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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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예수의 삶을 몸으로 산 김종한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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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662

예수의 삶을 몸으로 산 김종한 안드레아 (1)

 

 

김종한이라 하면 알 만한 사람이 드물 것이고, 성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라고 해야 그런가 싶다 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를 두고 교우들의 영혼에 미치는 성령의 신기한 행적을 남긴 사람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교적 인종(忍從)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초자연적인 말을 남긴 사람이라 하여 극찬하고 있다. 그 까닭은 그가 무슨 신통한 기적을 보이거나 성령의 능력을 빌어다가 깜짝 놀랄 일들을 벌여서가 아니었다.

 

그는 옥중에서 자기의 큰형에게 두 통의 편지를, 그리고 이씨와 유씨 성을 가진 교우에게 한 통의 펀지를 보낸 바 있다. 이 편지의 내용은 교우들에게 금구 목설(金口木舌)인 목탁 소리여서 거기에 감복한 나머지 그런 극찬을 보낸 것이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신부도 없는 한국에서 신부에게 종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한국인이 깊은 영성(靈性)의 말을 했다는 것이 기막혔던 것이다. 하기야 서양 신학을 제대로 소화하여 우리의 것으로 실현시키지도 못하고, 서양 일변도의 문화적 신앙 유행에 넋 빼놓고 사는 오늘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희한한 느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며 감정적 충동으로 믿지 않고 믿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 탐구하고 노력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가를 알면 오히려 그 노력 과정에 찬탄을 보냈을 것이다. 또한 신앙과 이성의 노력이 책상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몸으로 살아가면서 이룬 것이라면 그의 삶을 경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신기한 능력을 도움 받아 남긴 목탁 소리가 그의 삶의 결실이었다면 그가 살아왔던 생애를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김종한이 일생에 남긴 것은 신앙의 발자국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의 신심을 강조한 나머지 신상(身上)에 대해서는 밝혀 주지 않는다. 또한 그의 족보도 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아버지 김진후(비오, 譜名 運?)와 어머니 기계 유씨에게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족보에 따르면 종현(淙鉉, 字 希顔 1764-1824), 택현(澤鉉, 字 宗元 1766-1830), 한현(漢鉉, 字 宗漢). 희현(僖鉉, 字 季元 1785-1827) 사 형제가 있었다. 그중에서 택현은 성 김대건 신부의 조부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족보의 기록마저 종한만은 보병 외에 다른 기록이 없고 후사마저 부실하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이 된 것이다.

 

김종한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였다. 같은 내포 사람인 이존창이 한국 교회 창설 무렵에 입교하여 고향에 돌아와 전교할 때 종한의 맏형인 종현이 맨 먼저 입교한 듯하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천주교를 권했지만 들은 척도 안했다. 김진후는 본래 양반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대에 와서는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며 술수를 익히고 풍수를 배워 지관(地官)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는 양반의 생리대로 출세와 영달이 소망이었다. 그러던 중 충청 감사의 주선으로 벼슬을 한자리 얻어 지내던 터였으니, 아들의 입교 권고가 귀에 들릴리 만무했다. 그러다가 1789년경에 와서야 천주교에 입교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세속과 일체의 인연을 끊고 사주 구령(事主救靈)에 몰입했다.

 

철이 든 종한은 아버지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791년 진산 사건이 일어나자 양반의 신분으로 천주교를 믿던 아버지가 무사할 리 만무했다. 그는 관가로 끌려가 신앙 고백을 했는데 어찌어찌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후 붙들렸다 놓였다 하기를 네댓 차례 하며 홍주 전주 공주 등지로 끌려 다니면서 문초와 고문을 수없이 당하다가는 유배되었다. 그가 귀양에서 풀려나 별일 없으려니 했는데 다시 체포되어 1805년에는 해미 진영으로 끌려가 영영 갇히는 몸이 되더니 1814년 10월 20일 옥사하게 된다.

 

가장이 천주학의 죄수로 코가 꿰어 살고 있는 집안이 오죽했겠는가. 김종한은 소년 시절 수난을 옷으로 입고 컸다. 옷처럼 벗어 던지면 그만인 신앙이 무엇이길래 고통을 선택하여 살아가는가. 사 형제 중에서 김종한은 유독 신앙과 삶의 참뜻을 골똘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성장 과정은 피정하는 세월과 진배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유배되자 그의 가정은 마을에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세거지(世居地)와 선영을 버리고 부지 소향(不知所向)하다가 태백 산맥으로 향했다. 태백 산맥의 봉화 땅 일월산이 오죽 깊은 산인가. 청년 김종한은 1789년경 일월산 우련밭(봉황군 재산면 갈릴리 우련전)이라는 심산 궁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 화전을 이루어서 살며 교우촌을 형성했다. 그는 우련밭에서 17년 동안 살며 예수의 모범을 따라 고행 생활을 했다. 그는 자기 삶의 목적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한 사주 구령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중단 없는 기도와 성서를 읽는 일과 신도의 본분을 지키는 것을 자기 생활의 전부로 삼았다.

 

그리고 그 가난한 처지에서도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애긍 생활에 힘써 형제적 사랑을 실천했다. 그가 교리서와 성서에 몰두한 것은 지식을 축적하려는 뜻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신으로 하느님을 깊이 깨닫고 일상 생활을 신앙을 실천하는 생활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앙의 지식과 성서의 말씀을 살로 만들고 뼈에 새겼다.

 

그는 예수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 밑도 끝도 없는 세속적 욕망과 환각적인 육신의 욕정을 불 끄기 위해 고신 극기로 살았다. 그러한 실행은 사순절의 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생활이 그랬었다. 매일 대재(단식재)를 지키고 일상 양식이라야 조밥에 소금이거나 나뭇잎과 도토리나 풀 뿌리와 산채가 고작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무엇인들 못하랴. 그는 그렇게 고된 고행 생활에도 기쁨과 평화의 안색을 결코 잃지 않았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순(和順)한 기운을 잃지 않아야 하듯이 하느님을 대부모(大父母)로 모시고 사는 그의 신덕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그는 자기 구령에 도취되어 사는 이기주의의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는 낮이면 교리서를 필사해서 사방에 나눠 주고, 밤이면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토론하다가 삼경(三更)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한 열정으로 전교하여 입교시킨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가장 큰 전교 활동은 그의 말보다 그가 보여 준 기도 생활과 행동으로 보여 준 표양이었다. 그는 세속 공부에 열중할 만한 환경을 가져 본 적이 없어 학식이 그렇게 두덮지는 못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 현세에서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내세의 문제에 대하여 몰입하여 그 해답을 얻기에 전신을 갈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기 신앙을 정리하고 이론을 내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역사가 그를 극찬하는 것은 성직자가 일일이 제시해 주어야 행동하는 유아적인 신앙이 아니라 스스로 연구 노력하고 예수의 삶을 몸으로 살아가면서 체득한 신심을 정리하고 이론을 세웠던 점이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편지의 내용은 그의 영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는 그 시대의 영성가였다. [경향잡지, 1989년 6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 신부)]

 

 

수의 삶을 몸으로 산 김종한 안드레아 (2)

 

 

김종한은 옥중에서 큰형과 이씨 유씨 성을 가진 친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그의 신심이 표출되어 있다. 그 편지에 표현된 그의 신심을 들어 보기로 한다. 그는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일을 착하게 죽는 것,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선하고 바르게 살다가 복되게 죽는 선종(善終)을 말한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천주를 공경하고 자가 영혼을 구하고 천국을 얻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바로 “요리 문답” 첫 조목의 교리였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에는 그가 엔간히 이기적인 개인 구령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7년 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성서 읽기에 살았고 수도자와 같은 생활 양식을 수행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하신 말씀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하신 말씀을 쫀득쫀득하게 씹으며 맛들였고, 이 세상을 떠나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고 싶은 염원으로 살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는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을 이렇게 말했다. 짐승은 죽으면 허무로 돌아가지만 사람은 영원히 살게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사람의 종말은 영원한 지옥과 영원한 천당에 결정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한 죽음에 빠지므로 살기는 살되 진정으로 살지 못하고 죽되 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말한 죽음과 지유, 영생과 천국은 어떤 곳인가. 옛 사람이 지옥을 두고 부른 “지옥가”(地獄歌)는 끔찍했다. “맹호독룡(猛虎毒龍) 잔해(殘害)하고, 화해빙해(火海永海) 끔찍하다. / 악즙독즙(惡汁毒汁) 입에가득 악성독성(惡聲毒聲) 귀에가득 / 흉형악형(凶形惡刑) 눈에가득. 악취독취(惡臭毒臭) 코에가득 / 사지백체 어느곳에 화침독형(火針毒形) 면할손가 / 억억만년 지나도록 새록새록 고(苦)로워라.

 

이 노래에 묘사된 지옥은 영상을 보듯 사실적이다. 그러나 김종한은 지옥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늘과 해의 광명을 볼 수 없다는 것, 언제나 캄캄한 심연 속에 빠져 있다는 것, 이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빛과 어둠, 희망과 좌절, 죽음과 생명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지옥은 하느님과 분리된 곧, 죽음이 지배하는 곳, 희망이 좌절된 곳이었다. 또한 캄캄한 어둠만이 덮인 곳, 깊은 암흑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그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어도 천당만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옥의 괴로움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여겼으며 병과 재난을 고생스럽게 생각지 않았다. 김종한은 루가 복음에 기록된 ‘약은 청지기의 비유’(루가 16,1-9) 말씀을 연상케 하는 말을 했다. 지옥의 괴로움을 생각해서라도 이 세상의 고통을 잘 견뎌 종말을 예비하라고 권고했다. 육신도 생명을 오래 연장할 방법을 찾는데, 영원한 생명인 영혼은 당연히 영생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재물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의 물건은 본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그 쓰기에 따라 선용하면 좋은 것이 되고 악용하면 나쁜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치 올라가는 데도 쓰고 내려가는 데도 쓰는 사다리와 같다. 어떤 물건이든 죄를 피하고 공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용하는 사람의 지향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지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무슨 일이든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위하여 하라고 권고했다.

 

사랑하는 대상의 생애를 선택하여 그와 같은 운명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은혜였다. 김종한이 안동과 대구 진영에서 그를 회유시키려는 갖은 감언 이설과 모진 고문에 시달리면서 정작 두렵고 떨리는 것은 순교의 결실을 맺지 못할까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라 해도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다면 견딜 만했다. 그래서 어떤 고통과 고뇌도 그에게는 버릴 게 없었다. 그는 긴 세월 동안 금욕과 내핍과 고행의 생활로 매일을 살았다. 그는 한 번의 죽음인 순교가 있기 전 매일의 죽음으로 매일의 순교를 하고 있었다. 그가 교만과 육욕과 분노의 산을 무너뜨리고 영원한 행복을 향해 날아가라고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세속적인 욕망들에 대해 죽음을 감행하는 동안 서서히 곰삭아 형성한 신심의 표현이었다. 그는 매일의 육체적 욕망을 죽이는 체험에서 육신이 약할 때 영혼이 강해지고, 영혼이 약해지면 육신이 성하게 됨을 체험했다. 그에게 이 세상은 천국을 준비하는 방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세상은 천국에 비하여 상대적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보배였다. 구원의 결정은 이 세상의 행업으로 결정되고, 시간은 일회기적인 것이므로 이 시간에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기회가 없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러하듯 구령 사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무서우리만큼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했고 강인한 의지를 가졌다 해서 정에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옥중에서 그리운 형제와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을 생각하며 불망(不忘)의 정을 슬퍼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형수 진주 강씨가 1814년 초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고, 옥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종신을 모시지 못한 불효와 소상(小祥)에마저 참례할 수 없는 옥중 신세를 호곡했다.

 

그는 친지인 이씨와 유씨에게 의지가지없는 자기 아내의 신세를 괴로워하며 아내를 돌봐 달라고 살을 에는 비통한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인정에 목 매다는 게 아니라 애주 애인(愛主愛人)의 신앙에 호소한 것이다. 그의 호소는 어느 시대에도 들려줄 수 있는 목탁 소리 같은 교회상(敎會像)이었다. 그의 말을 첨삭 없이 그대로 들어 본다. “애덕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천주께서도 이 세상을 애덕 위에 세우셨습니다. 만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보존되겠습니까. 성교회는 오직 한 몸을 이룰 뿐이고, 하늘과 땅이 하나의 전체를 이룰 뿐이며, 세상도 또한 하나의 전체를 이룰 뿐입니다. 합심과 사랑 위에 자리잡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한 육체는 많은 지체가 있는데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지체가 어디 있으며, 우리가 떼어버리고 싶은 지체는 어떤 지체입니까. 사람은 서로서로 도움으로만 사는 것이니 육신은 영혼을, 영혼은 육신을 도와야 합니다. 생명을 보존하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비록 각 사람이 각기 떨어져 한 지체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은, 성교회의 머리는 천주님이요, 목은 동정 성모 마리아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 지체입니다. 머리를 직접 해치지 않는다 해도 결국 머리를 해치는 것이요, 이처럼 지체를 사랑하는 것은 곧 머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천주를 사랑하면 사람들을 사랑하기 마련이고 사람을 사랑하면 천주를 또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20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대구의 형장에서 1816년 12월 26일 망나니의 칼을 두 번 맞고서야 목이 땅에 떨어졌다. 그의 목숨은 그렇게 강하였다. [경향잡지, 1989년 7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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