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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사목] 위령성월 기고2: 죽음! 무엇이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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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1-10 ㅣ No.413

[위령성월 기고] (2) 죽음! 무엇이 두려운가


영적성찰 통해 죽음의 두려움 극복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사건이 누구에게나 다가올 것이며 자기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중대한 사건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우선 죽음에 임박했을 때 처하게 될 육체적인 고통, 통증에 대한 일반적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육체적 고통이란 실제적 또는 예상되는 신체 조직의 손상과 관련된 불편한 감각적 혹은 감정적 경향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대신 아파해 줄 수도 없고, 같은 아픔을 공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별의 고통

 

두 번째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고통을 겪는 것이 죽음 앞에 선 인간들의 공통적인 두려움의 현상이다. 혼자 죽어야 한다는 외로움은 한 생애에서 함께했던 모든 이들과의 안타까운 이별이 명료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떠 올릴 때 말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이야기 한다. 떠나가는 이들 뿐만 아니라 남겨질 이들에게도 이 이별의 고통은 오랜 시간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또 하나의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두려움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에는 많은 준비를 한다. 그 나라의 문화, 언어, 물가, 세세하게 비행기 타는 법, 위급할 때 대처해야 하는 법 등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긴 여행은 다녀온 사람도 없으며 여행 가이드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자신의 종교나 문화 안에서 죽음의 세계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죽음에 대한 무지는 삶을 절대화하고 죽음을 피해야 할 악의 원천으로 만들기도 했다.

 

세 번째는 사회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든 인간은 사회적 생활을 하는 사회적 동물로 살아왔다. 인간 역사가 시작되면서 사회라는 것이 구성되었고 또 그 구성된 사회 안에서의 역할을 하면서 인간은 성장하고 성숙해왔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한 개인의 역사가 끝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한 구성원이 소멸되는 사건인 것이다. 많은 죽어가는 이들, 특히 오랜 시간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임종하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삶이 가족이나 사회에 짐이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고통을 겪는다. 경제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역할에서의 몫을 다하지 못한 것과 그 몫을 다른 가족이 짊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작은 사회인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모두 마치지 못하고 죽어간다는 두려움은 아직 자녀를 출가시키지 못한 가정주부들에게 커다란 미완성으로서의 죽음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소외감과 배신감

 

점점 아프고 병이 들고 죽음에 임박한 시간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자기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아무도 자신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과 의논하지 않는다는 소외감과 배신감을 함께 느끼면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상실하게 된다. 아니 상실 당했다는 것에 대한 고통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내 인생의 성장과 성숙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며 삶의 완성을 위한 활동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삶의 여정을 누구에게도 지지받고 격려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임종하는 이들은 새로운 좌절을 맛보게 된다. 이젠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큰 두려움으로 자리 잡는다.

 

 

인간은 모두 영적존재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데 아주 소중한 존재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공기가 부족하거나 스스로 호흡할 수 없는 상태일 때 그렇게 된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영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이 인류에 단 한사람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동물과 다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외치면서도 실제적인 삶 안에서는 영적인 존재에 대해 간과하면서 살고 있다.

 

시실리 손더스는 영성적 고통이란 무의미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성적 고통은 힘과 희망의 근원이 되는 믿음이나 가치체계의 붕괴를 경험하는 위험한 상태이며 인간의 전 존재에 들어와서 자신의 모든 삶의 원칙을 붕괴시키는 고통이다. 그 원인은 종교적 문화적 결속으로부터의 분리와 믿음 및 가치체계에 대한 도전이다. 물론 이 무의미에 대한 직면이나 삶의 원칙에 대한 도전은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환자, 혹은 임종환자들이 겪게 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족 심지어는 그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겪게 되는 고통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이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회의 일원도 죽어가는 이 앞에서 특히 무죄한 이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는 같은 영적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詩) 에서처럼 우리는 모두 의미가 되고 싶어하며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무의미에 직면하는 죽음이라는 사건은 소멸이라는 두려움을 낳게 된다. 이 두려움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며 동시에 내가 남겨진 자들에게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의미 있게 살았는가,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존재였는가, 사람들에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였는가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 또한 죽음을 부정적 면에서 인식하게 만든다.

 

 

죽음의 극복

 

최근에 본 ‘버킷 라이트’라는 영화에서 죽음의 세계로 갔을 때 절대자는 두 가지를 질문한다고 한다. ‘너는 행복했는가’ ‘너는 타인을 행복하게 해 주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죽음의 순간에 우리 모두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설 때 영적인 성찰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과연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사건일까.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9일, 손영순 수녀(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모현 호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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