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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순교 선조들의 기막힌 우리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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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3 ㅣ No.681

순교 선조들의 기막힌 우리말 사랑

 

 

“주교요지”는 1700년대말에 정약종(1760-1801년) 선생이 지은 천주교 교리서다. 이것은 평신도가 지은 최초의 교리서로서 그 내용 면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신학서로 평가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주교요지”에 나타난 철저한 우리말 사랑에 대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한글만 썼다

 

필자가 이 책을 두고 감탄해 마지않는 것은 첫째로 완전히 한글만으로 썼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학의 명문대가였던 지은이가 몸에 밴 한자를 한 자도 안 쓰고 언문으로 천시되던 한글만으로 어려운 신학과 교리를 풀이하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이 한글로 쓰여졌고 두시언해 등 한문책을 한글로 번역한 것들이 나와있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상당 부분 한자가 곁들여있고 심하면 한글은 한자 문장의 풀이나 토의 구실을 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당시 한글이 쓰인 책이나 번역서 등은 완전한 한글전용 책은 아니었다.

 

“주교요지”에 나타난 철저한 한글만 쓰기는 여러 가지로 깊은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당시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한글만 쓰기는 외래 종교사상을 한글만으로 저술하여 일반에게 보급함으로써 우리 언어문화 발달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첫째로, “주교요지”의 한글 저술은 당시의 한자 숭상의 두꺼운 벽을 깨뜨렸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은 새로 들어온 외래문물, 그것도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던 한문으로 적힌 천주학 사상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오로지 한글만으로 서술하였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저술은 당시의 한자 숭상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둘째로, 모든 문물을 한글로 적음으로써 그 내용을 널리 펼 수 있다는 사실이 “주교요지”를 비롯한 한글 서책을 통하여 입증되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당시의 교회 당국자들은 이미 들어와 있었던 한자본 성경이나 교리서들로써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없었고 오로지 한글본으로 그 이상을 달성할 수 있었음을 실증하였다. “주교요지”는 대표적인 경우가 된다.

 

셋째로, “주교요지”는 한글만 가지고도 어떤 어려운 외래문물이나 사상도 서술,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지금도 한글만으로는 어려운 학문이나 사상을 충분히 표현 전달할 수 없다는 일부 완고한 무리들이 많은 형편인데, 이미 200년 전에 이 책의 저자 정약종은 다른 천주교 선각자들과 함께 그러한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신학과 사상을 한글만으로 훌륭히 서술하여 낼 수가 있었다. 이로써 한글만으로도 어떤 어려운 사상이나 학문도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넷째로, “주교요지”는 한글만으로 적는 것이 어려운 내용을 오히려 더 쉽게 표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한글만으로 적는 데 그치지 않고 어려운 한자말을 피하고 일상적인 쉬운 말을 골라 알기 쉽게 풀어쓰고 또 구체적인 비유나 예시를 풍부히 곁들여 누구나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평이한 서술은 결국 한글만을 쓰는 데서 자연적으로 나타난 것이라 볼 때 한글만 쓰는 것이 서술 태도에 따라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그 한 보기를 들어보자.

 

천지 만물이 제 몸 스스로 나는 일이 없어 초목은 열매 있어 씨를 전하고 짐승은 어미 있어 생겨나니 그 부모는 조부모에게로부터 나는지라 차차 올라가면 분명히 시작하여 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 사람을 뉘가 나았을고. 이 사람의 부모가 있어 나았다 하면 그 부모는 뉘가 나았을고. 처음으로 난 사람은 부모가 없이 낳을 것이니 그 사람은 제 몸을 스스로 나았다하랴. 그럴진대 이 사람만 저 스스로 낳고 훗사람은 스스로 나지 못하랴. 이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처음에 난 사람을 분명히 내신 이가 계실 것이니 사람하나를 가지고 의론하면 초목과 짐승도 다 그러하여 처음에 난 초목은 초목이 초목을 낳음이 아니오 처음 난 짐승도 짐승이 짐승을 낳음이 아니라 초목과 짐승과 사람을 도모지 내신 이가 계시니 이 내신 이를 천주라 이르나니라.

 

윗글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 예인데, 얼마나 소박하고 알아듣기 쉽게 서술하고 있는가? 철학에서 흔히 쓰는 어렵고 추상적인 개념을 쓰지 않고도 이처럼 설득력 있게 하느님의 계심을 자연스럽게 논증하고 있다. 이는 한글을 씀으로써 오히려 더 손쉬운 방법으로 모든 것이 서술될 수 있음을 실증한 것이다.

 

다섯째로, 이 “주교요지”는 우리 한글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천주교 관계의 다른 한글 기도서나 교리서 그리고 성경 번역서와 함께 “주교요지”의 한글 서술은 한글 문화 발전에 적지 않은 이바지를 했다고 평가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김윤경, 최현배 등 여러 학자들이 자신들의 저서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곧 이들은 천주교 계통의 한글 서적이 한글 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지적하고 있다.

 

“금할수록 일어나는 교세는 철종조의 해금으로 말미암아 더욱 퍼져, 전국에 미치었다. 그래서 천주교 관계의 책자들이 많이 한글로 찍혀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고종 3년 병인에 이르러 … 천주교 관계의 책자들을 온 도로부터 몰수하여 모다 태워 버리었다. 그 때문에 그에 관한 한글 책들의 옛것이 전함이 적음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천주교에서 발행한 한글 책자가 적지 아니하여, 우리 한글의 번짐에 그 공헌한 바의 적지 않음을 증명하기에 넉넉하다 할 만하니, 다음에 대강 이를 벌려놓았다”(최현배, “한글갈”, 257-258쪽).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정약종 선생이 책의 전편을 통하여 수수한 우리말을 골라 쓰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점이다. 당시로 볼 때 새로운 사상이요 깊은 종교적 신앙을 다룬 내용인데도 몸에 익힌 한자어를 최대한으로 피하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순수한 우리말만을 찾아서 표현하였다. 어떻게 해서 그처럼 철저한 한글 전용, 그것도 최대한도로 쉬운 우리말만을 골라서 새로운 신앙과 사상을 서술하게 되었는지 거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오늘날의 신학자나 교리학자들이 본받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 서정수 가브리엘 - 한글 문화 세계화 운동본부 회장,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경향잡지, 2003년 10월호, 서정수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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