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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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영신식별의 한 가지 실천적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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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123

영신식별의 한 가지 실천적 방법

 

 

머리말

 

삶의 한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기도중에 이루는 하느님과 내적 일치가 삶의 한 가운데에서 조화롭게 표현될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도적 영성의 원천인 이냐시오 영성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표어 아래 ‘활동중에 관상하는’ 영성으로 불리운다. 이러한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은 영신식별의 실천적 지혜이다. 현실적인 적응력과 박동감에 넘치는 이 영성은 영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마음의 움직임의 방향성을 감지하고 이해하면서,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움직임을 식별하고, 거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실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강조한다. 즉 이냐시오의 영성은 식별의 영성인 것이다. 이러한 사도적 영성을 체득하기 위해 영신식별의 의미와 과정, 및 실천적인 적용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떤 책에서나 강의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을성 있는 신앙심을 가지고, 삶의 여러 순간들에 멈추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과감한 용기와 개방성을 요구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냐시오식 영신식별의 한 가지 실천적 방법을 제시해 보겠다. 우선 방법의 서세한 소개에 들어가기 전에 영신식별 과정의 기본 구조를 세 단계로 나누어 요약해서 제시해 본다. 하느님으로부터 빛을 구하는 첫째 단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성부로부터 파견되셔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빛에 비추어 식별하고자 하는 주제를 살펴보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방향을 감지하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식별하려는 주제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는 단계로서, 수집된 정보들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눈으로 주의깊게 고려해 보며, 동시에 관계된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문제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식별의 마지막 단계는 결정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도록 구하는 단계이다.

 


영신식별을 위한 조건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방법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들이 제시되어야한다. 물론 여기 제시될 모든 조건들이 충족되면 자동적으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말은 아니다. 약간은 중복이 되는 면도 있지만, 다섯 가지 조건들을 제시해 보겠다. 첫째, 우리가 내려야할 결정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어떠한 의도를 지니고 계시다고 믿어야 한다. 둘째, 내적 경험과 의식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어야한다. 셋째, 우리 자신이 지니는 의향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지녀야한다. 넷째,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면 이것을 행하려는 의지를 지녀야한다. 다섯째, 다다른 결론은 물론 다른 경로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보편적 뜻과 모순되어서는 안된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다루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방법은 결코 윤리적 사고, 성서의 계시, 그리고 교도권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의도하고 계신가를 알아내는 방법은 그 자체로서 선하고, 보편적인 하느님의 뜻에도 일치하는 서로 다른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가능성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까의 문제이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그 어떠한 시도도 우선은 하느님께서 정말로 이 특별한 선택의 경우에 어떤 뜻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관해 하느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내적 체험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드러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한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고, 어떠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성찰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밝혀둘 것은 여기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결코 우리의 경험 세계 바깥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표시를 찾는 방법이 아니다.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물론 하느님의 뜻이 극적인 사적 계시를 통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경우들은 여러 성인들에게서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들이 하느님께서 늘 일하시는 방법은 아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면 영신식별의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 

 

셋째 조건은 우리의 지향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조르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원해야한다는 점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자유로워야 한다. 사실상 무엇을 결정할 때 많은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게된다. 하느님의 뜻을 성공적으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영향들을 의식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서, 그것들이 나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한다. 특별히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면서 때로는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하는 다음의 세 가지를 유의해야한다. 첫째는 문화와 주변 환경의 영향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어느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우리의 사고방식은 이 집단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데 있어서 그저 생각없이 자신이 속한 가족 관계, 친구 관계, 종교 모임, 혹은 사회 조직 등의 집단의 사고 방식에 따라 깊은 숙고없이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어떤 집단이 지닌 선입견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 집단적 편견을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내적 체험들과 대비시키면서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둘째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자만감 사이에 벌어지는 분열에 의해서 결정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경우 과연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인가 하는 질문도 없이 그저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그 무엇을 원하곤 한다. 세째로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합리화이다. 감정에 이끌려 결정을 내릴 때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합리화시킨다. 일반적으로 합리화는 자만감에서 생기고, 때로는 내린 결정이 가장 현명한 결정이라고 자축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경향들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을 의식함으로써 비로서 그것들의 영향을 감소시킬수 있고, 만일 이들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저 아무런 성찰없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진정 자신의 내부에 귀를 귀울인다면, 이러한 방해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마음에 귀 기울여야 하되, 머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 우리 존재의 더 깊은 차원인 마음과 접촉하게 되면 성령의 움직이심과 접촉하게 됨으로써 사고 방식, 염원, 느낌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분명히 마음의 차원에서 내리는 결정은 머리의 차원에서 내리는 결정과는 다르다. 머리는 좀 더 주위의 환경, 죄스러움과 합리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 깊숙이에서 움직이시는 강력한 힘이시며 우리의 죄스러움보다 훨씬 강하다. 자신의 마음에 도달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지닌 피상적인 열망보다 더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뜻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신다. 

 

넷째 조건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났을 경우 반드시 그것을 실행에 옮길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은 그것을 알게될 때 반드시 실천에 옮기겠다는 결심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제가 되거나 수도자가 되는 것 외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이와같이 조건이 첨부된 상황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올바른 식별로 이끄실 수가 없다. 이러한 조건들을 하나 하나 제거하기를 거부한다면 오히려 성령의 이끄심에 방해물들을 쌓아 놓는 것과 같다. 

 

다섯째 조건은 이 방법을 올바로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내리게 될 결정은 일상의 경로를 통해 드러나는 보편적인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봉사하는 여러 방법들에 관해 숙고하고 있고, 이들 모두는 선한 것들이며, 이들 중에 어느 한 가지가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것이다. 여기에서 제안하는 방법은 윤리적 사고, 성서, 종교?사회적 권위 등의 경로를 통해 얻어지는 하느님의 뜻과 모순되는 그 어떤 것을 얻는 방법은 아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보편적인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움직여서 사회법에 대항하고 불복종하게 하시거나 양심을 통해 어떤 법의 조항을 거부하도록 이끄신다. 예수께서도 바로 이러한 분 중의 한 분이셨다. 하지만 여기에서 제시하는 방법은 이런 종류의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해야한다.

 

 

결정하는 방법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방법을 사용하기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일상 경험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한 상태에서도 결정을 내려야할 때가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조건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려는 열망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의향을 확인하고 인정하기 위해 결정 과정을 시작하곤 한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에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 이 방법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방법을 사용하는 그 자체가 자신의 의향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원하도록 해주는 내적 자유를 얻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결정의 방법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성찰할 문제를 정확히 서술하고, 다음의 세 단계에서는 차례로 지성, 의지, 그리고 감성을 서술된 문제에 적용하며 숙고해 본다. 마지막 다섯번째 단계에서는 내려진 결정에 대한 확인을 구한다. 

 

첫 단계를 자세히 살펴보자. 성찰해서 결정할 문제를 정확하게 서술하기 위해선 두 가지 지침이 필요하다. 첫째는 문제 자체가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서술되어서 내려진 결정을 실천에 옮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는 결정하려는 사항은 가능하면 하느님의 활동을 능동적으로 표현하고, 내용이 긍정적으로 표현되면 도움이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듯하게 서술하면 더 좋다는 말이다. 이러한 제안은 하느님께서 이미 내적 체험 안에서 활동하시고 또 이 내적 체험들을 하느님의 뜻을 보여주시는 표시들로 변화시켜 주고계심을 환기시킨다. 이렇게 할 때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염원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요소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문제를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방법상의 둘째 단계는 지성을 사용해서 결정하려는 문제를 숙고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 부분은 내릴 결정에 대해 찬성하는 이유들과 또 이에 반대하는 여러 이유들을 의식의 수준에서 제시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두 개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첫 목록은 <찬성하는 이유>라는 제목 아래 그 이유들을 열거하고, 둘째 목록은 <반대하는 이유>라는 제목 아래 그 이유들을 열거한다. 숙고하는 동안에 떠오르는 모든 이유들을 적어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 이유들의 상당 부분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들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이기심이나 외부의 압력에서 생기는 이유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유들의 목록표를 작성하는 작업을 통해서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움직임들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행하려는 원의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식별을 시작했더라도 이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하다. 이러한 원의로부터 흘러나오지 않는 이유들을 구분해 낼 수 있다면 이러한 요소들을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고, 그렇게함으로써 그것들이 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알게되고, 무의식적으로 받게되는 영향을 피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부분은 이 찬성의 이유들과 반대의 이유들을 평가해 보면서 어느 것이 성령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어느 것이 그렇지 못한 것들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목록과 이에 대한 평가는 며칠동안 계속될 수 있고, 결정하는 문제가 심각하거나 중요한 것일 경우에는 여러 주간 혹은 여러 달 계속될 수 있다. 만일 한 번 앉아 즉석에서 서둘러 이 목록을 작성한다면 분명 그 순간의 감정에 영향을 받은 이유들만을 열거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업을 여러 날 혹은 여러 주간에 걸쳐서 진행하면 보다 더 폭넓게 내면의 세계와 접촉하게 되고 더 바람직한 목록을 작성할 수 있다. 이렇게 목록이 작성된다면 어떤 것이 성령에게서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방법의 셋째 단계는 결정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이유들을 성찰하면서 의지의 방향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셋째 단계는 둘째 단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빛의 도우심에 의해 조명된 이성을 활용해서 찬성하는 이유와 반대하는 이유들을 살펴보면, 동시에 의지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어느 쪽으로 이끌리는가를 살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은 어떻게 우리의 내부 능력들이 서로 협력하는가를 보여주면서, 성령께서 우리의 사고 방식과 의지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 만일 여러 날에 걸쳐서 이러한 목록을 작성한다면, 새로운 이유들이 더해질 때마다 의지가 어느 때는 이런 방향으로 기울고 또 다른 때에는 저런 방향으로 이끌리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의지가 어느 하나의 가능성에서 훨씬 더 편안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개방된 자세가 없이 이 성찰을 진행한다면 의지는 앞?뒤로 흔들리면서 우왕 좌왕하게 된다. 이기적 경향들을 세세하게 살피는 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첫째 단계이다. 그러므로 목록을 작성하는 과정은 정화의 시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숨은 의향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원하거나 혹은 이것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기를 원하거나 어느 경우에도 결정은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결정은 때로는 자신의 이기심에 근거를 둔 결정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신에 대한 이기적 사랑에서 내려진 결정일 수도 있으며, 진정 성령께서 이끌어주신 결정일 수도 있다. 

 

물론 목록에 열거된 이유들의 개수에 의해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렇게 더 나은 이유들의 숫자에 의해 결정을 내린다면, 결정은 단지 현명한 판단일 뿐이다. 하지만 영신식별의 과정은 이러한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이 목록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한다면 분명 어떤 이유는 다른 이유들 보다 더 중요한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식별의 과정은 단지 현명함이나 상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때로는 직장을 잃거나, 친구를 잃거나, 명망을 잃는 경우도 있다. 더불어 때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넘어서기도 한다. 

 

식별의 방법에서 넷째 단계는 감성의 영역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그분의 영광에 보다 더 합당한 가능성에 더 감성적으로 이끌리도록 기도한다. 이렇게 지성, 의지, 감성을 적용하는 세 단계는 서로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다. 성령께서 지성을 비추어 주셔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게 해 주시고, 당신의 뜻을 향해 의지가 이끌리도록 인도해 주시며, 그리고 이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가능성에서 감성적 위안을 베풀어 주시도록 청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서서히 이러한 내적 체험들을 변화시키시며 이끌어 가신다. 감성적 위안에 의해 변화되는 감성적 인식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중요한 기준이다. 이러한 감성적 위안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결정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 주실 뿐아니라, 결정을 인정해 주시고 확인해 주신다. 

 

우리가 내리는 어떤 결정에 대해 하느님께서 확인의 표시로 ‘느낌’을 사용하신다는 관점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느낌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점차적으로 정화되는 과정을 통해 떠오르는 순수한 감성적 위안을 말한다. 이런 위안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염원을 지닐 때 생기는 느낌들이다. 분명 이러한 위안들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위한 봉사에 대한 희생의 태도가 전혀 없는 이기심으로부터 생기는 느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이다. 보통으로 결정을 내릴 때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하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의지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자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식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느낌의 변화를 자주 체험하게 된다. 식별의 과정의 막바지에 처음에는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가능성에 대해 새로운 열정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만일 진정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행하려는 원의가 없이 이 식별의 과정을 진행한다면 계속해서 의지와 느낌은 우왕 좌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잠정적으로 결정을 내린 다음 지성, 의지, 감성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며칠간 혹은 몇 주간 관찰해 봐야한다.

 

 

결정에 대한 확인

 

결정의 마지막 단계는 내린 결정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잠정적으로 내린 결정을 일정 기간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지성, 의지, 감성의 내적 체험을 관찰하면서 이 결정에 계속해서 이끌리는가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만일 이 결정이 진정 주님에게서 온 결정이라면, 지성은 합당한 이유로 이를 지지해주고, 의지는 이 결정을 고수할 것이고, 위안의 느낌이 이 결정과 함께 동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지성과 의지와 감성의 움직임은 기도할 때 외에도 일상사에서 계속해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때에는 결정이 정말로 올바른 결정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놀라기도 한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적으로 확인과 확신이 우러나오기에 내려진 결정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따른 것이 아니라 진정 성령의 이끄심에 이끌려 내린 결정임을 알게 된다. 

 

둘째는, 이렇게 잠정적인 결정을 일정기간 지켜보는 이유는 식별하는 과정과 방법을 올바로 적용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과연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조건들이 충족되었고, 모든 단계들을 성실히 적용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잠정적으로 내린 결정이 확인되지 않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아마 가장 주된 요인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기 보다는 자신의 염원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은밀히 원했을 경우이다. 어떤 것을 깊이 원하면서 대단한 적극성을 가지고 식별하고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흔히 범하는 오류는 어떤 것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기에 하느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실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식별 작업이 너무 복잡하고 피곤해서 하느님의 뜻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두 가능성 사이에서 씨름을 벌인 후 겨우 어떤 결정을 내린 경우에 이 과정을 끝마쳤다는 심리적인 안도감을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위안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잠정적인 결정을 지니고 며칠을 지내면서 그 동안에는 몰랐던 어떤 요소가 내려진 결정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혹은 어떤 경우에는 심각하게 식별해온 이 문제에 대해 현 시점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의도도 지니고 계시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잠재 의식 속에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을 향해 개방되지 못하게 하는 무슨 요소들이 있을 수도 있고, 나자신이 진정 자유롭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이러한 경우에 다른 차원의 도움을 구해야한다. 

 

이와 같은 여러 이유들에 의해서 지성, 의지, 감성이 우왕 좌왕하면서 잠정적인 결정에 대해 의심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아마도 우리가 내린 결정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식별해온 방법과 과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중요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 이후에 이 정보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잠정적인 결정을 내린 후에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경우에는 식별할 질문을 새롭게 서술하고 이 식별 과정을 다시 전개하면서 이 문제를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가를 살펴야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야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내린 결정에 대해 위안이 따를 때 이것이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시는 표시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이는 성서에 근거한 내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공적 가르침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이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에 근거한 내용이다. 여러 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검토했고, 그리고 어떤 결정에 대해서는 특별히 위안을 경험하게되는 까닭을 다루었다. 내린 결정이 처음에 지녔던 지향과 거리가 멀고, 혹은 나의 현명한 판단과 거리가 있을 때 위로를 경험하게 하는 어떠한 자연적 요인은 없다. 자연스런 이유에 의해서 열정을 체험하게 되는 상황은 아니기에, 오직 하느님의 뜻에 합당할 때 경험하는 내적 평화와 기쁨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우리 존재의 내부에서 활동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것은 당신의 뜻을 찾아내고 행하려 하기에 베풀어 주시는 은혜이다. 물론 이러한 시기는 상황에 따라 길어질 수도 있고, 단축될 수도 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인 경우에는 수 주간 혹은 여러 달 동안 계속될 수도 있다. 간단한 결정은 며칠간이면 충분하겠다. 

 

이 기간에 경험하게 되는 영적 위안인 평화와 기쁨에 대해 세 가지의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이러한 내적 평화와 기쁨은 우리가 내부 깊숙이에서 자신과 만나게 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자신의 존재 핵심부에 집중이 되지 못하면 이러한 체험을 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어떤 결정을 하도록 초대하심을 알기 위해서는 이 시기 동안에 고요한 가운데 하느님 앞에 머물며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해 하느님께서 마음을 어루만지셔서 평화와 기쁨을 내려주시도록 청해야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슴 깊숙이에서 말씀하시기에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귀를 기울이며 그 소리를 들어야한다. 머리는 보다 더 외적인 요인들과 압력, 그리고 개인적인 분열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둘째로 주의 할 점은 우리는 때때로 결정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더 많은 장애물들을 쌓아 놓아 결정을 미루려는 성향이 있다. 머리는 끊임없이 여러 의심들을 제기하면서 평화와 기쁨을 감소시키려한다. 이러한 난점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법은 결정을 좀 더 세분해서 서서히 단계별로 결정해 가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인생의 여정을 걷고 있고, 이러한 여정을 통해 인생의 궁극적 목적에 다다른다. 

 

셋째 주의할 점은 감성적 위로는 결정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다른 요소들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경험하듯이 위안이 가득할 때 과감하고 관대한 결정을 쉽게 한다. 하지만 이 위안들이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보다는 다른 요소들로부터 연유하는 것들일 수 있다. 흔히 중요한 내적 체험을 하게되고 이에 따라 주님을 향해 중대한 투신을 결심하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사제가 되겠다거나 수도자가 되겠다고 쉽게 피정중에 결심하지만 후에 이 결정에 대해 지성과 의지와 감성은 이 결정을 고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위안들은 설사 그것들이 영적 위안들일지라도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원천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나오는 말 : 성령의 인도하심

 

물론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게 보일런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왜 귀찮게 이런 저런 어려움들을 겪으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애쓰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의 영적 눈이 성령을 향해 열려있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께서 어떤 특별한 결정을 향해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을 인정하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충분한 자리를 내어드려야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선택한 결정이 확인 되면, 새로운 마음의 태도를 지니고 이 결정을 실행하도록 해야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에 확신을 가지고 진행시킬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이 가운데 힘을 주실 것이고, 이 결정을 실행하는 것 외에 그 어느 것도 더 완전하거나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단지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애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적 평화를 경험하기도 한다. 자신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삶의 중요한 결정은 작게 구분되어서 내 삶의 여정에서 조금씩 내린 결정들로 표현된다.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바로 세세한 삶의 자리에서 내려야하는 작은 결정들에 관해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삶을 헌신하도록 초대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부르심을 인지하고 응답하도록 계속해서 이끌어 가실 것이다.

 

[사목, 1993년 7월호, 심종혁(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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