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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사목] 위령성월 기고4: 죽음 앞에 선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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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01 ㅣ No.415

위령성월 기고 (4) 죽음 앞에 선 인간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 서 있다. 한 시간이 지나면 한 시간이 지나는 대로,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나는 대로, 우리는 그만큼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 가까이 가 있는 것이다. 숨 쉬는 만큼 죽음에서 멀어지거나 죽음을 등 뒤에 남겨둔 채 걸어가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인간은 다가올 죽음이라는 사건을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은 기본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철학하는 존재다. 인간은 반성하고 성찰하는 존재다. 절대적인 한계 상황으로 다가오는 죽음, 실존적 불안의 가장 오래된 주제였던 죽음 앞에서 죽음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으로 인간의 역사를 점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

 

죽음은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더욱 더 적극적으로 삶으로 끌어 들여와 살아야 하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현실로 들여와 살 때 삶이 더 풍요롭게 생명력 있게 될 것이다.

 

죽음 앞에 서 있으면서도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일 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고, 개인의 삶도 성숙하게 만들 수 있으며 이 세상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올 죽음은 현재의 삶을 조명해 준다. 죽음을 인식하지 않는 삶은 무의미한 생물체의 단순한 생존이 될 것이다. ‘죽음아, 너 어디 있느냐’라고 했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죽음을 내 것으로 받아 들여 ‘나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사건이자 소중하고 고귀한 체험이자, 남겨지는 이에게는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픈 이별의 기억만을 아내에게 남겨주고 떠나가는 것이 가슴 아팠던 43세의 한 남자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며 울었다. “차라리 우리가 추억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자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하며 이별을 준비했다. “추억이 있으니까 울 수 있는 거예요. 추억이 있으니까 울 수도, 웃을 수도 있어요. 내게 추억을 만들어 준 당신에게 얼마나 감사한 지 몰라요. 당신은 나에게 단지 추억만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의미와 인생의 목적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아내는 또 “혼자 살면서 이별의 슬픔이 복받칠 때마다 추억 한 가지씩 꺼내 그 슬픔을 하나씩 상쇄시켜 나가겠습니다”고 했다.

 

 

자신의 동반자

 

죽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선물을 주는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소중한 사건이다. 죽음은 버려야 할 악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할 나의 동반자인 것이다.

 

30대의 젊은이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죽음은 새로운 삶에로 옮아감이었다. 목말라하는, 함께 낙원에 들어가자는, 주위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는, 나의 하느님이 날 버렸다고 외치는, 내가 누구의 아들임을 가르쳐 주는,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게 하는, 모든 걸 완성하는 순간임을 느낀다. 이 죽음의 순간은 하늘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으며,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었으며, 은총이 쏟아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죽음에 대한 이런 자세야말로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죽음을 해석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죽음은 두렵고 무섭고 아픈 이별의 기억일지라도 이미 극복된 죽음으로서 자리하게 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30일, 손영순 수녀(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 모현호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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