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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기도] 기도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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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2 ㅣ No.153

기도의 관점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믿음으로 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믿음으로 가득찬 기도를 할 때에 하느님께서 반드시 응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쇠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청하라고 예수께서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도에 있어 부족한 것은 거의 항상 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있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청할 줄을 압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너무 많이 청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작은 믿음으로, 때로는 믿음이 없이 청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기도일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진실한 기도를 하고자 한다면 기도할 때 있어야 할 몇가지 아주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수년 동안 수십년 동안 게으름과 나쁜 습관으로 살아온 상태에서 단 한 번의 기도로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를 변화시켜 주시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하느님께서 나의 경솔한 태도에 응답하신다면 진실하신 분이 아닐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삶을 바꾸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에 항구해야 합니다. 만약 급할 때만 응급처치식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기도의 많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타이어가 펑크날 때 바꾸기 위해 준비해 둔 예비타이어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차 전체와 같고, 생활 자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없이 생활할 수 없을 만큼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십니까? 즉 모든 생활에서 하느님과 같이 걷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잠을 자야 하는 육신의 법칙과도 같이 나의 일과안에 체계적으로 기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내고 가능한한 일정한 시간을 갖기를 결정한다면 기도의 습관이 내 자신안에 뿌리를 내릴 것입니다.

 

셋째는 하느님께 청할때는 분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스운 사실 같지만 명확하게 청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청하는 그것을 참으로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기도 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하였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 두 번씩 청하는 것으로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 세가지 관점은 잘 알고 있는 것이면서도 실제로 거의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의 소망이 허락되느냐 않느냐 하는 것 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안에서 실현되기를 원하고 그 뜻을 신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도가 하느님을 움직일만한 힘을 지니고 있고, 우리의 신심이 아무리 뜨겁다고 해도 하느님의 의지를 바꾸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도로써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진실한 기도란 신들린 것도 아니요, 어떤 이익을 바라는 얄팍한 마음에서 잠시 불길처럼 치솟곤하는 감정도 아닙니다. 또 큰일이 생겼을 때만 두려워서 매달리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것 혹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한정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극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느님과 이야기 한다고 하지만 실은 나 자신에게 중얼거리는 독백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 생활의 위기는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리의 머리는 하느님에 대한 관념으로 꽉 차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독백이 아니라 하느님께 향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온갖 장식적인 말로 우리 자신을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기도는 오히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오히려 조용한 한마디의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갑니다.

 

가끔 '기도할 시간이 없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그 만큼 그 많은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멀어져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텔레비젼이나 신문이나 그 밖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하루의 삶 가운데 단 몇 분 동안만이라도 하느님께 기도드릴 때 하루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했으면 합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사실 기도는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제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숨쉬는 것이 어렵다든가 안된다든가 성가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만일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거나 어렵다거나 힘이 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딘가 병이 든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도 되지 않는다거나 어렵다거나 힘이 든다면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에 호흡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처럼 건강한 신앙에도 기도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마음의 건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원하는 사심없는 사랑'입니다. 타인의 행복이 자기의 행복이 되고, 타인의 불행이 자기자신의 불행으로 느껴지는 마음에는 어떤 것도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할 줄밖에 모릅니다. 자기를 주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결코 자기를 줌으로써 밖에는 자기를 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라틴어 격언에 '참 삶은 산다는 것보다도 사랑하는 데에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이란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호흡이 멈추고 호흡이 없으면 생명이 멈추듯이, 사랑이 없는 기도는 형식만의 기도요, 죽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루나 이틀 사이에 혹은 일 년이나 이 년 사이에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일생의 과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의 처지를 먼저 반성하고 겸손하게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하느님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고백할 때입니다. 진실한 기도 한 번 제대로 바치지 못했음을 고백할 때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세상 어느 것보다 풍요로운 삶입니다. 기도 없이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하느님을 가장 깊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일은 기도로서 시작하고, 기도로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생활전체가 기도가 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자로서 일생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충실한 기도생활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고, 진실한 기도를 바쳤으면 합니다. 바로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의 은혜를 주시도록 간절히 청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아멘.

 

[박희원 신부님 / 수서 성당 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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