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이냐시오식 공동식별을 위한 실천적 제안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24

이냐시오식 공동식별을 위한 실천적 제안

 

 

머리말

 

공동식별이라는 단어에 얽힌 기대가 있다. 한 공동체가 공동식별을 통해 어떤 결론을 얻었다면, 구성원 각자는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함께 봉사하는 가운데 일치와 평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공동으로 식별한 결과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을 겪고,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각자가 모두 현명한 판단력을 지니고, 하느님으로부터 같은 특은에 의해 불리움 받은 동료들로서, 그분의 뜻을 찾아 행하기를 원하는 근본 지향들을 지닌 사람들이 이루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된 의견에 따라 갈라져 분열을 겪어야하는가? 공동식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왜 어떤 때에는 힘들고, 때로는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공동식별의 경험이 많은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식별 과정이 너무 일처리에 관심을 두어,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역동적 관계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기 때문에 실패와 좌절을 겪는다고 한다. 공동 영신식별의 과정은 어떤 단체가 공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명한 판단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아 결정을 내리는 과정, 혹은 단체의 이익과 관계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수결의 표결에 의해 보다 더 많은 이들이 지지하는 것을 선택하는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동 영신식별의 방법은 예수회의 설립의 배경이 된 [첫 사부들의 식별]이라 불리는 문헌에서 전개된 방법에 그 원형이 담겨있기에, 이 문헌을 세세히 다루면서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과 관련해서 공동식별의 방법을 해설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단지 공동 영신식별의 과정을 단계별로 소개하면서, 실천적인 요소만을 다루어 보겠다.

 

 

공동 영신식별의 의미

 

혼동을 없애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공동 영신식별’의 의미를 밝혀두어야겠다. 공동식별이란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서 실행에 옮기는 작업과 과정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동체는 관계적인 공동체일 수 있고, 기능적인 공동체일 수도 있다. 영속적인 공동체일 수 있으며, 임시적인(ad hoc) 공동체, 즉 일시적으로 어떤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구성된 위원회일 수도 있다. 하느님의 뜻을 함께 찾아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은 공동의 목적을 향한 순수한 공동체적 행위로서 상호적이며 동시적이다. 물론 공동체에 관계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공동으로 식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장상이 개별적으로 식별했다고 해서 공동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가려져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적 행위가 없이도 하느님의 뜻은 다른 방법에 의하여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장상이 몇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거나, 결정해야 할 과제를 제시해 주면서 기도 중에 얻게되는 결론을 서면으로 제출해 달라고 부탁해서 후에 그 제출된 보고들을 바탕으로 장상이 결정을 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공동체 전체가 식별을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고, 때로는 이것이 최상의 방법일 수도 있다.

 

 

공동식별을 위해 미리 준비할 사항

 

공동식별을 올바로 진행하기 위해서 미리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으며 서서히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올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불편심’을 지녀야 한다. 이것은 내적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기도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 자유를 의미한다. 공동식별에 임하는 각 구성원은 이 ‘불편심’을 얻도록 충분히 기도해야 한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이성적 판단이 지배하는 토론을 통해 힘겹게 합의점에 다다르면, 선택된 결정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오히려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생긴다. 

 

내적 자유: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가장 중요한 준비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하며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모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힘입어 자유로운 마음을 얻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식별하려는 주제에 대한 여러 가능성들을 설정하기에 앞서 이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내적 자유가 형성되지 못하면 이기적인 사욕에 의해 영적 눈이 가려지기 때문에 설정되는 가능성들이 편견에 의해 중립적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로써는 진정한 대화에 임할 수 없다.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선 늘 자유로운 마음의 태도를 유지하도록 각별히 애써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은 우선 그것이 드러나면 기꺼이 실행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요구한다. 식별에 의해 결정된 바를 실행할 준비가 안됐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 하고 주저한다면, 이 식별은 잘못된 것이다.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멀어 있었거나, 혹은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서 인정하시길 원하면서 식별을 진행한 경우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는 열망은 그분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신뢰와 이에 따르는 신실한 기도를 통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식별에 참가하는 구성원 각자는 서로 개방된 마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신뢰심이 없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다다르시지 않고, 오히려 공동식별 과정이 처음부터 좌절의 현장으로 변해버린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서로 개방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식별은 구성원 각자가 권위에 의해 일방적으로 요구되는 바로서가 아니고, 또 마땅히 따라야하는 의무감에서도 아니라,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점과 대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공동체의 결정에 승복하게 해준다. 이러한 마음 자세와 실천 의지가 없이 공동식별을 진행할 수 없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신뢰는 그분께서 모든 것을 빠르고 쉽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계획하시는 시기와 장소에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에 관해 식별할 경우에 충분한 시간과 준비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시간적으로 긴급한 문제에 관해서는 이런 종류의 식별을 진행할 수가 없는 것이고, 혹시 이러한 경우에 공동식별이 진행된다면, 주위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그 결정은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물론 성령께서는 어떤 결정은 쉽고 빠르게 이끌어 주시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에 관해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이끌어 주시기도 한다. 

 

하느님의 뜻이 최상의 우선 순위를 지닌다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것 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불편심을 지니게 한다. 자신의 이익, 열망, 두려움 등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결정에 다다르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려면 우선 대화를 시작하고 토론을 진행하기 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태도를 살피며 마음이 자유롭고 개방되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실천적으로 성 이냐시오는 주님께 도우심의 빛을 구하면서 기도 중에 여러 가능성들을 고려해 보면서 가장 마음에 안들고 어렵다고 여겨지는 가능성을 오히려 원하도록 애써 기도하라고 충고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려질 결정에 의해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제시된 여러 가능성들과 그 이유들을 고려해 보라고 제안한다. 물론 이것은 감성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의 무관심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냐시오식 불편심은 감정이 없는 기계와 같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욕심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취향이나 숨겨진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을 원하고 실행하고자 하는 단순하고 견고한 자유의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해 이러한 감성적인 자유로움의 상태에 이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기된 주제에 대한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원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기된 과제를 숙고할 때에도 선입견과 편견에 의해 지배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한 가능성에 대해 별로 탐탁하지 않은 인상을 지니고 있으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접근해 보아야 하고,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 대단히 긍정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으면, 그 가능성이 하느님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여기면서 문제를 숙고해 볼 줄 알아야 한다. 

 

공동식별을 위한 원칙: 공동식별의 과정을 지배할 몇 가지 원리들은 여기에 참가하는 이들이 모두 합의하고 동의한 것들이어야 한다. 식별 과정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선 서로 합의한 어떤 근거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공동식별은 진행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평가 기준을 공동체의 평화와 순조로움에 두고, 어떤 이는 삶을 경쾌하게 해주는 건설적 긴장에 기준을 둔다면, 이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지만, 공동으로 무엇을 결정하는 기준점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이 평가 기준들은 각 공동체가 지닌 목적과 소명의 관점에 따라 도출되어야 한다. 공동체가 함께 내릴 결정은 그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에 부합하고, 그 본연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식별의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공동체의 목적과 본질을 기억시키고 환기시켜야 한다. 식별을 위한 평가 기준들이 공동체의 목적과 소명의 시각에 따라 합의될 때, 공동식별은 가장 현실감있게 진행될 수 있다. 

 

주제의 설정: 영적인 자유로움이 형성되면 이제 식별하려는 주제를 정확히 설정하고, 이에 따른 선택 가능성들을 간단 명료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표현된 문장에 불확실한 점이 있으면, 식별 과정이 그만큼 애매모호하게 되어 쉽게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식별 과정에서 대화와 평가가 진전됨에 따라 표현된 명제가 적합하지 못하거나 혹은 애매하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숨겨진 혼란이 드러나고 가려졌던 문제가 드러나기도 한다. 때로는 새로운 정보가 과제를 전폭적으로 재 조정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화를 계속 진행하기에 앞서 명제를 합당하게 수정해야 한다. 또 표현된 선택 가능성들은 실천에 옮겨질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이상적으로 상상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은 미리 식별이 시작되기 전에 제외되어야 한다. 또 어떤 구체적인 상황이 무엇을 요구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어떤 결정에 따라 다른 사도직에서 인원을 끌어내야 하는 인사 문제에 관련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므로, 이 가능성들을 설정할 때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상황과 관계되는 사람에게 민감해야 하고, 선택 가능성들을 문장으로 표현하기 전에 포괄적으로 대화를 나누며, 이 목록을 될 수 있는 한 명확하게 표현하고, 때로는 축소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이는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가능성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게 되고, 시작부터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정보교환의 노력: 표현된 선택 가능성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별을 진행하기 위해, 관련된 정보가 충분히 나누어지도록 애써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이끌어 주시는 움직임에 민감한 것이 결코 식별 주제에 대한 수집된 정보를 함께 나누고, 그것들을 기도 중에 고려해 보는 것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다 더 성실하게 정보가 서로에게 나누어지고, 그 정보들이 올바르게 이해되도록 촉구한다. 처해진 구체적 현실 상황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밝히시는 섭리의 움직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움직이심에 민감하게 응답한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과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함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제시된 가능성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식별을 진행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식별의 첫 단계에서 모든 구성원이 주제의 내용과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수집된 정보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무엇을 마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참고 자료들을 나누거나, 관련된 내용들의 정보를 담은 유인물을 나누어 본다거나, 관계된 문제에 관한 전문가의 조언을 함께 들어보면서 질의응답 시간을 마련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물론 이러한 단계는 주어진 주제와 정보를 기도하면서 숙고하고 식별하는 구체적 단계에 선행되어야 한다. 새롭게 얻어진 정보나 이유들은 이미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들이나 정보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 중요성을 감소시키거나 또는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단계 역시 단순한 과정은 아니다. 때로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식별을 진행하는 구성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기도 하면서 식별이 오히려 복잡하게 꼬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가 가능한 충분히 나누어지고 이해될 수 있다면, 식별과 결정 과정은 그만큼 순조롭고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본다.

 


공동식별을 위한 구체적 준비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시된 가능성들을 살펴봄: 이제 구성원 각자는 제시된 가능성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각하게 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 속에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고 당신께서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어떤 것을 발견하도록 마련해 주시길 기대한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움직임에 대한 예민함과 열망이 없이 주제를 숙고한다면 단지 자신이 믿고 있는 바 혹은 자신의 능력에 합당한 범위에서의 현명한 판단력에 따라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와 같은 현명한 판단력은 공동식별에서 기대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아니며, 또 공동으로 식별하는 과정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자는 주어진 정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면서 하느님께서 이러한 정보를 통해 공동체에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형성하는 판단이 공동체에 나누어지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확인을 구해야한다. 이렇게 얻어지는 확인은 본인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똑똑하게 생각했다는 만족감이 아니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이 과정에서 함께 하시고 활동하신다는 표시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 정도가 어떠하든 간에 일종의 신앙 체험이다. 

 

전체 모임에서 나눌 자신의 의견을 기도 중에 형성함: 이 점은 아마 공동식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공동식별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심리적 역동성에 기초를 둔 공동 결정의 방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 행위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역동적 진행 과정은 단지 어떤 사람의 의견이 반영되거나 거부되는 인간적 심리에 근거하는 결정 과정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이 전부 고려되면서, 그 각자의 입장과 의견이 함께 참다운 것을 찾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중요한 어떤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 대화를 위해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미리 준비해야 하고, 이 의견의 형성은 타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성령께서는 한 공동체가 참다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덜 도전적인 성격, 덜 지성적인 능력, 덜 적극적인 설득력을 이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노력에는 지성적 능력이 우수하다거나, 배움이 깊다거나 혹은 적중력이 큰 사람이 더 잘 식별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이 공동식별에도 적용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적 능력이 필요하고, 주어지는 정보와 원리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토론에 참여하는 자질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움직이심과 타인에게 개방된 마음을 지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재능은 떨어지지만, 더 개방적인 사람이 공동식별에서는 더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둘째 이유는 공동체에는 성격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며, 경험이 다른,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한 문제에 관해 서로 다른 시각에서 진리의 서로 다른 양상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전체에 기여하도록 하시었다. 몇몇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를 통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시기도 하고, 어떤 강한 의견에 대해 상대적 의견을 불러 일으키시면서 공동체가 균형을 이루도록 이끌기도 하시며, 새로운 반응을 불러 일으키시면서 당신께서 이끌어 가시는 방향으로 이 공동체가 나아가도록 하신다. 식별에 참여하는 각자가 공동식별의 전체 모임에 임하기 전에 미리 기도 중에 성령께서 각자를 올바른 이유와 사유 방식으로 이끌어 주시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것을 기대한다면, 공동으로 이야기를 나눌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된다. 성령께서는 각자가, 공동체가 나아가는 방향과 상반되는 이유와 사유를 허락하시면서, 이것을 이용하셔서 공동체로 하여금 그 나아갈 바를 보다 분명히 발견하도록 이끄신다는 것이다. 

 

구성원 각자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기도 중에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함께 모이기 전에 서로 만나서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거나 개별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것은 공동식별의 과정에 결정적으로 방해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성령께서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것을 방해하면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쳐 결정을 조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정보를 나누거나 구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이러한 정보가 나누어질 때 함께 제시되는 찬성의 이유들과 반대의 이유들은 자신이 형성하는 입장에는 가능한 한 반영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한다. 공동체의 모임 후에는 각자가 타인이 나눈 의견과 입장들을 기도 중에 숙고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준비 사항들이 올바르게 형성된 후에 각자는 공동식별에 임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준비가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식별이 진행되면, 계속해서 이 진행은 장애를 만날 때마다 좌절되고, 성령의 움직임과 활동이 방해를 받게 되어 모든 과정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식별을 위한 대화의 구체적 단계들

 

공동식별을 위한 대화의 현장에서는 아무도 미리 자신의 입장을 견고히 고정시키지 않는다. 어느 입장도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고, 누가 누구를 비판하거나 꺾어 누르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각 구성원은 제시된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찬성의 이유들과 반대의 이유들을 모두 고려해 본다. 개방된 마음으로 주어진 가능성들을 살피면서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진실을 파악하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대화에서는 아무도 누구에 대해 이기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법상으로 뿐만 아니라, 참으로 자신의 주장을 버릴 수 있는 자세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의 과정에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어떤 경우에는 대화의 방법이 적합하지 못한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규정되지 않은 대화에서는 목소리가 큰 사람 혹은 입담이 좋은 사람들이 분위기를 주도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올바른 대화의 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상적으로는 참석자 모두가 다 말해야 한다. 공동체가 큰 경우에는 작은 단위로 나누어서 진행하고, 전체 모임에서 요약을 발표하도록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제시된 공동식별의 구체적 단계들은 준비 단계에서 형성된 자유롭고 개방된 마음가짐을 유지시켜 주고, 대화를 순조롭게 진행시키면서 기도와 성찰 중에 얻은 열매들을 잘 나누도록 기획된 것이다. 이 단계들을 보다 더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모임이 논쟁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또 모든 이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도록 통괄하는 사회자를 선정해야 할 것이다. 이 사회자는 진행되는 상황을 잘 관찰하면서 식별하는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항에서 쓸데없이 이야기를 길게 하려는 사람을 견제하면서 시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각별히 애를 써야할 것이다. 

 

제 1 단계. 가능성에 대한 이유들을 나눔: 첫 한?두 번의 전체 모임에서 각자는 기도 중에 얻은 이유들을 발표하도록 초대된다. 모임이 논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각자는 반대의 이유들에 대해 개방된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하며, 한 번에 한 가지 가능성에 관해서 다루면서, 각자는 이것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물론 간단한 식별의 경우에는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형식으로 진행의 묘를 살릴 수도 있다. 만일 표현된 가능성이 “갑인 경우”라면 우선 첫째 모임에서 <갑에 반대하는 이유>를 돌아가면서 나누고, 둘째 모임에서 <갑에 찬성하는 이유>를 나눌 수 있다. 만일 표현된 가능성이 “갑인 경우”와 “을인 경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을에 대해 갑을 선호하는 이유>를 첫째 모임에서 나누고, 다음 모임에서는 <갑에 대해 을을 선호하는 이유>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모든 모임에서 나누어지는 내용들을 서기가 기록해서 발표하는 여러 이유들이 후에 새롭게 평가될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다. 서기는 모든 이가 다 발표한 후에 기록한 내용을 요약해서 전체 앞에서 낭독하고, 사회자는 혹시 수정할 내용이나 덧붙일 내용이 있는지를 전체에게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발표된 이유들이 낭독되면 사회자는 불명확한 점들을 확인할 수 있는 질문들을 허락해야 한다. 표현된 문장이나 어휘의 의미를 확인하는 질문일 수도 있고, 이유들 밑에 깔린 어떤 원리나 가정들에 관한 질문들일 수도 있다. 혹은 제기된 어떤 이유가 하느님께 대한 더 큰 봉사에 어떻게 상관되는지를 묻는 질문일 수도 있고, 제기된 어떤 이유가 공동체 전체에 무슨 의미를 제공하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인지 등의 질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이유들이 정확하게 규명되면서 그 정당성이 객관적으로 이해될수 있도록 하는 단계이다. 때로는 어떤 대립이 생기겠지만 논쟁은 아니다. 어떤 이가 자신이 제시한 이유가 이해되도록 애쓰고 힘들여 이야기 하겠지만, 아무도 그를 공격하거나 반론을 제기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제시된 이유들을 평가하려 들거나, 반대의 이유들을 내세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제 2 단계. 앞 단계에서 제시된 이유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펴봄: 여러 이유들이 명확하게 이해된 다음에 각자는 정보를 교환한다는 차원 이외에는 누구와도 의견 교환이 없이 개별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이 이유들을 평가해 보아야 한다. 주어진 가능성에 대해 제시된 이유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혹는 어떤 이유를 좀더 깊이 숙고해야 하는지를 평가하고, 더 중요한 어떤 이유들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사라지는 이유들은 어떤 것들인지 등을 평가해야 한다. 이 작업은 문제의 중요성에 따라 두 번에 걸쳐 진행될 수도 있고, 혹은 한 번에 마무리 될 수도 있다. 구성원 각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별하면서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아직까지 공동체가 결정을 내린 단계가 아니므로 개방성과 불편심을 유지하면서 첫째 단계의 작업에서 영적인 자유와 관대한 마음을 유지했는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제 3 단계. 평가를 나눔: 각자는 전체 모임에서 둘째 단계에서 진행한 기도 중의 평가 결과를 보고한다. 첫째 단계에서 진행된 것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마지막에 사회자는 서기로 하여금 모임에서 나누어진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들과 이에 상응하는 이유들을 낭독하게 한 다음 수정이나 보충 사항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질문할 시간을 준다. 

 

제 4 단계. 나누어진 평가를 기도 중에 새롭게 평가해봄: 만일 아직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여주는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으면, 나누어진 평가를 새롭게 기도 중에 평가해 보는 시간을 마련하면서, 역시 이 모든 과정에서 마음의 순수성과 영적 자유를 유지했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모두가 더 이상 이런 작업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계속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염원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 형성되면 이제 투표로 결론을 내릴 준비가 된 것이다. 

 

제 5 단계. 표결: 혹자는 마지막에 표결에 의해 결정을 선택해야 한다면 공동식별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이 작업은 실패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표결이 변경할 여지가 전혀없는 닫혀진 표결이라면 구성원 각자가 불편함을 느끼게 되므로 시간이 허락하고 가능한 한 대화를 계속 진행하기를 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허락되는 상황이고, 이 표결이 열려진 표결이라면 식별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 성령께서 이 문제에 관해서 만장일치로 이끌어 주시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신앙에 더욱 성숙하도록 좀더 겸손하고 성실하게 소수의 의견을 숙고하도록 초대하기도 한다. 때로는 공동체의 몇몇 사람은 성실하게 기도하면서 문제를 숙고해 왔다고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성실하게 기도하는 마음이 없이 문제를 식별하고 영적 자유로움을 유지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 내려지는 결정이 만장일치가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가 식별을 통해 결정한 내용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신뢰심이다.

 

 

공동결정에 대한 확인

 

만장일치로 이루어졌건 혹은 다수결에 의해 선택되었건, 잠정적으로 얻어진 결론이 올바른 것인지를 시험해 보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마음의 움직임들을 살펴 보고, 교회의 합법적 권위와 그 잠정적 결정이 수행되는 과정의 경험을 통해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올바른 결론인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이 결정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는 확인의 표시는 공동체가 누리는 일치와 평화, 신?망?애 삼덕의 증가, 그리고 어떠한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용기의 증가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에 반대되는 것들은 결정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증거들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구하는 확인의 표시들은 신앙체험이지 결코 심리적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랫 동안 힘겹게 이 진행을 겪어 왔으면,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이 마치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평화인 양 오인될 수 있다. 함께 일하면서 어려운 일을 상대했다는 자부심에서 오는 일치와 낙관주의는 심리적인 만족감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마음의 평화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체험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결정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확인의 표시로 읽혀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베풀어 주시는 확인체험은 신앙체험이면서 하느님 중심의 체험이다. 

 

신앙체험으로부터 얻는 영적 위안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확인해 주지만, 확신을 지니고 판단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우에는 교회와 장상의 정당한 권위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교회의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영적 위안 등의 정서적 차원의 확인들보다는 정당한 교회의 권한이 훨씬 더 안전하고 분명한 확인임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확인된 결론은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로 하여금 공동으로 결정한 사항에 관해 비록 투표에서는 반대했더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모두 한 마음으로 이 결정이 지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물론 이 결정이 새로운 정보와 경험에 의해 재고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계속되는 식별의 가능성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표시들이 발견되기도 할 것이다. 혹시 이러한 표시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면 새로이 식별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방법상의 과정이 대단히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라는 인상을 갖 될 것이다. 물론 중대한 문제는 그만큼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진행되고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우리의 시간을 온통 성령께 내어드리는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이 공동식별의 작업을 진행할 수 없다. 하지만 위에 제시한 과정은 사실 그리 복잡한 과정은 아니다. 수사학적 언변을 피하고, 토론을 억제하면서, 중복되는 내용의 언급을 가능한 한 피하도록 하는 운영의 묘를 살려 서두르지 않고 필요한 것을 지나쳐 버리지 않는다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별하는 주제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경우에 당일 혹은 며칠 전 평상의 기도 시간을 활용해서 준비하고, 공동모임에서 15분 간격으로 한 단계씩 진행한다면, 대개 한 시간 반 안에 모두 마무리 질 수 있는 단계들이다.

 

[사목, 1993년 8월호,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62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