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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교토(京都) 천주교 성지 (1) 일본 천주교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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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1 ㅣ No.1425

교토(京都)에서 분 바람 - 교토 천주교성지 ① 일본 천주교회의 시작



1543년 포르투갈 선박이 타네가시마(種子島, 일본 가고시마현 오스미제도의 섬)에 표착한 후부터 가고시마현(鹿兒島縣)에서는 포르투갈 선박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1549년 일본의 천주교회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서른다섯쯤 되는 한 일본인 청년과의 만남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야지로’라고 하는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서간에는 ‘안지로’라고 적혀 있다.

1547년 12월의 어느 날, 말라카의 산타마리아성당 앞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는 사제를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일본인 청년이 있었다. 그 중의 한 청년이 일본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야지로이고, 사제는 바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들을 그 곳에 데려 간 포르투갈인 선장은 성당의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앞으로 두 청년을 데리고 가서 만나게 해주었다. 선장의 소개로 야지로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만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이 때 야지로는 그동안 배워 두었던 포르투갈어로 자기소개를 하며 자신이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 왔는지를 사제에게 전했다고 한다.

야지로는 사츠마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현 일대)의 하급 무사였는데 어떤 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고 절에서 피신생활을 하다가 그 곳을 떠나 그 당시 가고시마항에 정박하고 있던 포르투갈 선박을 타게 되었다. 예전부터 선장인 아르벨로 베스와는 알고 지내던 사이어서 그동안의 고민을 털어 놓았는데, 그 선장은 구원을 받고 싶다면 말라카에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를 만나러 갈 것을 권하였다. 선장은 예전부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와 친한 사이여서 그의 훌륭한 성품에 대해 높게 평가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야지로는 선장의 소개서를 들고 또 다른 한 명을 데리고 말라카로 향하였던 것이다.

한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도 일본에서 돌아 온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에 의하면 그 섬은 “은의 섬”이라 불리며 그 나라 사람들은 인도의 이교도에는 보이지 않은 지식욕이 있어서 인도의 어느 지역보다 더 좋은 선교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 이야기를 듣고 미지의 나라 일본에 대해 크나 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야지로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어떤 이유로 사람을 죽이게 되어 피신생활을 하고 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고국을 버리려고 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며 구원을 받으려고 하였다.

아시아 지역의 선교와 사목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기는 하나, 그것을 위해 가족과 조국을 떠나 온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마음에 야지로의 절실한 고백은 깊이 와 닿았다. 야지로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사제는 “이만한 아시아인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야지로의 조국인 일본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며 일본에서의 선교활동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낸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것과 동시에 야지로의 총기를 알아내어 자신의 통역으로 키우기 위해 포르투갈어는 물론 교리를 가르쳐서 세례를 주었다. 그가 야지로에게 천주교의 어떤 부분이 가장 훌륭한지를 물어보니 야지로는 ‘고해성사’와 ‘영성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정치, 문화, 종교 등에 대해 야지로로부터 받은 정보는 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서유럽에까지 알려졌는데, 그 보고서에는 당시의 일본의 신분제도, 종교상황(불교와 신도에 대해), 서민들 사이에 침투되어 있는 불교의 영향 등 상당히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었다고 한다.

1548년 11월 고아(인도 서안의 도시)에서 선교감독이 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듬해 1549년 4월 15일 예수회 토레스 신부와 페르나데즈 수사, 마느엘이라는 중국인, 아마돌이라는 인도인, 그리고 고아에서 갓 세례를 받은 야지로 등 2명의 일본인과 함께 전마선(밑이 평평한 중국의 범선)으로 고아를 출발하여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본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튼튼한 포루트갈선이 아닌, 정박하고 있던 중국인의 전마선으로의 그들의 여정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험한 해류를 따라 엄청난 위험을 동반한 여행이었다. 그리고 일행은 명나라(廣東省江門市台山, 광동성 강문시 대산)를 경유하여 야지로의 안내로 우선 사츠마반도(薩摩半島)에 상륙, 그 후 허가를 받아서 1549년 8월 15일에 가고시마시 기온노수쵸(鹿兒島市祇園之洲町)에 도착하였다. 이 날은 바로 성모 승천 대축일이어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 기쁨을 성모님께 바쳤다고 한다.

가고시마에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 당시 수도였던 교토(京都)로 갈 꿈을 가슴에 품으면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교토에 가서 천황을 만나 선교활동에 대해 승낙을 받으면 일본인들이 신앙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길고 험한 여정도 그에게는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교토에 다다랐을 때 마치 춤을 추듯 기뻐한 모습은 동행한 이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당시 교토의 모습은 그가 상상해 왔던 모습은 없고 오오닌노란(1467년부터 10년 동안 이어진 내란)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이어온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는 상황으로, 천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황폐해 있었고 선교활동에 대한 승낙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야지로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큰 기대를 가지고 간 교토였으나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역경이 오히려 사제의 열정을 타오르게 하였다. 길에 서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그 때까지 외국인을 본 적이 없는 교토 사람들에게 사제의 모습은 이상하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아이들은 들어 보지 못한 언어를 듣고는 비웃으며 야유하고 돌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그런 괴로움을 10일 정도 견디다가 어쩔 수 없이 교토를 떠날 각오를 한 성 프란치코 하비에르는 동행한 이들과 함께 멀어져가는 교토에서 눈을 떼지 못 한 채 깊은 슬픔에 잠겨 기도를 하면서 그 땅을 떠났다고 한다. 그 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에서의 선교활동은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일본에 대한 열정과 기대는 자리를 옮기면서 더 강해져 갔고, 1551년 2년 남짓의 선교활동을 거쳐 또 다시 중국에 가라는 사명을 받고 일본을 뒤로 하고 떠나갔다.

그 뒤 한동안 교토에서는 천주교가 전파되지 않았지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10년 후인 1559년, 그의 뜻을 이어받은 선교사 가스팔 빌레라가 다시 교토로 향하였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서간으로 일본 사정을 알고 있었던 가스팔 빌레라는 큐슈에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부터 세례를 받은 일본인 수도사 이르만 로렌소를 데리고 간 것이다. 빌레라는 교토에서의 선교를 위해 미리 허가를 받으려고 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한 채 교토에 다다랐고 교토 시내의 어느 오두막집에 살면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들 일행은 그 작은 오두막집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고상을 벽에 걸고 기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토에서 봉헌된 첫 미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참고도서 : 스기노 사카에 저서 《교토의 키리스탄사적을 돌아보다》, 산가쿠출판)

* 이나오까 아끼 님은 현재 프리랜서로 통역 및 가이드로 활동 중이며, 비산성당에서 10년째 교리교사를 하고 있다고 해요.

[월간빛, 2015년 1월호,
이나오까 아끼, 쥴리아(비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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