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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새 천년 유럽 교회의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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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179

새 천년 유럽 교회의 그리스도인

 

 

3개월 전 The Tablet의 특집 기사는 "가톨릭 신자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라는 매우 곤혹스런 질문을 던졌다. 영국의 저명한 연구소 소장인 고든 힐드(Gordon Heald)는 과거 30년 동안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주일 미사 참여자 수가 계속해서 감소되어 왔을 뿐 아니라 사제 서품, 영세, 첫영성체, 견진 등의 성사, 그리고 특히 성당에서의 혼인식 수가 매년 지속적이면서도 극적으로 줄었다고 믿을 만한 자료를 근거로 지적하고 있다. 힐드에 따르면 이러한 감소 경향은 영국의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들, 나아가 유럽 대륙 전체에 해당한다고 한다. 

 

5주 후에 저명한 사회학자인 벨기에 예수회 신부 잔 커크홉스(Jan Kerkhofs)도 힐드의 특집 기사 내용을 증명한 바 있다. 그는 [사제 없는 유럽](Europe without Priest, 1995년)이라는 저서에서 유럽에서 가톨릭 사제 수가 감소되어 가는 현상에 특히 우려를 표했다. 그는 과거 20년 간 서유럽 13개국의 통계를 제시했다. 줄레너(Zulehner)와 톰카(Tomka)도 금년에 정밀한 분석을 통하여 아주 작은 오차는 있지만 동유럽과 중앙 유럽에서도 비슷한 경향과 수치가 나타났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 국가였던 동독에서는 73%의 인구가 어떤 교회에도 속하여 있지 않다. 체코 공화국에서도 수치는 비슷하다. 덴마크나 스웨덴에서도 이러한 비관적 수치는 상식으로 되어 있다. '유럽의 가치관 연구'(European Value Studies)라는 자료에 따라서, 커크홉스는 "유럽 전역은 그리스도교에서 막연한 무신론으로 표류를 시작하여 포스트 모던(Post-Modern), 포스트 그리스도인(Post-Christian) 세속주의로 흘러가고 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도 세계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자신의 저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에서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신앙 고백을 하고 종교 생활과 종교 활동을 하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종교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적 개념과 가치관, 그리고 실천들은 유럽 문명의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므로 그는 "유럽은 그리스도교라는 문화의 핵심이 약화됨으로써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한때 국제 종교 사회학회 회장이었으며 영국의 종교 사회학자인 데이빗 마틴(David Martin)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유럽에서는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에서의 이탈이 근대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극에 이르렀다. "유럽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속화한 대륙이 되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마틴에 따르면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영향이 유럽의 모든 계층에 철저히 침투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는 의미를 상실하였다.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유럽은 "교회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최근에 결론지었다. [헤럴드 트리뷴](Herald Tribune)지는 유럽에 대한 기사에서 오늘날의 유럽은 "지구상에서 가장 신앙이 메마른 지역"이라고 거리낌없이 결론짓고 있다. 

 

1992년 독일의 주간지인 [슈피겔](Der Spiegel)지는 종교에 미래가 있는가, 신은 죽었는가와 같은 문제를 상정하고, "독일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대한 여론 조사를 의뢰한 바 있다. 이 주간지는 "신이여 안녕" 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보아라, 독일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었으며 그와 함께 그리스도교 생활 철학도 잃었다." 그런데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슈피겔]지의 편집인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여론 조사 결과에 대한 해석은 사적 견해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교회 생활의 어떤 면은 통계적 수치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오늘날 유럽 대륙에서의 통계와 비교 수치들이 종교 활동의 감소를 지적하고 있는 사실을 진솔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다른 자료들은 이와 반대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에서의 통계 수치는 가톨릭 신자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현 교황은 그리스도교 전체의 교회 일치의(Ecumenical) 대표자로서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언론 매체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 1994년 미국의 [타임]지는 교황을 '올해의 인물'로 뽑았다. 1995년 10월에 [인디펜던트]지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교황만이 유일하게 의지할 곳(닻)"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흄(Hume) 추기경이 서거했을 때 영국 연방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그에게 보내 온 수많은 찬사들은 우리 시대를 모범적으로 살았던 한 그리스도인에게 보내 온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가톨릭과 성공회 계통의 학교들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나라에서, 특히 오스트리아와 같은 나라에서도 같은 소식이 들려 오고 있다. 

 

이와 같이 전세계적으로 종교 부흥을 알리는 소리가 드높이 들려 오고 있고, 이미 뚜렷하게 그 첫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의 종교 사회학자인 질 케펠(Gilles Kepel)은 그의 저서 [하느님의 복수](La Revanche de Dieu)에서 미국의 역사학자 바이젤(Weigel)이나 헌팅턴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종교 부흥은 세속주의, 상대적 가치론, 그리고 자기 도취에 대한 저항이며 질서와 규범, 근로와 상호 협동, 그리고 인류 화합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있다." 

 

청년들을 위한 초(超)종파 운동인 테제(Taize)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몇 년 전 비엔나에서 열린 테제의 예수 성탄 대축일 모임에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십만 명 이상의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1997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청년의 날 행사 때도 그 동기가 어디에 있었든지 간에 교황과 만나기 위해 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종교적 관심은 거의 그리스도교 교회들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 많은 종파들은 인간이란 어느 시기든지 종교적 진공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라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 연구가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와 같이 종교는 인간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이나 어떤 신적 존재와의 관계를 추구한다. 파스칼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실존적 경험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요약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말은 유럽의 오랜 사상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오늘날,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발견들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있지만, 원자 물리학과 천문학적 사건에 대한 관심은 커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저명한 과학자가 하느님에 대해 발언을 하게 되면 우리의 관심이 그리로 쏠리게 된다. 1984년도 물리학 부문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CERN(Council Europeen de Recherches Nucleaires)의 소장인 칼 루비아(Carl Rubbia)는 1992년에 Neue Zuricher Zeitung 신문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우리가 태양계의 수를 나열한다든지 분자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될 수 없겠지만 과학자로서 나는 이 우주와 물리적인 미미한 현상 안에서 발견하는 질서와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자연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안에 이미 모든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이런 모든 현상이 단순한 우연의 결과라든가 낮은 확률로 발생한 현상이라는 생각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여기에는 이 우주 전체를 관할하며 이 우주 위에 존재하는 더 높은 지성의 존재가 있다고 확신한다." 

 

20세기의 위대한 물리 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는 특정의 종교를 믿고 있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종교]라는 그의 마지막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종교는 우리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마음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세세한 부분까지 그 본체를 드러내는 무한한 영(Spirit)에 대한 겸허한 경외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초월적 이성의 힘의 존재는 우리가 이해하는 우주에 이미 발현되어 있어 크나큰 감동적 확신을 갖게 한다. 나의 신관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삶의 의미에 대한 토의를 하면서 이러한 과학적 주장을 보완해 주고 있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은 다음과 같이 이 문제를 말한다.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인간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인생의 숨은 수수께끼들의 해답을 여러 가지 종교에서 찾고 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의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이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후의 심판과 판결은 어떨 것인가? 마침내 우리 자신의 기원이자 종착역이며 우리의 실존을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마지막 신비는 과연 무엇인가?"(1항) 

 

우리는 모두 삶의 의미와 그 목적을 알고 싶어한다. 막연한 무신론이나 세속화한 현실이 삶의 신비에 대해 해답을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이 해답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 나선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의 삶의 뜻과 삶의 목적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 문학 그리고 정신 의학 분야의 연구 주제가 되고 있다. 프로이드의 제자였던 빅터 프랭클은 언어 치료 요법(Logotherapy)이라고 칭하는 그의 정신 치료법 기본을 우리 존재의 의미 탐구에 두었다. 이러한 탐구를 하느님에 대한 추구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아주 흡사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존재 의미는 일괄적인 뜻보다는 개개인에게 그 개인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뜻하고 있다. 다양한 여러 문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종교적 표현들마저도 우리 실존에 대한 궁극적 의문이나 불안한 우리 삶에 대해 믿을 수 있는 해답을 갈망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비교 종교학은 인류 역사를 통해 모든 부족이나 민족에게 종교가 있었음을 투명하게 밝혀 준다. 이 사실 하나만 미루어 보아도 종교는 인류에 직결되어 있으며 우리 존재의 불가결한 부분인 것이다. 비교 종교학자의 말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의 영혼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원시인들뿐 아니라 여러 문명인들도 그들의 하느님이나 신들에게 기도하여 왔다. 우리는 인류가 살아온 흔적들에서 그들이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도움을 청했던 증거물들을 발견한다. 육대주 어디서나 언제나 인간들은 탄원과 찬미를 위해 무릎을 꿇고 감사와 속죄물을 신에게 바쳤으며 애원과 기도의 증거물들을 우리에게 남김으로써 먼 후대의 우리가 그들의 깊은 내면 세계까지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티에라 델 후에고(Tierra del Fuego)의 야마나(Yamana)족의 단순한 감사 기도, 이집트의 묘비에 새겨진 애원, 불후의 상형 문자로 점토판에 새겨진 그들의 애처로운 부르짖음, 중국인들의 하늘을 향한 기도, 희랍인이나 로마인들의 전쟁 승리와 성공을 비는 탄원의 기도, 불교인들의 경전의 영창, 베다 신들에게 바친 성가와 찬미, 인도와 페르시아의 아베스틱 성전 등은 다양한 목소리로 줄기차게 바쳐진 바위로 조각되고 점토에 쓰여지고 또는 돌에 새겨진 영광송이다. 이것은 일종의 감동적인 자비송(Miserere)으로서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인간들이 초월적 존재에게 도움이나 구원을 요청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과 그 문명의 출현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 역사의 시점부터 이런 탄원하고 기도하는 목소리와 그 자취들이 인류와 함께하였다. 

 

이제 하느님을 포기하고 기도를 거부하며 하느님을 향해 반항해 온 한 인간의 비탄의 소리를 위와 비교하여 들어보자. 이 사람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이며 그는 하느님을 죽이고 하느님 자리에 인간을 앉히려 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다시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숭배도 하지 않고 

깊은 믿음 안에 머무르지도 않으리 

너 자신의 생각을 다듬기 위해 

궁극적 지혜, 궁극적 선, 궁극적 권세 앞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너의 일곱 가지 고독(Seven Solitude)1)을 위해 

영구한 후견인이나 친구도 갖지 않을 것이며 

봉우리에는 눈이, 가슴에는 불이 타오르는 

산도 보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복수할 자도 이제는 없을 것이며 

도와 줄 자도 없을 것이다. 

너에게 일어나는 일들에는 의미가 없을 것이며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에게 무슨 관심을 두랴. 

이제는 너의 가슴 속에 안식처도 두지 않을 것이며 

나에게 보이는 것 외에 무엇을 추구하랴. 

너는 궁극적 평화를 거부하리. 

이러한 너에게 누가 용기를 주겠는가? 

아무도 이제까지 이러한 용기를 가진 자는 없기에. 

(Nietzsche, Frohliche Wissenschaft, Aphorism 285)

 

이것은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으려 하는 과정에서 멸망한 자의 음성이다. 새 천년의 문턱에 서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상반된 생각들은 어떠한 의미를 던지는 것인가? 한편으로 통계 수치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많은 사람들이 떠나감을 반영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이런 갈망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교회의 쇠퇴를 가져온 것은 무엇일까?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그것을 이해하고 싶지 않은 탓인가? 그래서 이 징표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는 탓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 자신들의 탓인가?

 

그럼 먼저 우리 사회에 책임이 있는지 살펴보자. 

 

20세기의 우리 사회는 엄청나게 다원적이고 다문화적이 되었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학과 기술 공업은 우리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유럽을 파괴했고 과학의 진보가 종교를 대치할 것이라는 이 세기초의 확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35년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미 다음과 같은 예견을 하였다. "역사의 흐름도 각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인류 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 운명을 지니게 되므로 이미 여러 가지 역사권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이렇게 인류는 정적 세계관에서 동적, 또는 발전적 세계관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여기서 새로운 분석과 새로운 종합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이 방대하게 야기된다"(사목헌장, 5항). 

 

이어서 공의회는 말한다. "인간이 발굴한 힘들이 인간을 괴롭힐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 이런 힘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사목헌장, 9항). 이와 같이 공의회는 새 천년 초기에 일어날 극적 사회 변천을 이미 예견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천년의 말기에 이르러 공의회의 예측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큰 자율성을 얻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인간은 점점 더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게 되었고 어떠한 체제도 불신하며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인간 상호간의 협동심이 상실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주의와 오만함으로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 증폭되었는데, 신앙 공동체인 교회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다. 

 

사회 여론도 변했다. 견고하게 구성된 체제에서 이루어진 안정된 질서는 동적이고 융통성 있는 정보 사회가 대치하고 있다. 일반적 가치관의 변화, 특히 결혼과 가정 생활도 그 영향을 받아 변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로 자유와 자주는 젊은 세대의 구호가 되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책임 없는 자유는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표면으로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언론 매체의 양면적인 힘은 다양한 문화를 지닌 사회 여론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역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이 흔히 전(全)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되어 보고되며 단순 사건들이 개괄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정확한 정보를 얻고 있다고 착각하고 자기로부터 가장 먼 곳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논평과 비판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어떠한 사건 발생도 가능하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우리에게 지식과 경험의 풍요를 주었고 전세계적인 정보 제공으로 타인을 돕겠다는 새로운 협조 정신을 탄생시켰으며, 또 한편으로는 '악한 힘의 모습'에 대한 논란, 곧 언론 매체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사정없이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대화보다 힘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쉽겠다고 믿는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두 번째로 이러한 쇠퇴 현상이 교회의 잘못에 기인하는 것인지 살펴보자. 

 

언론 매체는 주로 교회의 세속적 측면만을 다루면서 교회 생활에 대한 불안감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언론은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앙 생활의 부정적인 면만 불균형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나리오와 맞서야 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더욱 불안해진다. 어떤 이는 그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한걸음 물러나 교회 내부로만 관심을 돌리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 성찰과 구조 개혁에 몰두하게 된다. 공의회 이후의 토론에서 '보수'와 '진보'가 구분되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른바 '교회 내부에 시선 집중하기'(Church Navel-Gazing)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 특히 가톨릭 교회는 관심의 초점을 맨 먼저 대(對)사회적 이미지에 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근본적 관심의 초점은 어느 정도는 적응성 있게, 그리고 어느 정도는 불변의 원칙에 입각해서 복음 메시지를 전하는 데 두어야 한다. 그러기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는가?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전보다 더욱 긴밀한 주교, 신부, 그리고 평신도들 간의 협조가 필요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반복적으로 이런 상호 협력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평신도들의 특별한 사명은 평신도를 통해서만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 그 장소와 환경 속에 교회를 현존케 하고 활동케 하는 것이다"(교회헌장, 33항). 

 

또한 교회 지도자들이 증폭되는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과도한 자기 방어적 중앙 집권과 관료주의가 형성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가톨릭 교회가 앞으로 특정한 문제들에 직면할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더 명확해졌다. 본당과 교구의 가톨릭 신자들은 중앙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어떤 위로나 확신도 받지 못할 때, 교황 자신이 보내는 문서나 회칙(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외에 로마에서 오류와 이단에 대한 경고가 주를 이루는 수많은 문서들이 나올 때 낙담하게 된다. 신자들은 격려를 기대하고 일치와 다양성의 표시인 정보의 쌍방향 유통을 바란다. 

 

새 천년의 문턱에 임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이와 같이 급속도로 변천하는 세상에서 교회의 일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어떠한 지도자의 모습이 필요하며 우리의 일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떠한 다양성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자주 대두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에서 주교단과 교황 사이의 강한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이에 대한 관심을 명백히 하였다. "로마의 주교는 주교단의 한 회원이며 주교들은 사목을 위한 한 형제들이다."라고 교황은 역설하고 있다. 

 

교회 내 다양성을 보존하려면 성령에 힘입어 교회 생활의 어느 분야에서나 또한 어떤 문제에서나 관대해져야 한다. 신앙 공동체는 가정과 본당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성장하고 세례와 성사들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러한 소규모의 활기 있는 공동체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 성인들을 위한 교리 교육, 그리고 신앙적 연대감을 가지고 교회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간다. 이 소란스런 시대에, 이 네트워크는 세계 교회라는 더 큰 조직에서 오는 정보, 통신, 지식과 격려를 필요로 하는데, 세계 교회는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독재가 아니라 보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때 교회의 연대성은 성장할 것이다. 

 

셋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어떠한 책임이 있는지 살펴보자. 

 

하느님께서는 조직체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어떠한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우리는 항상 인간을 상대한다. 가장 우수한 조직체도 그 안의 인간이 실패하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바로 이를 가리키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3). 

 

위의 말씀은 우리가 말씀에 대해 토의하고 해설하는 것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그 말씀을 증언하여야 한다. 여기에 무슨 비범한 해답이나 비결은 없다. 교회 곧 교우들은 신뢰받을 수 있는 해설자가 되어야 하며 하느님 사랑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의 주위를 놀랍게 변화시킨 마더 데레사 수녀나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비결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나 교회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말로만이 아니고 행실로 사랑을 증언하면서 늘 같은 복음을 선포해 나가면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새로운 그리스도교 인본주의에 기반한 진술을 하고 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사목헌장,1항). 공의회는 우리가 익히 알아두어야 할 교회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문헌에서 제시했다. 그 중에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몇 개만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교회의 새로운 모습, 교회 일치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 사제와 평신도의 협력, 종교간 대화를 통한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주요 종교의 중요성, 그리고 끝으로 종교의 자유에 대한 강조이다. 

 

결론을 말하겠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으로 시작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일반 사회의 존경과 지지를 받아 왔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무신론과 무관심, 그리고 때로는 적대적인 환경에 의해서 퇴보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적 교회의 자취는 흐려져 가고 있는 듯하고, 콘스탄티누스 전환기만큼이나 근본적인 제2의 전환기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냉랭한 저항의 바람 속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시 한 번 이 땅의 소금이며 산 위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 산 위의 등불이 되고 짠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되라는 부름은 영원불변한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생활로 증언하는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던 이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보자. 

 

"이 어두운 세상에 빛과 같이 비추어라. … 우리의 삶이 참된 빛을 발했더라면 우리는 이러한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말씀대로 행하였더라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켰더라면 이교도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사랑한다. … 아니 그들보다 더 사랑했다.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기적으로? 이제 기적은 없다. 우리들의 행동으로? 그 좋지 못한 행동으로? 사랑으로? 어디를 보아도 사랑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우리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타인에게 입힌 상처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크나큰 우려를 강도 높이 천명한 사람은 5세기 성 아우구스티노 시대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크리소스토모가 지적했던 이 사실들은 새 천년을 향해 나가는 다중 문화 사회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가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 Franz Konig, "The pull of God in godless age", The Tablet(1999. 9.), 오덕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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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니체의 책 이곳 저곳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데, 실제로 자신의 일곱 가지 고독이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 명시한 것은 없고, 후에 비평가들이나 문학가들이 삽입한 것이다. 니체는 분노, 초인이 되기 위한 침묵, 사랑의 실패 등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사목, 2000년 2월호, 프란츠 쾨니히(오스트리아 비엔나 대교구,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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