를 지속 · 강화해 온 천주교단의 대표 장면은 반탁과 단독정부 수립에 이승만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철저한 보수적 반공주의 노선을 걸었다. 장면은 미군정 시절 입법의원의 8개 위원회 중 문교후생위원회 제1분과회(학교 · 종교 · 교화) 소속이었지만, 우수한 영어 구사능력 때문에 외무국방위원회 제1분과회(외무)에도 간여했다.

 

1948년 1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국내에 들어온 뒤에는 장기영 · 이춘호와 함께 입법의원의 외교활동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1947년 8월 입법의원 정무회의가 대일배상액을 조사하려고 만든 ‘대일배상 연구위원회’ 설치에도 간여했다. 제헌국회 의원에 입후보하며 그가 내건 19개 조목의 정견 중에는 “자주정신에 입각한 국제협조로 국토와 국권의 완전 확보”와 “대일 배상 즉시 요구”가 들어있었다. 그는 입법의원에서의 외교적 경험을 살려 제헌국회에서도 ‘외교통’으로 활약했다. 그는 유엔에 국회성립을 통고하는 결의안을 발의해 통과시키는 등 건국외교에 관련되는 입법을 주도했다.

 

 

장면의 외교활동과 교회의 지원

 

유엔 총회 파견 대표단은 수석대표 장면, 차석대표 장기영, 정치고문 조병옥, 법률고문 전규홍, 경제고문 김우평, 고문 정일형, 김활란, 모윤숙, 김준구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1948년 9월 8일 국회는 ‘대한민국 대표 유엔 파견에 대한 찬동지지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고, 장면 일행은 국회본회의에서 출국인사를 했다.

 

교회의 대한민국 승인 지원은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우리 대표단이 임명되기 1년 전, 남북 어디에도 아직 정부조차 없는 한국에 교황사절 서리로 부임한 방 몬시뇰은 입국 즉시 한국을 합법적인 독립국가로 인정한다는 교황청 문서를 발표하여, 한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과정에 큰 힘이 되도록 했다. 1948년 7월 30일에는 천주교 신자인 캐나다 외무장관 생 로랑과 캐나다 주재 교황사절 안토니우티 대주교에게 한국을 지지하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서한을 보낸 것은 캐나다가 유엔 총회에서 한국 정부 승인을 반대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은 물론, 영연방 국가들인 캐나다, 호주, 인도가 아라비아 블록과 더불어 승인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8월 15일 정부수립 식전에서 외교사절 대표 축사를 통해,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 선거를 위임했던 유엔이 한국 정부를 승인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고,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새 정부를 인정하는 개별 국가들이 꾸준히 증가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하여 갈채를 받았다. 그는 5·10 총선거에 북한이 불참했다는 이유로 선거결과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던 일부 유엔 한국 임시위원의 소속 정부에 협조요청 서한을 보내기도 하면서 우리 대표단을 돕도록 요소요소에 부탁을 했다.

 

한편 서울 가톨릭 청년연합회는 1948년 9월 5일 혜화동성당에서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 한국 수석대표 장면 박사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이어 동성학교 강당에서 장행회(壯行會)를 성대히 개최했다. 장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장면의 앞날을 축복하고 송별하는 이 모임에는 노 주교를 비롯하여 서울시내 각 교회 신부와 신도들이 수백 명 참석했다.

 

장면 일행은 9월 9일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다음날 뉴욕에 도착, 거기서 배편으로 파리를 향해 출항한 지 닷새 뒤인 20일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 외무성을 예방했다. 유엔 총회는 샤이요 궁에서 9월 21일부터 12월 12일까지 58개국 대표가 모인 가운데 열렸다. 한국 대표단은 21일 유엔 총회 개회식에 참석했지만, 회원국이 아니어서 일반 방청석에 자리 잡았다. 장면은 유엔 사무국과 절충하여 대표단 일행 전원이 유엔의 각종 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출석할 수 있는 절차를 밟았다.

 

장면 일행은 총회기간 내내 유엔 회원국 대표들을 접촉하여 한국 정부 승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장면은 조선고적 도보(圖報) 16권을 호텔 응접실에 비치해 놓고 유엔 대표와 기자들에게 보여주며, 한국이 신생국이라지만 오랜 전통과 역사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경향잡지, 2009년 4월호, 허종열 이냐시오]

 

 

[주교회의 세미나]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과 가톨릭교회의 역할 (3)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 것이 바티칸의 역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제3차 유엔 총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을 지원하라고 바티칸의 국무장관 대리 몬티니 대주교와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 롱깔리 대주교에게 지시하는 등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바티칸의 지원은 전적으로 장면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롱깔리 대주교는 일부러 연회를 베풀어 장면 일행이 만난 적이 없는 외국대표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파리의 추기경은 막후에서 지원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현지에서 장면 일행의 활동에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장면은 당시 총회 의장인 호주 대표 에바트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0월 3일 소화 데레사 축일 아침, 휴가차 프랑스에 와 있던 혜화동본당 주임 성(Singer, 成載德) 신부와 함께 리지외 성지를 참배하러 가는 기차에서 우연히 호주 시드니 교구의 오브라이언 주교를 만났다. 주교는 호주 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 플린스컷트를 소개해 주었다. 장면은 이들의 도움으로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에 반대해 온 에바트를 설득해 한국승인 약속은 물론 승인외교에 적극 협력해 줄 것을 다짐받았다. 오브라이언 주교는 저녁 늦게까지 여러 대표단 숙소로 장면을 인도하여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장면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언니가 원장인 수녀원도 방문, 기도를 요청하여 “당신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우리 수도원 전체가 기도드리겠다.”는 언약을 받았다.

 

장면과 조병옥은 한국문제에 냉담한 입장을 가진 시리아 수석대표 엘쿠리를 방문하여 시리아의 지지와 아랍블럭을 설득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 이어 인도 수상 네루도 만나 지지를 얻어냈다. 이처럼 각국 대표단을 개별 방문하는 득표공작은 특히 유럽 계통과 남미국가들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대개 흥정에 가까운 조건을 제시하기 일쑤였다. 쿠바 부통령은 설탕을 자기네 것으로 사달라고 하여 무조건 그러겠다고 했다.” 어떤 대표단은 두세 차례나 방문한 일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들려오는 본국소식은 남조선 노동당 세력이 일으킨 제주 4 · 3항쟁의 유혈진압과 여수 · 순천반란과 같은 불길한 뉴스뿐이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서울의 미국 관리들 말을 인용해 “대한민국이 완전히 붕괴 직전에 놓여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김구는 미 · 소 양군 철수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요지의 담화문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발송했다. 한국에서의 이 같은 사태는 승인문제를 눈앞에 두고 불길한 예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은 한국 불승인을 추진하며 방해공작을 벌이던 중 호재를 만났다. 게다가 당시 유엔 총회에서 한국문제는 이스라엘 문제보다 관심도가 떨어졌다. 소련 대표 비신스키를 비롯한 공산 진영의 고의적인 지연작전으로 한국문제 상정이 지연되어 우리 대표단의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표단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묻혀있는 이준 열사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겠다(事不成生不還)는 결의를 다졌다. 이때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일행이 암스테르담 공항을 빠져나갈 때, 선두에 섰던 정일형이 여권을 내밀자 이리저리 뒤적이던 공항 직원이 여권을 팔 수 없느냐고 물었다. 여권 모양이 다른 나라 것과 다르고 이름도 붓글씨로 쓴 희귀한 것이어서 간직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침내 12월 6일, 장면의 요청으로 미국의 무초 대표가 중국 대표에게 부탁하여 한국 대표를 국회 법사위원회에 해당하는 정치위원회에 초청하자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설전 끝에 한국 대표 초청안은 가결되고 북한측 초청안은 부결되었다. 이튿날 정치위원회에 참석한 장면은 유창한 영어로 약 40분간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가 1947년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참관한 총선거로 탄생한 정부임을 상기시키면서 유엔의 승인과 회원국들의 개별적 승인을 호소했다. 이어 중국을 비롯해 여러 대표들의 지지연설과 소련측 6개국의 반대연설이 있었다. 위원회는 8일 밤 11시경 투표에 들어가 41 대 6, 기권 2표로 대한민국 승인안의 총회 상정을 가결했다.

 

여러 나라의 대표들은 그즈음 자기네들의 이해관계가 깊은 의제가 끝난 데다 성탄절이 가까워져 짐을 꾸리고 선박과 비행기를 예약하며 귀국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대표단은 그들을 찾아다니며 호소도 하고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가결 전일의 야간회의 때도 새벽 두 시까지 문에 지켜 서서 우리 편 대표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애썼고, 다음날에는 잠자는 각국 대표들을 깨워 오후 3시까지 회의에 참석하도록 사정사정했다. 이 때 성 신부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자동차를 대표들에게 보내어 많은 사람이 회의에 참석하도록 배려했다.

 

특히, 미국 대표로 유엔 총회에 참석한 국무장관 덜레스의 지원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덜레스와 장면 사이에 긴밀한 유대와 협조를 맺어준 끈은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신앙의 열정이었다. 덜레스는 개신교 신자였지만 그의 아들은 예수회 신학자였다. 장면의 외교활동에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런 도움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의 인품과 성실성 및 신앙의 힘이 음양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 점은 총회의 최종 표결을 앞둔 12일 새벽에 성당을 찾은 장면을 동행한 모윤숙의 증언에 잘 나타난다.

 

“비가 멎은 파리의 날씨는 좀 추웠다. 파리 시가는 적막에 잠겨있었다. … 장 박사는 세인트조셉 성당에 들어서자 촛불이 켜진 성모상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기도의 세계에 몰입되었다. 30분이 지나도록 장 박사는 기도를 계속했다.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 나로서는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깊은 세계에서 몰아의 경지를 맛보고 있는 듯한 엄숙하고 성스러운 표정으로 기도를 드리던 장 박사는 거의 1시간 만에야 일어섰다. … 세인트조셉 성당을 나왔을 때도 날은 아직 채 밝지 않았다. 나는 그냥 호텔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요 근처에 아베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거기 가서 미사에 참례합시다.’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만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 나는 그분의 인격에 눌려 한 5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아베마리아 성당으로 따라갔다. ….”

 

소련 대표를 위시한 공산진영의 지연작전으로 한국문제가 다음 총회로 넘어가게 될 우려가 커지자 덜레스는 총회 의장인 호주 외상 에바트와 교섭, 야간회의를 열어 새벽 2시까지 토의를 한 후, 같은 날 오후 3시에 다시 회의를 열게 했다. 마침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그는 “한국문제는 중요하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 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듣기로 하자.”고 제의,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다. 오후 5시 15분, 찬성 48, 반대 6(소련, 우크라이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벨로루시), 기권 1표(스웨덴)로 가결이 선포되자 그는 그 종이에 사인을 하여 ‘승인 기념품’으로 장면에게 주며 축하했다. 그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얌전하고 점잖은 김활란 박사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축배를 들고 춤까지 출 정도였다.

 

유엔의 승인 직후 12월 16일 장면은 대통령 특사로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하여 지원에 감사했다. 그 자리에서 한국에 정식 교황사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며 방 몬시뇰을 추천한 결과, 과연 그대로 되었다. 바티칸은 사절이나 대사를 파견할 때 정치 · 외교적인 비중보다 사목적인 뜻을 더 중시하여, 남북 어느 정부가 아닌 우리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코리아 주재’라는 표현을 써왔다. 그래서 대사를 ‘Nunciatura Apostolica in Corea’로 칭한다. 그 후 장면은 맨해튼 대학에서 수여하는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러 미국에 체재 중 12월 27일 뜻밖에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사무실도 직원도 없던 대사관의 운영을 본궤도에 올려놓으면서 미국주재 각국 공관을 연일 방문하여 30여 개국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얻어냈다.

 

 

6·25동란과 유엔군 파병

 

장면 대사는 1950년 6월 25일 밤 9시쯤, AP통신과 UP통신 기자로부터 북한의 남침을 확인하는 전화를 받은 데 이어, 이 대통령과 임병직 외무장관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당신의 역량에 국가의 운명이 달렸소.”라는 임 장관의 전화를 끝으로 본국 정부와 연락이 끊겼다. 본국의 훈령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장면 대사는 밤 11시 국무성으로 달려가 러스크 차관보 등 고관들과 대책을 협의, 한국사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하기로 합의하여 고향에서 주말휴가 중이던 트루먼 대통령의 구두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즉시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을 깨워 긴급사태를 설명하고 밤늦게라도 이사회 11개국 회원에게 통지하여 긴급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 총장의 주선으로 이사회 소집이 결정된 시각은 이튿날 새벽 3시였다.

 

이사회에는 상임 이사국인 미국 · 영국 · 프랑스 · 자유중국과 비상임 이사국인 쿠바 · 에콰도르 · 노르웨이 · 이집트 · 인도 · 유고슬라비아 등이 참석했다. 소련은 자유중국 대신 중공이 상임 이사국이 돼야 한다며 이사회 출석을 줄곧 보이콧하고 있어서, 이날 회의는 물론 한국사태를 결정하는 모든 회의에 불참했다. 리 총장은 한국사태는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중대 사건이므로, 이사회가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적절하고 신속한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어 미국 대표가 당사국인 한국 대표를 참석시키자고 제의하여 장면이 이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국은 제소국의 입장에서 북한이 전쟁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군대를 38선 이북까지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는 제안 설명을 했다. 이어 발언 기회를 얻은 장면은 북한군의 침공은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켜 공산화하려는 것이며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이사회의 강력한 조치를 촉구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오후 6시쯤 미국 제안에 대한 표결에 들어가 10개 참가국 중 유고가 기권하고 모두가 찬성하여 정전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6월 27일(현지시간 26일) 오후 4시쯤 장면은 워싱턴으로 귀환한 트루먼 대통령을 방문, 38선 경비를 위해 6개월 전에 무기 원조를 요청했지만 소총 한 자루도 한국에 보내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며, 나라의 운명이 대통령에게 달렸으니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재촉했다. 6 · 25동란 발발 며칠 전에 한국을 방문하여 장면의 간곡한 부탁대로 38선을 시찰하고 국회에서 “한국이 침략을 받을 때는 홀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연설했던 덜레스 국무성 고문과 한국을 방위권에서 제외한다고 선언하여 북한군을 불러들인 결과를 초래한 에치슨 국무장관도 앞장서서 한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27일 낮 12시 30분 미 해 · 공군의 한국 파병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이 성명은 그날 열린 유엔 안보이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열린 이사회는 북한군에 대해 군사적인 제재를 가할 것과 모든 유엔 회원국이 한국에 원조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에 따라 50여 개국이 한국에 군사적 혹은 경제적 원조를 하게 되었다. 이처럼 유엔 사상 초유의 신속 과감한 결의는 교회의 효율적 막후 지원이 상당히 작용한 파리 유엔 총회의 압도적 대한민국 승인에 이어, 30여 개국의 개별 승인이 없었던들 실현될 수 없었다. 소련 대표는 이사회에서 무슨 결의안이 채택되든 2주일만 지나면 북한군이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여 이날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도 한국에 출동하도록 명령했다.

 

유엔이 1947년부터 한국문제에 간여하여 유엔 감시하 선거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과 승인, 정식 승인된 나라에 대한 침략행위에 대처한 유엔군 파병과 원조에 의한 평화조성과 평화유지 활동은 유엔 활동의 효시로서 좋은 모델이 되었다. 이 같은 한국문제 해결방식은 신생 국제기구였던 유엔이 국제문제를 해결한 귀중한 선례로 향후 유엔의 활동방향과 틀을 잡아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장면은 6월 26일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미군 파병과 유엔 결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런 일들로 북한군의 미움을 받아, 평양에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초대 원장으로 있던 장면의 여동생 장정온 앙네다 수녀는 지명 수배되어 평원군 촌가에서 피신 중 10월 4일 체포돼 귀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교문장에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를 넣었던 교황사절 방 주교는 노 주교가 사도좌 정기방문(ad limina)차 로마에 가고 없는 서울에 남아있다가 체포돼 인민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북 최북단 중강진 부근 하창리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다. 폐렴에 각기병과 이질을 앓고 있던 그는 한 번도 불평하거나 불만스러워하지 않고, “사제직의 은총 다음으로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가장 큰 특전은 죽기 전에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에 오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창리에서 11월 25일 62세로 선종, 마을 밖 얼어붙은 땅에 관도 없이 묻혔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과 한국전쟁 시의 유엔군 파병은 국가의 존립 자체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이 과업의 성공적 완수에 장면 개인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 성가로 국무총리 · 민주당 최고위원 · 부통령이 되고,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런 장면을 5 · 16쿠데타 세력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너무나 유약해서 그대로 두었으면 나라가 공산화되었다.”며 수십 년 동안 국민을 세뇌시켜 장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왔다.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모함이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내몰기 위한 기만이었다.

 

쿠데타 세력이 출판한 5 · 16군사혁명사는 장면정부 출범 18일 만에 주동자들이 서울 충무로 충무장에서 정부전복을 모의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도대체 18일 동안 정부가 어떻게 부패 무능할 수 있는가. 군사정부가 장면정부 때의 부정 사건들을 철저히 재조사했으나 어느 장관 집에 미제 냉장고 하나가 선물로 들어온 것만 유죄가 되고 나머지는 전부 무죄가 되었다. 쿠데타 당시에는 학생시위나 이익집단들의 시위도 어느 정도 수그러들어, 사회가 안정되고 있었다.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순조롭게 추진되고, 장준하와 함석헌 등이 주도하는 국토건설사업은 본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정부가 시작한 것을 ‘표절’하여 표지만 바꾼 것이었다.

 

1999년 8월 27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최초의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 장면에게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김 대통령은 “이 훈장으로 우리들의 훌륭한 지도자가 오랫동안 받아온 부당한 평가와 누명을 벗겨주고 건국의 원훈으로 영예를 높이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장면 박사의 위대한 인격과 민주 지도자로서의 진가가 우리 역사에 영원히 빛나기를” 기원했다. [경향잡지, 2009년 5월호, 허종열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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