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4일 (금)
(녹) 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문서 선교의 선구자 정약종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657

문서 선교의 선구자 정약종 (1)

 

 

사람의 일생에서 행복한 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앙 안에서는 기억하고 싶은 불행마저 은총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정약종이 신앙에 귀의하기까지 그가 걸었던 사상적 종교적 방황은 그를 더욱 위대한 신앙인으로 서게 하였다. “공명도 잊었노라. 부귀도 잊었노라. 세상 번우(煩憂)한 일 다 주어 잊었노라. 내 몸을 내마저 잊으니 남이 아니 잊으랴.” 이 작품의 구구한 설명은 차치하고, 삶의 식성을 잃거나 출세에 실족한 사람이 현실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참담한 세상을 향하여 부른 노래라면 현실 도피나 염세의 노래로 단정할 수 없다. 더구나 세상의 불행과 근심의 뿌리가 세속적 욕망과 사욕에 근원하고 있음을 탄식하는 심경의 노래라면 그것은 해방자의 신음이다. 그것도 무능력한 상민이 아니라 양반 사대부의 노래라면 대공을 나는 독수리처럼 부귀 공명과 영화를 박차고 욕망의 해방, 무소유의 행복을 향하여 비상하는 노래일 것이다. 조선조에서 과거 (科學)는 양반에게 있어서 권력과 권위와 부를 얻고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정을 보면 과거는 부정과 부패가 그 도를 지나쳐 식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정약용의 말처럼 과거란 뜻있는 선비들이 깊이 부끄럽게 여겼고 과장(科場)의 풍기가 심 히 문란해서 조금이나마 자존심이 있는 선비라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포부를 지닌 사람은 일체의 과거를 외면하는 것을 긍지로 여겼고 산림과 초야에 묻혀 독서와 신심 수양에 몰두했다.

 

정약종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열수(冽水) 변의 마재에서 1760년 부친 정재원과 모친 해남 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명문 세족 출신임은 그의 아우 정약용의 명성이 잘 말해 준다. 그는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 읽기에 전념하여 문필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문학으로 일세에 이름을 떨친 이가환과 저명한 선비들과 교제하며 지냈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과거(科擧)의 학풍(學風)을 비웃었다. 시험을 목표로 하는 선비의 학풍이 글의 이치와 진리를 터득하기보다 시가와 문장을 외고 글을 읽으면서 글자를 보면 운(韻) 달 것을 생각하고, 문구를 보면 시험 제목을 생각하니 깊은 학문과 독서의 진수를 터득할 수 없었다. 그의 형 약전(若銓)과 아우 약용이 진사 시험을 준비하고 1783년 합격하였지만 그에게는 강 건너 불이었다.

 

그의 독서 태도는 몸과 마음에 글의 이치를 밀착시켜 침착하고 성실하게 학문의 정곡을 찾았다. 그는 학문을 닦으면서 깊은 회의에 빠졌다.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끊임없는 번뇌의 차꼬에서 헤어날 수 없는가. 이 소중한 생명이 한 번의 생으로 끝나야만 하는가, 이런 생각에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몸담고 있는 유교에서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유교의 근본 관심은 현세에서 인격의 완성과 현실 사회의 질서를 실현하는 것을 기본 과제로 삼고 내세의 문제,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약종은 세진(世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학문이 세욕(世感)의 근심을 장만하고 재주와 지혜가 사욕(私慾)의 밑불이 된다면 차라리 바보가 되고 싶었다. 그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생명 한 가지뿐임을 깨달았다. 자면서도 생각하는 것은 생명의 문제였다. 그러한 심기가 도교(道敎)에 눈뜨도록 하였다. 인간이 근심에서 해배되는 길은 현세에 대한 관심과 명예와 이익에 연연하는 욕망을 벗어나고 사심이 없는 인간 본래의 순수함과 소박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참된 생명은 욕망의 해방에서 비롯되었다.

 

일찍이 산은 한국인에게 믿음의 고향이요 불로 불사(不老不死)하는 신선(神仙)의 현주소였다. 정약종은 신선의 모습에서 내일의 자기 모습을 찾았다. 신선은 세속을 초탈하여 현실의 번화하고 화려함에 유혹되지 않고, 욕망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유유 자적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불로 장생하며 우주와 영원히 존재하는 표상이었다. 그는 도교에 깊이 빠져 장생 불사의 비법을 탐구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의학과 약학(藥學)을 연구하여 명성을 떨쳤다. 정약종은 생명주의자(生命主義者)가 되어 철학의 경지를 벗어나 종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도교 역시 정약종의 희망이 성취될 곳은 못 되었다. 천지가 변하면 신선도 역시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므로 결국 오래 사는 길이 아니요 배울 것이 못 된다 해서 중단하고 말았다.

 

정약종이 새로운 방황을 시작할 무렵 그의 형 약전은 그에게 천주교를 권해 왔다. 마재 정씨 가문에서 맨 먼저 천주교를 알게 된 사람들은 정약전과 약용 형제였다. 그들이 천주교 교리를 처음 들은 것은 1784년 4월 보름날 한국 천주교의 선각자인 이벽으로부터였다. 이벽(李檗)은 정약종의 큰형 약현(若鉉)의 아내인 자기 누이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사돈집인 마재 정씨 집을 찾아왔었다. 이벽은 제사를 마치고 한강에서 배를 타고 귀경하던 길에 약전, 약용 형제와 동승하게 되었다.

 

이벽은 물결을 따라 서서히 내려오는 배 위에서 천지 창조, 하느님의 존재와 유일하심, 인간의 영혼과 불멸성, 삶과 죽음의 이치, 사후의 상선 벌악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벽의 현하구변(縣河口辯)에 승객들과 약전, 약용 형제는 황홀함과 놀라움과 의아심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정약전 형제들은 서울에 도착하여 이벽의 집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천주실의”, “칠극” 등 여러 권의 천주교 서적을 보고 흔쾌하게 천주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정약전은 대과(大科)의 과거 공부마저 포기하고 이벽을 따라 천주교에 심취하였다.

 

정약전은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약종에게 교리를 설득시키는 일이 고목(枯木)을 넘어뜨려 낙엽을 터는 일만큼이나 쉬웠다. 그러나 정약종은 쉽사리 입교하지는 않았다. 성격이 강직하고 심지가 곧고 상세하고 허술한 구석이 없는 그가 진지한 연구 없이 냉큼 결단한다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일 것이다. 그는 평소 학문의 태도가 그러했듯이 천주교의 이치를 몸과 마음으로 깊이 깨닫고 입교하여 1786년 3월 형 약전으로부터 아우구스띠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세례명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성 아우구스띠노가 정신적인 방황을 하던 모습에서 자기를 보는 듯했다. 그는 주보(主保) 성인처럼 교리를 날카롭게 이해하였다.

 

정약종은 묵상 기도 속에 살았다. 하느님을 알고 그 분과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한다면 묵상보다 더 좋은 기도가 없었다. “묵상지장”(?想指掌)에는 묵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묵상이란 사람이 자기 영혼을 천주께 향하여 천주와 한가지로 말씀하여 요긴한 일을 기구하고 천주와 더불어 친밀히 왕래하여 마치 집안 사람과 부자(父子)같이 함을 위함이라.” 정약종은 교리를 연구하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되었다. 전불 습호(傳不習乎)라고, 남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자신이 깊이 연구하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 것을 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비록 병고에 시달리고 양식이 떨어져 굶으면서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교리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깨닫지 못할 때는 침식을 잊어가며 더할 수 없이 괴로워했다. 정약종은 교우들 가운데 무지 몽매한 아녀자들까지 쉽게 교리를 알 수 있도록 한글 교리서를 펴냈으니 “주교요지”(主敎要旨)가 그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교리서였다. [경향잡지, 1989년 1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 신부)]

 

 

문서 선교의 선구자 정약종 (2)

 

 

마재[馬峴] 정씨 삼 형제 중에서 정약종은 맨 늦게서야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러나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더니 그의 섬도(深到) 있는 교리 이해와 전교열은 약전 약용 형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의 조카 사위인 황사영의 말을 빌면 정약종은 여러 가지 천주교 서적을 섭렵하여 인용하고 자기가 소화한 의견을 보태어 “주교요지”를 지었다 한다.

 

그가 섭렵한 교리서가 중국 문화의 상황에서 해석된 것이건, 서양 문화의 풍토 속에서 형성된 것이건, 한국 교회가 그들의 것이 아닌 이상 문화적 전통과 사고 방식이 다른 한국인에게 복음이 뼈 속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체 의식을 가지고 다시 이해해야만 했다.

 

이러한 정신으로 쓴 그의 책은 43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은 천주의 존재 증명, 천주의 속성, 도교와 불교와 무속에 대한 비판, 상선 벌악, 천당 지옥. 하편은 천지 창조, 강생 구속, 부활, 승천, 원죄, 영혼 불멸, 천주 교회 등이다. 그는 한국인의 성정(性情)과 사고, 풍속, 정치 체제, 생활 감정으로 도리(道理)를 소화하여 설명하였다.

 

이해하지 못한 신앙의 지식은 생명력이 없는 신앙이 되거나 맹신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통감한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은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있거나 언제든지 묵상 공부를 쉬지 않았다. 그게 책임 있는 말씀 전파자의 양심이었다. 그래서 “주교요지”의 내용이 아주 쉽고 교리의 뜻이 분명하게 해설되어 누구든지 책을 펴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한군데도 의심스럽지 않고 모호한 데가 없도록 꾸밀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이 한국 실정에 맞게 지어져서 중국의 대중 교리서인 “성세추요”(盛世芻?)보다 더 요긴하다 하여 인준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주교요지”의 골격에 영향력을 크게 끼친 교리서는 무엇일까. 그런 궁금증으로 상고(詳考)해 볼 때 “천주실의”와 “성세추요”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성세추요”와 “주교요지”의 저술 동기는 그 의도하는 바가 같았다. “성세추요”의 저자인 풍병정(馮秉正, Mailla ; 1733년 북경 간행)은 그 책의 머리글에서 궁향 벽지의 무식한 사람과 부녀자와 노약자 등 서민 대중에게 얼굴을 맞대고 강론하듯 가르치고자 저술했다고 밝혔다.

 

정약종은 책의 전교사요 명강론가였다. 그는 신도들이 감상주의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로 도리를 이해하여 개성 있고 확신에 찬 한국 신앙을 구현코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 전해진 방대한 한역 교리서(漢譯敎理書)들은 이론이 난해하고 구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어렵게 하므로 한 권의 교리 총론을 꾸미고자 했다. 그래서 여러 책에서 뽑아 모은 교리를 내용별로 분류하고 같은 종류는 하나로 묶어 “성교전서”(聖敎全書)라 이름하여 후학들에게 남기려 했다. 그러나 1800년 박해가 발발하여 미완성 교리서로 역사 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저술 작업은 1800년 이전의 일이었다.

 

마재 정씨 삼 형제들은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지만 민족의 언어와 민족의 주체 의식을 강도 높이 산 사람들이었다. 조선 사회의 유학자들은 대개 중국을 모방하는 것을 온당하게 여기며 사대(事大)의 문학 풍토를 벗어나지 못하고 국적 없는 글을 썼다. 그러나 정약종 형제들의 학풍은 달랐다. 정약종이 ‘암클’이라 하여 양반들이 천시하던 한글로 교리서를 저술한 것은 민족의 글인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친애함이요 민중을 의식한 의지였다. 그만이 아니었다. 그의 형 약전은 대중들에게 천주 십계명을 가슴에 간직시키기 위해, 조선인의 교양과 생활 감정을 토대로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는 순 한글 ‘십계명가’를 지었다. 그 사실의 진부는 서지학(書誌學)의 판단에 맡길 일이고 어쨌거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랫 동안 그가 한글 천주가사를 지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1902년경이었다. 목포본당 드예 신부는 흑산도 공소를 방문하여 알게 된 사실을 뮈텔 주교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저는 정약전이 흑산(내흑산 牛耳堡)에 있는 박인수의 집에 귀양을 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도 교우가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한국의 성가 가사를 지었는데 제가 그것을 받게 되면 곧 주교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1902년 6월 6일).

 

또한 약종의 아우 약용 역시 유학에 일신을 탁마(琢磨)했지만 여느 유학자와는 달랐다. 그는 칠순의 나이에 지은 시에서 “나는 본래 조선 사람, 조선 시 즐겨 쓰리.”(송재소 역) 하고 국적 있는 시를 주장하며 민족의 주체 의식을 선언했다. 배와 귤의 맛이 다르듯이 조선인의 개성과 사고와 생활 감정 그리고 기호에 맞는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줏대 없이 남의 것을 반복하는 앵무새도 아니요 남의 문화의 똥을 제 것처럼 무비판하게 답습하고 흉내 내는 원숭이도 아니었다. 자기 문화의 좋은 것을 버려두고 남의 문화에 중독되어 사는, 문화 식민(植民)이 되어 버린 지성인들을 질타했던 것이다.

 

한번 각질(角質)된 사상을 변신한다는 것은 부활만큼이나 어려웠다. 정약용은 1787년 조정에 등용되고 약전 역시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고 과거 시험에 등과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더니 1791년 외사촌인 윤지충이 유교식 제사를 폐기하여 환난을 겪게 되자 두 형제는 영영 교회를 떠났다. 또한 같은 향리에 거주하며 약종과 세교(世交)가 있던 권철신마저 교분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두 형제는 신민(臣民)의 길로 떠나고 약종 홀로 신민(神民)의 길을 고독하게 걸었다. 그는 두 형제의 냉담이 꿈에서도 흐느껴지도록 슬펐다. 그래서 “형제와 더불어 함께 천주를 믿을 수 없음이 나의 죄악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1795년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주문모 신부가 입경(入京)했다.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아온 한국 교회가 신부를 맞이한 것이다. 주 신부는 광주(廣州)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의 집을 자주 내왕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북경에 세워져 있는 회를 본떠서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했다. 이 회는 신도들이 천주교의 지식을 얻도록 연구 노력하게 하고 교우와 외교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했다. 주 신부는 명도회 회장에 정약종을 임명했다. 이 명도회는 신도들의 지식을 높이고 신심을 연마하며 전교 활동의 역군을 양성하는 데 놀라운 성과를 내었다. 정약종은 형제들에게 받은 실의를 생각하며 신도들이 믿음을 견고히 하고 애덕에 열절토록 이끄는 일에 몸을 부수었다.

 

북새 바람이 부는 것이 아무래도 날씨가 궂을 것 같다. 1799년 5월이었다. 대사간 신헌조는 입시(入侍)하여 이가환, 권철신, 정약종을 천주교의 괴수로 지목하여 처단토록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현군인 정조는 오히려 역정을 내고 신헌조의 직위를 박탈하고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정약종은 고향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 청석동에 있는 궁녀인 문영인(비비아나)의 집을 벌어 이사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정국이 잠잠하더니 청천 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조선조 문예 부흥기의 주역이요 천주교에 대한 정책적 탄압과 희생을 원치 않던 정조가 1800년 6월 28일 승하하고 말았다.

 

정조의 뒤를 이어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 김 대왕대비가 수렴 청정을 시작하였다. 김 대왕대비는 11월 하순 국상을 치르기가 무섭게 천주교 박해령을 준비하더니 1801년 1월 11일(음) 천주교 박해령을 공포했다. 어린 왕조의 왕권 체제를 강화하고 정책의 구심점을 모으는 데 천주교 탄압이 가장 적절했던 것이다. 탄압의 명분은 천주교가 무부 무군의 종교요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고 백성을 미혹케 하는 금수의 종교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설상 가상격으로 1월 19엘(음력), 정약종의 책고리짝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일꾼인 임대인을 시켜 천주교 서적과 성물,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송재기의 집으로 대피시키다가 밀도살 단속반에 발각되고 말았다.

 

정부는 2월 9일 천주교에 직접 간접으로 관계한 인사들을 이미 교회를 떠난 인사까지 체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약종은 불경죄와 반역죄로 기소되어 의금부에 넘겨졌다. 그리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三司)의 합의로 참수형이 언도되었다.

 

1801년 4월 8일, 사형의 날이 왔다. 그는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가며 예수의 말씀을 씹어 가며 산 사람답게 가상 칠언(架上七言)의 말을 재현했다. 그의 순교 장소는 훌륭한 강론대였다. 그가 최후에 남긴 말은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였다. 더 높은 세계 더 큰 가치를 향해 하늘에 눈을 꽂고 살아온 소망이 성취되는 날이 그의 순교 날이었다. [경향잡지, 1989년 2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 신부)]



39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