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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새로운 시대의 신앙 생활을 위한 제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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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2 ㅣ No.139

새로운 시대의 신앙 생활을 위한 제언들

 

 

사람들의 목마름에 응답하는 신학과 전례

 

사제 생활 30년을 지내면서도 필자는 신앙 생활에 대해 회의와 좌절을 느낄 때가 있다. 신학을 전공하고, 일생 동안 미사 전례를 봉헌했어도, 내 삶이 너무나 참된 신앙에서 멀어져 있음을 느낀다. 물론 필자의 노력이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신학과 전례가 우리 생활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성직자나 신자들을 보아도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노력하여 왔지만 별로 복음적인 사람으로 변화된 것 같지가 않다.

 

인간이 변화되기 어려운 점도 있고 개인적인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교회도 신학과 전례에 대해 부족한 점이 없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대희년을 맞으면서 신학과 전례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를 기대한다.

 

 

1.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신학

 

최근에 이화여대 종교학과 최준식 교수가 쓴 "한국 종교는 망한다"가 종교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한국 주요 종교의 어두운 점을 잘 지적하며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천주교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크게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한국 교회가 너무 로마적이라는 것과, 다른 의견이나 개혁적인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주교 대의원 회의 아시아 특별 총회'와 교회 내에서 이미 여러 차례 나온 이야기다.

 

10여 년 전 여러 나라에서 노동 사목을 하던 신부들이 세미나를 마치고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글의 내용 중 공장의 그리스도와 바티칸의 그리스도는 다르다는 내용이 있었다. 신학이나 전례가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 대학의 교육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 내용은 교황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교회의 통일성을 기하고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좋지만, 신학이 교회 조직만을 위한 것이 되고 민중의 삶과 먼 내용이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전에는 사목하는 데 아무 도움도 못 주는 외국어 특히 라틴어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했다. 이 밖에도 삶에 깨달음을 주거나 사목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을 많이 공부하였다. 그래서 신부가 되어도 구체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말 한마디 하기 어려웠다.

 

1) 신학이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수년 전 다른 나라의 몇몇 주교님들은 그 나라 국민들의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할 신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가령 스리랑카의 농촌 교구에서는 신학생들이 긴 기간 농부들과 함께 일을 하고 그 체험을 서로 나누게 하는 등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을 전하도록 사제들을 양성하였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생활을 통해서 하셨다. 제자들을 양성하실 때도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며 사건을 통해 복음 정신을 일깨워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이 희랍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사변적이고 이론적이며 추상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신자들의 올바른 믿음 생활과 삶을 하느님께 이끌기 위해 신학은 필요하다. 그러나 신학의 많은 부분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보다는 주입하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신학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이 제시되었다.

 

믿는 사람들의 체험과 그들의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학이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남미의 기초 공동체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는 신학을 위해 조금씩 노력하고 있다.

 

2) 완고한 신앙은 질병이다

 

약 3년 전에 스리랑카의 잘 알려진 신학자가 성모님에 대한 글을 발표한 것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면을 받았다. 지난해 다시 복권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에 공감하고 교황청의 처사를 수긍하기 어려워했다. 갈릴레오 사건은 교회 역사에 부끄럽고 명예롭지 못한 흠을 남겼다. 진리의 절대화가 빚어낸 결과였다. 일찍이 헤라클리토스는 "완고한 신앙은 신성화한 질병이다."라고 했다.

 

학문의 발전에서 중요한 것은 반대를 허용하고 토론을 활발히 하는 것이다. 혼란과 분열의 위험이 있지만 민중에게 더 가까이 가고 토착화한 바른 신학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못하게 하면 민중은 우매해지고 지식인들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들은 역사에서 많이 체험하였다.

 

종교인들이 진리를 더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말들을 흔히 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에서 양심이나 복음 정신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주입되고 훈련된 교육에 따라 판단하면 잘못될 수 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런 잘못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비난하셨다.

 

 

2. 미사는 복음적인 잔치


1) 미사에서 멀어져 가는 젊은이들

 

얼마 전 교회 내 대학생들이 외국의 유명한 학자 신부님과 신앙을 주제로 모임을 가졌다. 그때 젊은이들은 왜 형식적이고 생기도 없고 알아듣기도 힘든 미사에 꼭 참석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또 미사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과연 무엇이 중요하냐고 했다. 본당의 학생들도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싫어하고 성당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열심인 사람 중에도 미사를 생기 없고 지루하게 생각하며, 의무감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많다.

 

4년 전 네덜란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유럽 교회처럼 네덜란드 교회도 성당이 텅텅 비어 있었다. 몰락해 가는 듯한 교회에서 어떤 새로운 움직임과 노력이 있는지 조금이나마 살펴보려고 노력하였다. 네덜란드 교회의 일면에 불과할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 건물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미사가 우리와는 조금 달랐다. 사람들이 관심 갖는 주제를 찾아 성서를 읽고, 강론을 하고, 성가를 부르고, 기도문을 모두 한 주제로 작성하여 외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한 가지 메시지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또 신부와 신자 몇 명이 함께 준비하지 않으면 미사를 봉헌하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의 문제와 관심사가 서로 다른 데도 신자들은 성당에서 일률적이고 추상적인 기도를 바치고 성서를 읽고 거기에 관한 강론을 들으면 수동적이고 지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은 사람들을 일깨우시고 살리시는 분이신데 성찬의 전례인 미사도 잔치의 자리처럼 사람들이 더욱 가까워지고, 사람들에게 의미와 생기를 주는 자리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2) 생활을 위한 의식

 

구약성서에서 제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생활을 위한 의식이었다. 예언자들은 이것이 형식과 의식으로만 흐를 때 강력히 비판하였다. 예수님도 식사 모임에서 미사를 시작하셨고 제사보다는 잔치의 성격을 강조하셨다. 신학자들은 미사가 제사의 성격을 띤 것은 신학적인 동향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루터를 반박하는 데서 강조되었다고 한다.

 

많은 나라에서 미사와 전례를 각기 고유한 문화와 의식에 맞게 토착화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토착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같은 주제와 기도를 바치는 미사도 좋지만, 잘못하면 사목자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닿고 더 하느님께 가까워질 수 있는 전례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며 모였는데 사제는 강론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규정대로 했으니까' 하는 생각에 어떤 반성도 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1980년대 중반에 유럽 주교들의 대의원 회의가 있었다. 그때 특별히 서구 교회가 텅텅 비게 된 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반성하는 내용이 많았다. 여기서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 것이 바로 교회가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에 무관심하고, 내려오는 교회 관습대로 사목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황상근(인천교구 삼정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도 생활의 쇄신을 위한 제언

 

새로운 천년대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미래를 잔뜩 꿈꾸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새로운 천년기를 맞는 우리의 마음은 설렘과 호기심으로 들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생성되고, 성장하고, 변화해 온 수도 생활에도 새로운 시대를 맞아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한다. 새로움에 대해 적응과 쇄신을 못한다면 소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수도자들도 이 때를 쇄신과 도약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아 가지치기를 할 필요가 있다. 수도 생활에서 양보할 수 없는 근원적인 요소는 무엇이며, 부수적이어서 과감하게 고치고 버려야 할 요소는 무엇인가? 전환기에 있는 '오늘'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게 하며 잠재력을 발휘해 미래를 꿈꾸게 한다.

 

우리는 오늘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지 진지하게 질문하며,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한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수도자로서 고민하는 문제를 짧은 지면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수도자의 '구별'증

 

많은 수도자들은 하느님께 봉헌되었다는 자부심 때문에 평신도들에게 우월 의식을 가지면서도 인간적인 면으로는 열등 의식도 갖고 있다. 그래서 평신도를 대할 때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그들과 구별하여 우월하게 여기고 '비밀', '봉쇄' 등의 용어로 폐쇄적인 사고를 정당화하거나 수도 생활 자체를 신비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수도 생활은 자매 형제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기 때문에 '구별', '비밀', '봉쇄' 등의 은폐적인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폐쇄적이고 배타적이기보다는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폐쇄적 사고 때문에 말끝마다 '평신도'를 붙이거나, 평신도 교우들을 대할 때와 수도자나 성직자를 대할 때의 태도가 다른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또 수녀들은 이러한 위계적인 사고 방식으로 같은 수도회 안에서 수련자와 유기 서원자, 종신 서원자의 서열을 지나치게 구별하고 서열이 낮은 사람을 아랫사람 대하듯이 하는 경우가 많으며 다른 수도회 소속 수녀들까지도 서열에 따른 우월 의식이나 편견을 갖고 대할 때가 많다.

 

수도자의 '미루기'증

 

수녀 각자가 주체성과 책임을 가지고 결정하거나 답변할 수 있는 경우에도, 곤란한 일은 순명의 이름으로 장상에게나 남에게 미루는 경우가 많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볼 때 분명히 성인인데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또 혼자 외출하거나 행동하는 일이 적고 단체로 움직이는 일이 많아서인지, 내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다를 때 불필요하게 불안해하고 쉽게 자기 생각을 포기해 버린다.

 

또한 개인보다는 단체를 우선하는 특성 때문에 공동체에서 독특한 성격을 가졌거나 행동 양식이 다른 회원을 받아들이는 폭이 좁은 것 같다.

 

수도자의 '경제 개념 초월'증

 

수도자는 보통 개인 소유물이나 용돈을 갖지 않는데, 이 때문에 세상의 재물에 초탈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에 함께하지 못하게 만든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을 만큼 독립적이어야 하며 현실의 필요에 정직하게 직면하고 필요한 것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특히 가족 방문이나 특별한 공부를 할 경우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수도자들의 '다행'증

 

불행이나 고통이 닥쳤을 때 그에 맞서 고통의 깊이를 파헤치려는 힘이 약하다. 잘못의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쉽게 하느님의 뜻이라고 단정해 버리거나,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식의 해결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수도자에게 절박한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이 세상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을 펼치시는 구체적인 현장이라는 역사 의식을 가지고 삶을 좀더 진지하고 철저하게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수도자의 '위하여'증

 

수도자들은 쉽게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너(너희,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이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남의 처지를 생각해 주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우가 많다. 한편 남의 필요를 들어주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의 필요를 간접적으로 충족시키기 때문에 자기의 필요가 무엇인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참다운 겸손도 아니고 양보도 아니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또 악과 거짓의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만 심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또 남을 위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할 수 있다.

 

수도자의 '비밀'증

 

우리 나라 대부분의 수도회는 활동 수도회인데도 수도회 구역을 봉쇄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역 공동체와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본당에서도 수녀원 구역은 봉쇄 구역으로 정하여 특정한 사람의 출입만을 허용하는 묘한 구분을 하고 있다.

 

새로운 천년대는 평신도들과 더불어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봉쇄의 진정한 개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지역 주민과 좀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수녀들의 '거룩'증

 

우리 안에 깊숙이 내재한 이원론적 사고 방식은 성과 속을 지나치게 구별하여 수도자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수도자가 병이 나서 입원할 때 독실을 요구하거나 여행 중 독방을 요구하는 것이 수도복을 입기 때문에 정당화되지만 가난을 사랑하는 수도적 삶과는 맞지 않다. 수녀원 안에 수영장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수녀들이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에 가는 것은 수도 정신과는 동떨어진 문제일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기에 좀더 유연성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승려들은 공중 목욕탕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또 보는 사람도 자유롭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우리의 사고 방식에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성과 속을 구별하지 않고 통합할 수 있는 전인적인 사고 방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수도복은 회원간의 평등 의식, 기도 분위기 조성, 수도 생활에 대한 증거 등에서 장점이 많지만, 일반인과 구분하거나 특별 우대를 기대하게 한다는 면에서 불편한 점도 많다. 수도 생활에서 복장은 근본이 아니고 방편인 만큼 유연성이 있으면 좋겠다. 등산이나 소풍, 여행의 경우만이라도 자유로운 복장을 할 수 있다면 수도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례 화려'증

 

전례는 역사적으로 수도회들 안에서 혁신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거행되어 왔는데 오늘날 한국 수도회들은 전례에 대한 쇄신보다는 고수하려는 경향이 짙어 창의성이 크게 떨어진다. 시간 준수에 얽매인 성무일도는 사도직의 성격상 시간에 제약을 받는 분야가 많이 있는데도 이런 배려가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교회 전례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생동감 있는 전례로 나아가는 데도 소극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전례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보다는 전례가 거행되는 장소를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중시하는 우리의 태도는 쇄신의 여지가 많다고 본다. 또 전례를 위해 지나치게 화려한 꽃꽂이를 할 때가 많은데, 이 소비적 행위는 자연을 농약으로 오염시키는 생태학적 위협이기도 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전례를 하기 위해 시작된 구유가 몇 백 년이 흐르면서 의미보다는 전통으로 답습되고 있다.

 

'옳소'증

 

수도자는 옳은 일을 옳다고 하고 잘못된 일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강론 중이나 강의를 통해 잘못된 말을 일방적으로 들었다면 항의할 수 있어야 한다. 경직된 위계 질서가 있는 교회가 아니라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판적이고 예언자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장상에게나 사도직 현장의 윗사람에게 지위의 높낮이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려는 더 넓은 의미의 정의 개념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순명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수도회 내부에서, 교회 내부에서 같은 선상에서 대화를 할 수 있기 바란다. 뿐만 아니라 수도자는 사회에 대해 예언자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 현대 세계에서는 수도회간의 협력뿐 아니라 타종교의 지도자들과 함께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식적, 외교적인 유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함께 협력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위기는 분명 도약을 위한 좋은 기회다. 수도 생활의 재창건이야말로 새로운 교회상을 만들어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 현대 세계의 필요에 응답하고 세상을 변혁해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우리 안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참된 수도 생활을 가로막는 의식이나 관행을 타파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 나의 고찰은 수도자 전체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수도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녀들의 입장에서 말하게 된 것 같다. 우리의 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치유가 스스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혜영(가톨릭 대학교 교수, 성심 수녀회)]

 

 

희년과 평신도 신앙 생활의 정체성

 

지난 세기의 교회와 세상을 돌아보며 신앙의 본질을 생각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분명 은총의 역사를 의식하면서도 인간에 의해 왜곡되는 현상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합리화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도, 식별의 정신 안에서 빛과 어둠을 구별하고자 노력할 때만이,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뜻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교회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제삼 천년기를 바라보며, 이런 차원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접근해야 할 부분이 세속을 사는 신자들에 대한 것이다. 특별히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이는 절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교회적으로, 영성적으로, 구조적으로, 우리에게는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

 

 

1. 교회적 차원

 

한국 교회의 상황 안에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대로 본당과 통한다. 이 본당 중심의 교회관이 지나친 나머지 우리 신앙 생활의 모든 것이 본당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의식이 신자들을 세상과 유리되게 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이원적인 세계관과 중세적 교회관을 가지게 하는 단초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초의 선물은 예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이다. 창세기 2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분은 세상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헤아리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간의 언어와 행동 양식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읽어 가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기념하며 따르고자 세워진 교회는 오히려 이렇게 세상 속에 자리잡는 데 기여하는 책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예로 하지 않더라도, 교회의 세속적 차원에 대한 이해가 우리 교회에는 너무 부족하다. 교회의 본질은 모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흩뿌려지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세속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또 다른 관건이다. 구차하게만 표현되기 쉬운 우리 삶의 일상들이 성사적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세속을 사는 신자들이 모두 자신이 선택한 길이 성소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 속의 교회를 이루는 것은 현 본당 체계로는 불가능하다. 더욱 작은 교회를 이룰 때 우리는 세상 속에 실제적으로 '끼여들' 수 있다. 그 동안 본당이라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하던 신자들은 이제 더욱 근본적인 교회적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펼쳐진 거대한 성서이고, 아름다운 성전이며, 거룩한 성사가 펼쳐지는 장이기 때문이다.

 

 

2. 영성적 차원

 

우리 교회의 위기는 근본적으로는 영성의 빈곤에서 비롯될 것이다. 영성이라 함은 개별 신자들이 고유하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실제적 힘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자들이 영성과 신심을 혼동한 나머지, 무지막지한 믿음 고백이 무조건 신앙 생활의 핵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영성은 내 기도와 삶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이다. 끊임없이 내 삶 속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조율되고 그것이 다시 삶 속에서 살아나는 가운데 쌓이는 '실천적인 지혜'가 영성인 것이다. 이것이 광신과 맹신의 늪을 피해 가게 하고, 주술적 기대를 경계하게 한다.

 

교회의 체험 안에서 볼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빈곤의 싹이 튼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전통 안에서 세워진 소리 기도들을 맹목적으로 읊는 것에 익숙해 있다. 성서를 가지고 하는 기도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이 수십 년 신앙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럴진대, 세상 속의 자기 삶을 복음의 정신 안에서 돌아보며 끊임없이 생활을 실제적으로 개선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이겠는가. 삶은 기도의 연장이다.

 

이런 차원에서, 신앙을 감성적 태도로만 바라보기보다, 이제는 지성과 의지도 동원하는 영성 생활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예수님의 합리성이 복음을 읽어 가면서 의식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이를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는 듯하다. 식별의 힘에 근거하는 이성적 태도는 분명 우리의 신원을 강화시키면서 신앙과 삶, 그리고 교회와 세상의 통합을 이끌어 가는 중심축이 될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기도는 우리 신앙의 출발이면서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불이 지펴져서 한평생 세상을 밝히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영성은 이를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다. 그 누구에게보다도 특별히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을 지키며 보듬고 살아가야 할 세속 신자들에게 영성 생활은 필수적인 것이다.

 

 

3. 구조적 차원

 

교회를 이루는 신자들의 구분이 역할의 차이에서만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 여기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와 삶에서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교계 질서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편견에서 비롯한다. 교회는 교회 직무를 맡은 신자들과 수도직을 사는 신자들의 책임 아래 있고 그 나머지는 그들에게 보조적인 의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이유는 세속의 삶이 이들보다 열등한 삶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의식이 자신들의 삶을 신앙 안에서 진지하게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 교회는 세속에서 사는 신자들의 자발적 염원으로 세워진 놀라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신분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관계를 맺어 간 과정은 진정 은총의 힘이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오늘날에는 많이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다. 본당을 중심으로 한 우리 교회의 신자들의 교회 생활은 계급적 질서 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토론보다는 지시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거의 일방적인 것이 보통이다. 이는 신자들 스스로 파놓은 함정이다. 이러한 수동성이 책임을 면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속 신자들의 무책임성이 더욱 부각되고, 그러한 구조의 악순환을 강화시킨다.

 

교계 질서 부분은 또 다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즈음에 해야 하는 것은 적어도 신자들의 위상이 상호 평등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세속에서 사는 신자들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적 영성적 차원에서 자신의 신원에 합당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일이며, 그들도 자신의 신원에만 충실하도록 하는 데 도전이 되게 한다. 부족한 인간들이 함께 사는 데 상호 견제와 도움이 없이는 누구도 성장할 수 없다. 교회의 일방성이 상호성으로 바뀔 때, 우리는 공동체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4. 희년(禧年), 희년(戱年)

 

새로운 천년기를 평신도의 시대로 천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언은 구원의 역사 안에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그만큼 절박하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이것이 필연적인 흐름인지를 질문하면 지극히 자위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이 가르침이 어떠한 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순리에 근거하는지는 알지 못한 채, 한국에서는 교회의 생존과 사회적 지분의 확대를 위한 전략적 차원으로 오히려 왜곡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한다.

 

전체 교회는 2천 번째 생일을 맞아 갖가지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정말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희년은 물리적 시간인가?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주술적 신비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조명 아래 이루어진 인간의 노력 없이 어떻게 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교회의 가르침대로 세속의 신자들의 회심과 결심이 없이 새로운 세기의 교회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희년은 축제가 아니라 사건이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지난 2000년의 은총에 감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고자 하는지를 식별해야 하는 시간을 맞아야 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통회하는 자리여야 한다. 이것이 총체적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고백될 때 사건인 것이다. 그것이 몇 년이 걸리든 기다리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세상은 진심으로 회심하는 교회의 모습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전횡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것 같은 교회가, 새로운 세기에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가 거기에서 찾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봄이 오면 꽃은 피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꽃이 피면 곧 봄이다. [김광엽(전 서강 대학교 대우 교수, 문학)]

 

[사목, 199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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