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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흥영성 운동의 현상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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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205

신흥영성 운동의 현상 (6)

 

 

5. 왜 빠져드는가?

 

지난 호에서 결코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단월드(단학선원)에서 기수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극히 일부의 현상으로 돌리기에는 실태가 만만치 않다. 강남에 살고 있는 어느 레지오 마리애 간부의 말에 따르면, 기수련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 쁘레시디움당 몇 명꼴이 된다고 할 정도이다. 본당에서 신흥영성과 관련된 강의를 하다 보면 매번 쉬는 시간에 피해자들의 질문이 속출한다.

 

대부분의 경우 일차적으로는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이지만 사실 건강이 썩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는 혼미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신흥영성 운동은 거의 예외 없이 단순한 건강운동이나 심신수련의 수준을 넘어 종교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면 된다. 노길명 교수가 지적하듯이, 이 운동들은 대개가 ‘기’를 체험하는 단계, 영적 세계와 교감을 이루는 ‘도통(道通)’ 단계, 우주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선화(仙化)’ 단계 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들이 단순한 심신운동의 수준을 넘어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1) 포지셔닝(positioning)의 힘

 

신흥영성 운동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대중문화 현상으로 점점 포지셔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홍보) 분야에서 포지셔닝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자리 매김, 선점’ 등의 의미를 지니는 포지셔닝은 엄청난 기득권을 발휘한다. 포지셔닝은 말뜻 그대로 어느 특정 분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나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것을 말한다. 일단 몇 손가락 안에 속하는 순위로 포지셔닝되면 광고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흥영성 운동은 오늘의 대중문화 속에서 인기있는 문화 코드로 이미 포지셔닝(자리 매김)되어 있다. 그 대략의 윤곽을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 ‘기수련’이 포지셔닝되어 있다.

 

1980년대 이후 정치 사회적 쟁점들이 사라지고 개인의 안녕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건강에 대한 욕구와 관심이 늘어났고, 그 대안으로 기수련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국내 수백 개 지부에서 수백만 명이 기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40대 이상의 연령대에서 애호되고 있다.

 

(2) 심신수련법으로서 ‘명상’이 인상 깊게 포지셔닝되어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려면 두 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인터넷, 다른 하나는 명상이다. 인터넷이 디지털 도구라면 명상은 아날로그식 무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광고 영상에는 첨단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명상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델들의 포즈가 곧잘 눈에 띈다. 명상에 대한 엘리트 지식층의 관심은 특히 폭발적이다. 이처럼 명상을 위해 몰려가는 엘리트들의 행렬을 ‘소울 러시(soul rush)’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이런 붐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는 것이 명상 센터들이다.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인 선(禪)은 이제 도심 곳곳의 선원들을 통해 대중 속에 뿌리를 내렸다. 방학, 휴가철이면 며칠씩 걸리는 참선 프로그램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얼마 전 틱낫한 스님의 방한에 대한 기형적인 관심 역시 이러한 추세를 반증한다. 이제는 대기업치고 선이나 명상 등을 교육 프로그램으로 마련해 두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고, 동호회들도 속속 늘어나고 있다.

 

(3) 웰빙의 일환으로서 ‘요가’가 앞자리에 포지셔닝되어 있다.

 

최근 웰빙 바람이 불면서 20-30대 사이에서는 요가 붐이 일고 있다. 40대 이상이 기운동에 쏠리고 있는 데 반하여 서구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요가에는 젊은 층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건강뿐 아니라 몸매 가꾸기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4) 첨단정보시대의 운세과학으로서 ‘사이버 점술’이 포지셔닝되어 있다.

 

오늘날 점술업은 첨단화, 과학화를 표방하면서 정보통신기술이라는‘새 옷’을 입고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시적인 악습(惡習), 미신(迷信), 금기(禁忌)로까지 여겨지던 이 점술이 인류가 발명한 가장 ‘첨단 기술’인 인터넷과 만나 어엿하게 고부가가치 콘텐츠로 자리 잡고서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점술업이 갈수록 기업화, 대형화하면서 점점 특화되어 정치 분야에 능통한 점술가가 있는가 하면 재산관리나 주식투자 같은 경제문제, 스포츠계의 전략 구축, 건강문제, 이혼문제 전문가도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요 역술인 연령대도, 주요 이용자 분포도 20-40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특기할 만하다.

 

(5) 흥행성 있는 대중 오락물로서 ‘뉴에이지’가 포지셔닝되어 있다.

 

이미 ‘뉴에이지’라는 단어 자체가 패션, 미술,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하나의 독특한 문화 코드로 일상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뉴에이지’라는 용어 자체가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고, 인기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광고 등에는 예외 없이 뉴에이지 음악들이 삽입되고 있다. 출판계에서 뉴에이지 계열 작품들이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은 것도 오래고, 영화에서는 외국 영화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수많은 뉴에이지 경향의 작품들이 속출하고 있다. 나중에 그 구체적인 실태와 식별법을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외곽만 언급해 둔다.

 

이처럼 신흥영성 운동은 대중문화 현상으로서 기득권을 누리는 정도까지 되었다. 이쯤 되면 신흥영성 운동은 개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싫든 좋든 문화의 일부로서 강요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흥영성 운동의 영향력을 벗어난다는 것은 유혹에 빠지지 않는 차원이 아니라, 어쩌면 대중문화의 대세를 거스르는 의인적이고 영웅적이며 전투적인 신앙의 차원을 요구한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2) 신흥영성 운동이 인기가 있는 이유

 

왜 사람들은 신흥영성 운동에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신흥영성 운동의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을 끄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물음에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들이 바로 가톨릭 교회의 문제점과 대응책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시사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기성 문화와 종교에 대한 불만을 자극하고 반항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서구의 경우 ‘뉴에이지’는 기성 문화나 종교의 한계를 빌미로 삼아 출발하였다. 특히 매너리즘과 세속화에 빠진 그리스도교는 그러지 않아도 핑곗거리를 찾고 있던 지성인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권위(특히 교계제도, 남성우월주의, 자연지배사상 등)가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상황에서 그 손아귀를 벗어나고자 했던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해방 욕구가 뉴에이지 운동으로 결집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포스트모던 성향의 젊은 층은 자신들의 ‘히피’ 운동을 뉴에이지 운동과 연계하여 전개하고자 하였다.

 

(2) 현대인의 심리적·정신적·영적 갈증을 대상으로 하여 영성상품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산업화를 통하여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현대인은 그 반대급부로 점점 강한 심리적, 정신적,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대한 기성 종교(특히 그리스도교)의 대응책은 무성의하고,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말기현상인 무차별적인 상업주의는 이 틈새를 시장화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거대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기성 종교인뿐 아니라 비종교인도 고객으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다.

 

(3) 현대인의 개척정신(모험정신, 초월욕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생존윤리는 누가 뭐래도 개척정신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신제품 개발의 압박에 시달리며 산다. 그래서 요구되는 것이 혁신, 개혁, 개척 등의 덕목이다. 이러한 터에 ‘뉴에이지’라는 말은 용어 자체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결과적으로 그 속에 어떤 독이 잠재해 있든지 간에 일단은 호감을 느낀다.

 

(4) 21세기 시대정신인 ‘통합’이라는 컨셉과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시대정신은 똘레랑스 곧 관용이다. 제3(나아가 4·5)의 물결 시대에 요구되는 덕목은 ‘융합(퓨전)’이다. 종합하건대 21세기 시대정신은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동(東)과 서(西)의 대화와 학문들 간의 연계가 강조되고 있다. 나아가 종교일치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신흥영성 운동은 이처럼 당위적이고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종교 혼합을 꾀하고 있다. 전면에는 대화와 일치를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무질서한 혼합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신흥영성 운동은 동양 명상, 의식변용술, 환생설, 그리고 영매술 등을 닥치는 대로 뒤섞어놓는다. 속이야 어떻든 겉은 그럴듯하기에 식별력 없는 이들은 금세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5) 윤리적 해방감을 주기 때문이다.

 

신흥영성 운동은 하나같이 사후의 심판을 부정한다. 죄도 없고 선과 악도 없다고 말한다. 세속적 쾌락과 오락을 즐기면서 본능이 원하는 대로 살라고 말한다. 이를 합리화하다 보니 아예 신관과 인간관을 우주의 폐쇄 공간 안에 가두려 시도한다. 곧 창조주 하느님은 없고 우주 자체가 자연신으로서 군림한다고 말한다. 인격신 하느님의 부정은 죄책감에 시달리던 기성 종교인들을 해방시켜 준다.

 

(6) 모든 종교는 똑같다고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기성 종교인들에게는 그동안 머물던 종교를 떠난다는 것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결국 같다고 확신하게 되면 가책에서 자유로워진다. 신흥영성 운동은 단계적으로 이 신념을 주입시킨다. 처음에는 기성 종교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다음에는 모든 종교는 결국 똑같다고 세뇌시킨다. 끝으로 자신들의 방법이 최첨단이며 최상의 것이라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이 방법이 썩 잘 통한다.

 

(7) 잠재력 개발을 통하여 새로운 인생을 창조할 수 있다고 꾀기 때문이다.

 

건강, 성공, 감정의 조절, 능력개발 등은 사람들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이다. 신흥영성 운동은 이들 욕구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을 자신들이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특화된 프로그램들을 수백만 원씩 들여 이수하게 한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건들이기에 대단한 호응을 얻는다.

여기에는 운세 개척에 대한 유혹도 포함된다. 사람들은 점, 수정구슬, 오늘의 운세(사주) 등을 이용하여 미래를 점치며 자신의 앞날을 조절할 수도 있다는 꾐에 쉽게 넘어간다.

 

(8) 몽환적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신흥영성 운동은 하나같이 엑스터시, 곧 몽환적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기법들을 가지고 있다. 심리학, 두뇌과학, 최면술, 영매술 등을 총동원하여 나름대로 비법들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신흥영성 운동끼리의 경쟁력이 판가름된다.

 

일시적으로 평화, 행복,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이 신비로운 체험은 일종의 환각현상이다. 알코올, 마약 등에 취해있을 때 느끼는 현상을 인위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환각이 그렇듯이 환각에서 깨고 나면 오히려 현실에 대한 혐오감, 불안, 우울증 등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다시 그 환각에 빠지고 싶게 만든다. 이것이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 신흥영성 운동에 빠진 사람이 집을 팔아서라도 더 높은 단계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악령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신자였다가 신흥영성에 빠지는 이들이 자주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자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9) 신비주의나 영적 비밀들을 체험하게 해주겠다며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신흥영성 운동은 영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선계(仙界), 영계(靈界) 등이 있다고 하면서 이 세계와 통하는 방법이 있다고 꾄다. 신흥영성 운동의 최고급 과정들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이른바 채널링(channeling)이라는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영적 존재와 대화나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면서 아무리 고액을 요구해도,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비판력 없이 응한다.

 

(10) 그들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는 누구인가?’,`‘나는 왜 여기 있는가?’,`‘고통은 왜 있는가?’ 등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들을 던지면서 해답을 줄 것처럼 유혹한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동안의 삶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새롭게 눈뜨게 해주고 있다고 믿으며 그들을 추종한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이 신흥영성 운동은 스트레스, 난치병, 공해 등에 시달리며 탈출구를 찾는 현대인의 관심사를 파고들기 때문에 침투 효과가 막강하다. 또한 동서양의 여러 신비주의 운동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심리학, 의학, 음악, 스포츠, 과학, 종교, 영화나 미술, 교육 등의 방법을 활용하여 접근해 오기에 피하기가 힘들다.

 

특히 ‘통합 영성’, ‘우주적 영성’이라는 선전문구는 기성 종교인들을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만들기 쉽다. 이 매혹적인 꾐에 한번 빠지고 나면, 기성 종교들에 신앙적 충절을 바치는 이들이 ‘옹졸한 관점’에 매여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신흥영성 운동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교계제도와 성사 그리고 전례 등이 무의미해 보이고, 교리나 신학 등 교회의 지적 전통이 편협하게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방어만 할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왜 실망하고 식상해하는지를 성찰하고 그 대안을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존의 의무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나 은총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심각한 낭패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겸허하게 수긍할 필요가 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신흥영성 운동이 결코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신자들이 꼭 알아야 한다. 사목자들이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흥영성은 결과적으로 동공(洞空), 혼란, 오류를 벗어날 수 없는 과대망상적 영성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역사 이래 종교에서의 상생과 공존의 길은 상호 인정이었지 결코 혼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목, 2004년 9월호, 차동엽(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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