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대림 2 주일-나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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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12-04 ㅣ No.165

대림 2 주일(나해)

          이사 40,1-5.9-11    2베드 3,8-14    마르코 1,1-8

     1999. 12. 5.

주제 : 마음을 돌린다는 것

 

오늘은 대림 시기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가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기쁨을 누리자는 것이 대림시기를 보내는 교회의 정신입니다. 여러분은 이 대림절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보내고 계십니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자면 엄청나게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입장이 좀 달라서 그런 말을 다른 분들이 겪은 경험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지만, 같은 과정을 겪으신 분들은 그 어려움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려움도 시간이 흐르면 대수롭지 않게[=중요하지 않다] 생각되기도 합니다. 같은 의미로 우리가 지내는 대림절 시기도 우리가 준비하든 하지 않든 대림주간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거쳐서 날짜는 흘러갈 것입니다.  그렇게 날짜가 지나서 12월 25일이 되면 우리는 성탄절 축제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맞는 성탄절의 의미와 정성을 좀 더 들여 맞는 성탄절 축제와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들으신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지내는 삶이 대수롭게 여길 수 있으려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을 마치고 맞이할 축제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머무는 이 땅, 대한민국에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겠지만, 수 차례 예고 후 하느님이 찾아오실 때가 가까웠으니 준비하라는 것은 첫 번째 독서의 말씀입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까요?

 

그 하느님이 오시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이 될까요?  아니면 쥐구멍을 찾아 머리라도 숨겨야 할 상황이 될까요?  그것은 각자 우리가 마음과 삶의 자세를 돌이켜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알게 된 모습에 대해서 가슴을 치고 슬퍼하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오늘 하루만 살거나 이번에 맞이할 성탄 때까지 살고 말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방법을 써서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일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기쁨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아무 때나 오지 않습니다.  격언에도 있듯이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처럼 인간적으로 겪을 수 있는 어려운 일들을 모두 이겨낸 다음, 내가 살아있어야만 ’단 맛’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고통을 겪지 않고 단 맛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통은 다 겪고 나서 단 맛을 보기 전에 이 세상에서 그 생명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그저 육체의 목숨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단순히 몸으로만 사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통을 이겨내는 첫 번째 방법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세례자 요한의 선포에 나오는 것처럼 ’참된 변화 즉 회개’를 바탕으로 합니다. 쉽지는 않은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회개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하면서 국어사전에 나오는 답을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첫 번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제 그들이 겪는 고통도 끝날 때가 왔음을 알려주고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 한가지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은 아무에게나, 그리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도 잘못하면 뺨을 맞기 십상인 일입니다. 비록 내가 과거에 같은 고통을 겪고 이겨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현재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그 상황은 또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위로하는 것, 말로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패인 감정의 골도 메워야 하고, 오해의 산도 허물어 평지로 만들어야 하며, 불신 때문에 이리저리 틀어진 길을 바로 잡는 일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것 역시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도 변화하겠지’하는 기대를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지쳐서 더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올 만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판단이 선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해놓은 일의 결과를 보고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움직이기만 한다면 당신이 우리보다 앞서 움직이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약점과 약함을 알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기에 우리가 시작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감싸안고 움직이실 분입니다.

 

그런 변화의 시기를 찾는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묻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이 두 번째 독서에 나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때와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때의 차이는 자그마치 1000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 세상의 변화가 완성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라는 것이 베드로 사도의 믿음 고백입니다.

 

세상은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갑니다.  그 세상의 모습을 조급하게 생각하느냐? 아니면 여유 있게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은지는 우리가 구별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격언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강론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함께 노력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다리고 우리의 할 일을 다하는 대림절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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