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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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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34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영성

 

 

1. 시작하면서

 

금번 [사목]이 시대 상황과 관련한 가톨릭 영성의 흐름을 주제로 삼으면서 한 시대를 살아간 영성가가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 사회에 어떤 변화와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루려는 시도는 대단히 좋다고 본다. 이는 일찍부터 교회가 “교회는 언제나 쇄신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라고 주장하고 가르쳐 온 내용과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하겠다.

 

가톨릭 교회의 2천 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영성가들을 접하게 된다. 필자는 평소에 그리스도교의 영성 역사를 연구하면서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대하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단지 과거사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건들은 나의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하기도 한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처럼, 이번 호의 주제는 과거를 교훈 삼아 현재를 더 잘 살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라는 유훈처럼 느껴진다.

 

여기 소개하는 성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위대한 영성가이다. 그의 영성은 너무나 강렬하여 중세기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관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으나 필자는 그레고리오 1세를 교황 264명 가운데서 특히 그레고리오 7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과 대등한 선상의 인물로 보고 싶다. 성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워낙 위대하여 역사는 그를 대(大)그레고리오(Gregorius Magnus)라고 부른다.

 

 

2. 시대 상황

 

폰테 밀비오 전투에서 승리한 사령관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 자유를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약 3백 년간의 긴 박해가 끝났다. 이리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회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하 무덤 카타콤바에서 태양이 빛나는 지상으로, 사막과 산에서 더 이상 숨어 살지 않고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교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도 예배당을 세우고 성사 생활을 지도하며 전례를 제정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국가와 교회가 서로 협력하기 시작하고 박해 이전 이교도들이 누리던 특권과 특전이 서서히 교회로 넘어오면서 교회 지도자들의 지위가 상승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신분 상승과 지위를 바라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이 시대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불안한 시대라 로마는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때 복잡했던 로마의 행정 조직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황제도 사라졌다. 학교는 문을 닫고 치안을 담당하던 군인들과 관리들도 사라지고 공공 시설은 파괴되었다. 야만족들의 이동과 전쟁으로 피해자들과 극빈자들의 수효가 늘어나고 아름다웠던 평야가 황폐해지자 백성들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6세기 후반에는 롬바르인들이 로마를 점령하여 백성의 불안은 더해졌고 교회도 자치적으로 교황을 뽑지 못하고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교황으로 선출되어도 야만족들의 왕들과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교황좌에 오를 수 없었다. 적어도 제60대 교황 펠라지오 1세(재위 556-561년)부터는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만 교황좌에 오를 수 있었다. 제61대 교황 요한 3세(재위 561-574년)는 4개월, 그 다음 교황 베네딕토 1세(재위 575-579년)는 1년을 기다린 후 주교로 성성되고 교황좌에 오를 수 있었다. 제63대 교황 펠라지오 2세(재위 579-590년)는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주교로 성성되었다가 불이익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부제 그레고리오를 동로마에 파견하여 그 실수를 설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주교인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는 세계 총주교(Ecumenical Patriarch)라는 칭호를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교황 펠라지오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어 요한 4세 총주교가 서명한 공의회의 결정을 거절하였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아퀼레이아의 총주교와 베네치아와 이스트라의 주교들은 로마와 친교 맺기를 거절하고 있었고 라벤나의 비잔틴 총독은 여러 가지로 교황을 간섭하고 있었다.

 

사회 정치적 상황이 이러하였으니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사제들의 삶도 안정적일 수 없었다. 사회의 분위기가 그리스도교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아가자 명목상의 신자가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미신과 이단적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비그리스도교적 생활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되었다. 일반 평신도들의 생활만 이런 것이 아니라 요즈음과 같은 신학교 제도가 없었으니 성직자들 중에도 무자격자들이 있었고 세속적인 출세나 욕망을 위하여 성직에 입문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등지에서는 교리 학교에서 사제를 양성하였으나 본당이나 주교관에서 양성되는 경우도 아주 많았다. 대부분의 사제들의 삶이 훌륭했다 하더라도 교회의 상황이 이러했으니 영성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자격 있는 사제들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외부적인 교회의 세력은 확장되고 있었으나 복음의 정신이 일반 생활에 뿌리내리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위대한 성인 베네딕토(+547년)가 출현하여 조직적인 수도 생활을 시작한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로마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성인 베네딕토는 수비아코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후 몬테 카지노로 옮겨 수도원을 세우고 영성의 불을 지펴 교회에 큰 활력소와 희망을 주었다.

 

 

3. 교황 대그레고리오의 등장

 

이런 복잡한 시기에 이미 두 교황(펠릭스 3세와 아가비토)이 배출된 로마의 명문가 파트리치우스 가문(familia patriciana)에서 그레고리오가 출현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권유로 공직 생활을 위해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신심 깊은 모친과 숙모의 도움으로 신심 생활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 로마의 지방 장관(praefectus)이 되어 원로원 의장, 로마 시의 재정, 국방, 보급 등의 일을 책임졌다. 이로써 책임감과 공무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5년 동안의 짧은 공직 생활을 끝내고 수도자로 살기 위해 사저를 수도원으로 개조하고 매일 묵상과 기도 그리고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하면서 수행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레고리오가 베네딕토회 수사였다는 판단은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레고리오는 성인의 규칙서를 읽고 이를 참조하여 생활을 그런 식으로 조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는 라틴 교부들의 문헌과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였다. 그리고 위장병을 앓을 정도로 지나치게 고행을 하였다고 하니 그의 수행 생활이 어떠하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관상적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교회의 부름을 받아 부제로 서품된 후 콘스탄티노플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교회의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말은 몰랐으나 해박한 지식과 공직 생활의 경험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함께 수도 생활을 하던 수사들을 대동한 그는 동방에서도 수도자로 살았다. 그리고 주위의 위대한 영성가들, 특히 세빌레의 랜더와 가까이 지내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구약성서의 욥기에 대해 강론하였다. 후에 이 강론집이 [도덕론](Moralia)이란 제목의 위대한 저서로 남게 되었다.

 

15년 동안 외교 사절로 지내다가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바라던 수도 생활을 하지 못하고 교황 펠라지오 2세의 명을 받아 그의 고문으로 일하였다. 주로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에서 교황 비지리오가 삼장서(Kephalia)를 단죄한 이래 이스트리아 주교들이 로마와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3년 후 589년 테베레 강의 범람으로 교황 펠라지오 2세가 변을 당해 서거하자 그레고리오는 로마 시민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그의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그 직무와 영예를 받지 않으려 하였다. 문헌을 볼 때 이 점에서 그는 진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고 라벤나의 교구장 요한 대주교가 꾸중을 하면서 직무를 받아들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Registrum은 “그는 괴로운 심정으로 영예의 짐을 떠맡았으며, 너무 슬퍼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의 영혼의 눈은 슬픔으로 어두워졌다."1)라고 기록하고 있다. 교황좌에 오른 후 그는 요한 대주교에게 [사목 규범]2)(Liber Regulae Pastoralis)이라는 책을 써서 답신 형식으로 보내었다.

 

그는 교황이 되었으나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교황좌에 오른 그는 동방 교회의 총주교들에게 짧은 신앙 고백문과 함께 전체 교회를 위한 높은 이상과 사제 직무를 언급하는 사목적 서신을 보냈다.

 

 

4. 교황의 활동

 

1) 정치적 활동

 

이때는 민족 대이동에 따른 야만족들의 침입과 동로마와의 관계를 해결하는 과제가 교황을 괴롭히고 있었다. 568년부터는 이탈리아 북쪽에 롬바르인들이 침입하여 그곳에 왕국을 세우고 로마 근처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공작들을 세워 로마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교황은 롬바르드의 아길루프 왕을 만나 회담한 후 그들의 침입을 막았다. 교황이 롬바르드인들과 행한 교섭은 장차 교황을 실제 로마의 군주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로마의 황제도 라벤나의 총독도 교황을 돕지 않았다. 이에 교황은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황제의 도움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바라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뒤에 롬바르드 왕국은 로마의 문화에 서서히 동화되었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해 피핀 왕에게 정복당하고 황제의 기증으로 교황 영토가 되었다.

 

2) 교회의 전례

 

복잡한 상황에서도 교황은 전례를 성대하고 신심 있게 거행하기 위하여 전례를 만들고 성가와 기도문을 제정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사 예식서(Sacramentarium Gregorianum)가 전해지는데, 이는 590-604년의 교황 재위 중에 시작되어 교황 하드리아노와 대학자 알퀸(+804)의 시대를 거쳐 11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교황은 미사 중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와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Christe eleison)를 주례 사제와 회중이 성가로 응답하게 하였고 알렐루야는 참회 시기를 제외하고 항상 사용하게 하였다. 복음을 노래로 읽는 것은 부제에게 위임되었고 강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미사의 기도문(로마 전례문의 감사 기도-현재 제1양식)에 다음 기도문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 온 가족이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저희를 한평생 평화롭게 하시며 영원한 벌을 면하고 뽑힌 이들의 무리에 들게 하소서."를 첨가하였다. '주님의 기도'도 교황의 지시로 현재 미사의 그 자리에 놓이게 되었고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성가를 집대성하여 정착시킨 그레고리오 성가(Cantus Gregorianus)는 교황의 큰 업적으로 여겨진다. 성음악(musica sacra)의 중요성을 인식한 교황은 성가단 학교(schola cantorum)를 신설하여 육성하였다. 이 밖에도 미사의 감사송들과 여러 기도문들도 교황의 업적이다.

 

3) 동방 교회와의 관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에 종교의 자유를 준 이후 그는 가톨릭의 박해자인 갈레리오 황제에 대한 증오심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이 국가의 반역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교회를 지원하였으며 정치적인 안목으로 로마 제국의 통일과 강화를 위하여 국가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지역을 순회한 후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수도로 삼고 330년 5월 11일 봉헌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교회는 로마 제국의 힘을 받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324년 말에 있었던 제1차 공의회를 황제가 소집하였던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힘이 강해져 로마와의 관계가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황제를 이교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지상에서 하느님의 권력을 대신하는 자로 여기게 되자 정치 종교적인 문제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이 도시의 총주교는 황제의 조언자와 보좌관이 되었고 로마 주교와 상치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노 황제의 재가하에 발표된 헤노티콘이다. 이를 승인한 단성론자 총대주교 아카치우스를 교황 펠릭스 3세가 파문하기로 결정하자 484년에서 519년 사이 동방과 서방 교회는 한때 분리된 듯하였다. 아직까지 훔베르토(Humberto) 추기경이 교황 사절로 이 도시에 파견되어 이곳의 총주교 체룰라리우스를 파문하기까지는(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 5백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동방 교회와 일어난 복잡한 문제의 서곡일 따름이었다. 황제가 교회를 간섭하기 시작하자 로마 교구장에 선출되어도 황제의 허가 없이는 교황좌에 오를 수 없었다. 라벤나 총독과 황제는 롬바르드인들이 이탈리아 북부를 침입했을 때 교황이 도움을 청했으나 전연 개의치 않았다. 교황은 정치적으로 고독하였다.

 

교회 내적인 문제도 정치적인 문제만큼 심각해져 갔다. 콘스탄티노플의 요한 4세 주교가 황제의 힘을 업고 자신을 최고 총주교로 칭하자 교황은 “하느님의 종들 중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대항하였다. 후대 교황들도 이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는 교황청은 모든 교회의 머리이며 전체 교회의 관심과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교회의 머리이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좌도 교황좌에 예속되어 있으며 로마의 주교좌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주교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태도를 분명히 한 교황은 로마의 주교좌는 모든 교회들 위에 세워져 있고 각 교구는 각 지역에서 사목권을 행사하되 형제 주교들은 로마의 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4) 기타 교회와의 관계

 

그 당시 교회 사정은 이탈리아에 교구 셋, 갈리아에 교구 둘, 그리고 동방의 일리리쿰으로 되어 있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로서 토스카니아 남부에 이르는 교회의 모든 활동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주교의 선출을 법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었으며 궁핍할 때 지원해 주었다. 주교에 대한 고발은 로마에서 직접 재판하였다. 주교들은 해마다 로마에 모였다. 시칠리아의 주교들은 3년마다 로마에 가다가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아 5년에 한 번씩 로마에 가게 되었다. 로마 밖의 수좌 교구는 밀라노, 아퀴레이아(베로나, 트렌트, 폴라 지역), 라벤나(이탈리아 동북쪽 아드리아 해안 근처)였다. 그 지역에서 이스트리아 주교들은 로마와 분열 상태로 남아 있다가 여러 주교들이 교황과 화해했으나 완전한 화해는 교황의 서거 후에 이루어졌다.

 

교황은 아프리카 교회와의 관계에서 도나티즘(Donatismus)을 경고했다. 스페인의 교회와 좋은 관계를 맺었고 593년 아르레스의 교회와 관계를 정상화시켜 프랑크 왕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메로빈지안족들이 여러 분파로 갈라졌으나 통치자들은 교회를 서로 자기들의 교회라고 주장하였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다. 교황은 갈리아 교회의 주교들과 군주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내어 성직 매매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 특히 평신도들의 서임을 금지시켰다. 또한 그는 영국 교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앵글로 색슨족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으나 590년 켄트 왕 에테르베르트가 파리 왕의 공주이며 가톨릭 신자인 베르타를 왕후로 맞이했다. 왕후는 프랑크의 주교 한 분을 데리고 갔다. 이에 그리스도교의 싹이 튼 영국에 교황은 자신이 시작한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사들을 선교사로 파견했다. 책임 수사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동료 40명은 열심히 노력하여 1년 후 에테르베르트 왕을 개종시켜 서서히 가톨릭 국가로 변모시켜 나갔다. 이리하여 영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어 2개의 대주교좌와 12개의 작은 교구를 두게 되었고 캔터베리 교구가 수좌 교구가 되었다.

 

5) 구제 사업

 

교황은 명문가 출신이라 부유하였다. 사유 재산과 교회의 재산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갈리아, 아프리카와 일리리쿰(유고슬라비아 일대)에 걸쳐 있었다. 교황은 그 토지의 지주였고 수입은 교회의 유지와 필요에 사용하였다. 교황은 재산 관리를 철저히 하여 부정을 막고 극빈자들과 전쟁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전쟁 포로 구제를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각 지역의 재산 관리자들에게 지시하여 늘 가난한 이들의 구제에 힘쓰게 하였다.

 


5. 저술가로서의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저술가로도 명성이 높다. 그는 이론적인 면보다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주제들을 다루었다. 복음에 관한 강론 40편, 에젤키엘서에 따른 강론 20편, 아가서에 관한 강론과 욥기를 주석하여 신앙인들의 윤리 생활을 정리한 [도덕론],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 영혼의 불멸에 관한 대화집을 저술하였다. 특히 이 책에서 교황은 자신과 부제 베드로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성인들의 성덕과 기이한 일을 찬양하고, 인생의 고귀함은 성덕으로 평가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성인들 안에서 하시는 놀라운 일과 죽음을 다루면서 영혼의 불멸과 천당, 연옥, 지옥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황의 서한(850통)을 모은 14권의 책은 교황 재위 중에 일어난 일들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6. 교황의 영성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중책을 맡은 그가 가중한 사목직을 수행하면서도 큰 일들을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역사는 그를 건강에 문제가 많았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는가? 영성 신학은 이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한다.

 

1) 관상 생활은 활동 생활보다 앞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활동(actio)과 관상(contemplatio)으로 나눈 이중적 생활 분리는 완전하지 못하지만 한때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관상한 것을 활동으로 옮겨 사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보낸 시간, 곧 기도의 결과를 활동 안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혼합 생활(vita mixta)이라 하였고, 천사적 박사는 관상한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contemplata aliis tradere)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받고 배운 사랑을 일상 생활 속에서 전하는 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삶의 모범을 우리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삶에서 보고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저서에서 다시 한번 이 영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활동 생활보다 관상 생활을 더 우위에 두었다. 그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역을 다루면서 마리아를 칭찬하신 주님의 말씀에 역점을 두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루가 10,41-42). “관상 생활은 공로에 있어서 활동 생활보다 더 위대하다. ...... 활동 생활도 좋지만 관상 생활이 더 좋다."3) 이런 사고는 늘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과 그 생활에서 얻은 영적 체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래 그는 공직 생활을 끝내고 회개한 다음 자발적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했으나 교회의 권위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 생활을 지속하지 못했다. 또한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므로 더 더욱 수도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는 관상 생활을 다루면서 먼저 영성 생활의 발전을 언급한다. 제1단계는 악습과 싸우고 사욕편정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단계이다. 이는 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내적 싸움(bellum cordis, 心戰)을 전제하는데, 결과는 생활 개선으로 드러난다. 제2단계는 수행의 단계로서 특별히 윤리 덕행을 닦는 과정이다. 그의 주장은 신학적 덕행이 우선이지만 윤리 덕행이 없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므로 윤리덕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성령의 이끎에 따라 완성으로 향해 나아가는 단계이다. 성령은 성화의 원동력이므로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은 영의 이끎에 자신을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영적 완성을 향한 일곱 단계는 성령의 은사에 따라 발전된다.

 

이런 영성 원리를 제시한 그는 그리스도인 계층에 맞는 생활 신분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이 구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아직까지도 교회의 생활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 시대의 수도자는 생활 자체가 관상 생활을 하는 신분이다. 평신도와 성직자는 활동 생활에 종사하는 신분이다. 그러나 세 신분 모두 정도에 따라 더 많이 또는 적게 관상에 시간을 바칠 수 있다.4)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관상기도에 더 매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본성과 기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관상기도는 신분이 매우 높은 이들에게 주어지고 낮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이나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 또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도 주어진다. 심지어는 혼인한 사람들도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어떤 신분도 관상기도에 예외적이지 않다. 누구든지 자기의 마음을 수직하고 관상의 빛에 의해 조명을 받는다면 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현실을 보면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이런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이 기도의 염원을 가지고 살아갈 때 특별한 은사를 받는 경우가 있다......."5)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관상할 수 있는가?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정신적 기도(묵상이나 관상 기도)에 관심을 두는 이는 구원의 길을 따라 그리스도를 중개자, 모범, 구원자로 여기고 그분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도록 권고한다. 그 신비들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 인성으로 당한 고통들과 영광들이다.6) 하지만 인간의 구원 업적은 성령에 의해 완성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신 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은 뛰어난 선물 자체이며 일곱 가지 은사를 통해 각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므로 이를 통해 인간은 두려움을 넘어 지혜를 얻고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여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7)

 

2) 활동 안에서 관상의 결과가 드러나야 한다.

 

비록 교황이 관상 생활을 우위에 두었지만 관상의 결과가 활동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잘못을 교정하고, 교만한 이웃에게 겸손의 길을 제시하며 병자들을 돌보고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각자의 책임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것 등"8)이 여기에 속한다.

 

선행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활동 생활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이것은 윤리덕의 실천이다. 신학덕은 관상기도에서 나오며 공로를 쌓는 덕이므로 윤리덕보다 높다.9)

 

그는 활동 생활은 관상기도를 위한 준비 단계라고 보았다. 관상한 결과를 활동 안에서 드러내기도 하지만 활동 중에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도 안에 집합시켜 하느님과 함께 궁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관상 생활로 나아가야 하는데 활동 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관상 생활에 도달한 이도 이웃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선행을 단념하지 않는다."10) 그러므로 그는 사랑의 계명을 이중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활동 생활은 관상 생활을 위한 준비의 구실을 하고 또한 관상기도의 결과로 보았다. 따라서 마리아의 역을 칭찬하였으나 결코 마르타의 역을 배척하지 않았다.

 

3) 그리스도인 생활 신분 구별

 

그레고리오 교황의 재임시부터 8세기까지 그리스도교는 전 유럽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앵글로 색슨족, 프랑크족, 롬바르드족, 비시고트족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문화가 소개되었다. 이제까지는 특별한 지침이 없었으므로 교황의 가르침은 그대로 수용되었다. 이를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 갔다. 그것은 서서히 각 민족의 상이점들을 벗어나 하나로 묶는 가톨릭 신앙이었다. 그 중심에 교황이 있었다. 강력한 전통 문화가 없었던 야만족들에게는 가톨릭의 가르침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교회의 가르침과 수도원의 전통들이 서서히 유럽 전역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 시대의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 학문적 원천이 풍부하지 않았다. 수도원을 통해 기도의 실천, 수행 생활의 안내 등이 간헐적으로 알려졌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가르침만큼 힘있게 전해지지는 못하였다. 이 시대의 탁월한 학자들이었던 세비야의 이시도로와 베다 성인들은 모두 그레고리오의 저서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은 각 신분에 맞는 영성적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수도자는 일생을 주님께 봉헌한 신분으로서 주로 관상기도에 시간을 바치는 이들이다. 평신도에게는 두 계층이 있다. 첫째 계층은 통속적 생활(vita popularis)을 일삼는 이들이다. 이들은 세례 받기 전에 신앙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는다. 그것은 기도 생활, 혼인의 신성함과 목적, 불가해소성, 그리스도인의 의무 등을 교육받고 수시로 사제들의 강론과 가르침을 듣긴 하나 신앙 생활과 지식이 초보적이고 과거의 악습을 버리지 못해 미신과 같은 세속적인 생활을 즐기는 이들이다. 이들은 보통 신자들일 뿐이다. 그러나 열렬한 평신도들(Christiani ferventes)도 있다. 이들은 과거의 생활을 참회하고 회개한 다음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수도원 주위로 자주 모여들고 수도자들의 기도(성무일도나 축소된 소성무일도)를 함께 바치며 고행에도 관심을 가지며 수덕 생활에도 힘쓰는 이들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속세의 삶을 살지만 삶을 성화시키려는 이들이다.

 

성직자들은 활동에 종사하는 이들이다. 이 시대의 성직자들은 혼란과 정비의 시대를 살고 있었으므로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들에게 적절한 삶의 교육이 필요했다. 이를 절감한 교황은 이들에게 맞는 영성 가르침을 베풀었다. 대표적인 지침서가 [사목 규범]이다.

 

원래 이 책은 교황직 수락을 거부한 그레고리오에게 라벤나의 요한 대주교가 꾸중을 했으므로 교황직에 오른 후 그에게 교황직을 거절한 이유를 답신 형식으로 쓴 것인데, 21세기를 사는 오늘에도 성직자들에게 불멸의 명작으로 남아 영향을 주고 있다.

 

우선 이 책은 그 시대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세비야의 주교 랜더는 이를 스페인 교회에 전하여 성직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아일랜드의 수사들과 주교들에게 전해져 큰 호응을 얻었다. 영국에도 전해져 9세기경 알프레드 대왕은 고대 영어로 번역하여 목자의 책(Shepherd's Book)으로 불렀고 주교들에게 분배하여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생활 개선을 위한 자료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사목 규범]은 후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사제직(De Sacerdotio)은 그 내용이 [사목 규범]과 비슷하며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조도 영향을 받았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책을 늘 가까이 두고 읽었다는 일화도 있다. 필자는 이를 사목자들을 위한 목민심서(牧民心書)라고 생각한다.

 

[사목 규범]은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핵심은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한 사목자의 덕행이다. 깊은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영성의 특징인 관상기도이다. 사목자는 교회의 직무를 위해 성품되므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태도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깊은 기도로써 얻는다.

 

제1부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특성들을 엄밀히 연구함으로써 사목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통치는 예술 중의 예술이다. 유능한 의사가 중병을 치료하듯이 영혼을 돌보는 사람도 특출한 덕으로 뛰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사목직의 외적인 영예만을 추구하여 그 자리에 오른 자는 덕행이 부족한 사목자이므로 멸망으로 나아갈 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깊은 기도(묵상과 관상)에서 얻은 체험을 삶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교회의 중요한 직책을 맡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11) 목자는 반대자들도 만나며 직무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질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목자의 짐을 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품에서 파견되신 그리스도의 사명을 묵상하면서 참 목자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12)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사욕편정에 죽고 세속적 영예를 멀리하며 내적인 것을 찾는 데 있다.13)

 

제2부는 사목자가 주님의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서의 내용과 성인들의 삶을 묵상하고 보이지 않는 사물을 자주 묵상함으로써 내적 생활에 뛰어날 때 거룩하게 행동할 수 있고 말씀을 힘차게 전할 수 있으며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14)

 

제3부의 제목은 “지도자가 자기의 거룩한 생활로 어떻게 수하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을 40계층으로 나누어 목자가 각 계층에 맞는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는 사제다운 덕행과 지혜로 무장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 역시 깊은 내적 기도에서 나온다고 했다.

 

제4부는 간단히 1장으로 되어 있다. 그는 통치자가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지만 거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외친다. 자신 안으로 깊게 들어가는 목자는 하느님과 만나며 쉽게 깊은 내적 기도에 몰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세 계층을 다루면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신앙인의 활동을 중시하되 언제나 더 중요한 내적 기도를 강조한다. 활동의 근원은 깊은 내적 기도에서 나온다는 그의 주요 정신이 어디서나 보인다. 그것은 관상기도를 활동 생활보다 중시한 그의 사상이다.

 

 

7. 마치면서

 

이상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영성을 다루면서 그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사회와 교회를 변화시켜 나간 것은 정치적인 힘이나 무력이 아니라 충실한 영성 생활과 이를 적절히 가르친 결과였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우리보다 1,400여 년을 먼저 사신 위대한 성인은 내적 생활로 인도하는 관상기도를 통하여 어려운 정치 상황에서도 과감히 대처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얻었으며,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이를 강조하고 가르침으로써 혼란한 시대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어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런 면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영성은 중세기뿐 아니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처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된 가르침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늘 교회를 쇄신시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모범과 가르침은 교회의 모든 계층에게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특별히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성직자들의 삶의 쇄신을 위한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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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1a 

2) 이 책은 필자가 1996년에 번역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성신학연구소에서 출판하였음. 

3) Moralia, 6,61; Hom. in Ezech. 1,3,9. 

4) Hom. in Ezech.,11,11,12. 

5) Hom.in Ezech., 2,19,20. 

6) Moralia, 31,104; Hom.in Ezech. 9,31;2,10,21. 

7) Hom. in Ezech., 2,77; Moralia, 18,81. 

8) Hom. in Ezech., 1,3,9. 

9) Moralia, 6,61; Hom. in Ezech., 1,3,9. 

10) Hom. in Ezech., 11,11,12. 

11) [사목 규범] I, 1-2. 

12) 위의 책, 4.6. 

13) 위의 책, 8.9. 

14) 위의 책, 1.2.5.7.11.

 

[사목, 2001년 8월호, 전달수(교황청립 로마한인신학원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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