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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시간전례는 어떤 기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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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0-02 ㅣ No.305

[기도, 한 걸음 더] 시간전례는 어떤 기도인가?

 

 

신앙인이든 아니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깊은 곳에서 ‘그리움’을 발견한다. 이 그리움은, 인간에게 어떤 것을 향해 끊임없이 걷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목마름’이다. 인간은 항상 그 무엇에 목마르다. 목말라 하는 사람은 그 갈증을 해소할 대상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순례자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여 길을 나선 순례자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순례 여정에 도움이 되는 영적 도구를 찾고 있다. 영적인 갈망을 해소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기도이다. 아주 다양한 기도가 교회 안에 있다. 교회의 전통적인 기도 가운데 그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시간전례’이다.

 

이 기도는 오랫동안 ‘성무일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성직자나 수도자만이 의무적으로 바치는 기도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의 결과로 성무일도의 공동체성과 시간성을 재발견하였고, 이후 성무일도는 시간전례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시간전례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드리는 전례적 기도이고, 낮과 밤의 시간적 리듬과 정해진 규칙에 따라 날마다 바치는 찬미의 기도이다. 모든 신자가 이 귀중한 기도에 초대되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양식이다. 기도는 신앙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항구한 기도’, ‘끊임없는 기도’에 대해 말한다(루카 18,1-8; 1테살 5,17; 에페 6,18). 중단 없는 기도는 교회의 존재적 소명이다. 시간전례는 ‘끊임없는 기도’에 부합하고자 만들어진 도구로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장치이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더 잘 응답하고자 하는 방편이며, 인간적인 약함과 나태를 극복하려는 수단이다. 시간전례는 중단 없는 기도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겸손한 신앙인을 위한 기도법이다.

 

 

겸손한 신앙인을 위한 기도법

 

시간전례를 바치려고 하면 우선 시간전례서가 너무 두껍고, 그 구성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느낀다. 또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바쳐야 하고, 전례주년의 전체 흐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겸비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은 이 기도를 바치기를 무척 어려워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많은 본당에서 공동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시간전례를 바치고 있다. 시간전례는 가정에서 혼자 바칠지라도 본성상 공동체의 기도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 구성원과 영적으로 함께 바치는 기도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어떤 용무로 시간경에 참석하지 못한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일(시간전례)의 마지막 기도에는 참석하지 못한 모든 이를 기억할 것이다”(“성 베네딕토 규칙서”, 67,2). 이처럼 시간전례는 함께 바치든 혼자 바치든 교회 전체의 기도이다. 이 기도에 하느님 백성 전체가 늘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전례사 안에서 보면 시간전례는 교회 안에서 크게 두 갈래로 발전했다. 하나는 주교좌성당을 중심으로, 다른 하나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주교좌성당에서는 주교를 중심으로 소속 교구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모여 시간전례를 아침과 저녁으로 바쳤고, 수도원에서는 수도자들이 모여 더 많은 수의 시간전례를 드렸다.

 

 

하느님 백성 전체의 기도

 

시간전례의 각 시간경은, 하루 가운데 중요한 두 기둥인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중심으로, 소시경들인 ‘삼시경’(오전 9시)과 ‘육시경’(정오)과 ‘구시경’(오후 3시), 성경 봉독을 중심으로 하는 새벽에 드리는 ‘독서기도’,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치면서 드리는 ‘끝기도’로 짜여있다.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중심으로 하루 동안 각 시간경들이 순환한다.

 

시간경의 구성을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중심으로 살펴보면, 찬미가, 시편과 찬가, 성경소구와 응송, 복음 찬가(즈카르야의 노래, 성모의 노래), 청원기도, 주님의 기도, 마침기도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전례는 본질적으로 ‘시편’으로 구성된 찬미와 감사와 탄원과 청원을 드리는 기도이다. 시편은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 가운데 하나로 하느님과 인간의 내밀한 관계를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은 전통적으로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기도할 때 시편을 노래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보면 시편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이다. 예수님 친히 시편으로 기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시편 22편을 읊으시면서 숨을 거두셨다(마태 27,46 참조). 그래서 시편을 노래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만나고, 예수님과 하나되어 시편을 노래하게 된다.

 

교회는 각 시편의 성격에 따라 통상적으로 4주간에 걸쳐 바칠 수 있도록 각 시간경에 배분했다. 예를 들어, 아침기도에는 하루의 시작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성격의 시편을 배치했고, 저녁기도에는 하루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성격의 시편을 노래하도록 배정했다.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를 나누는 기도

 

현대인들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것에 실증을 느끼는 반면, 자극적이고 즉흥적인 것에 열광한다. 실제로 시간전례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이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거행된다. 따라서 시간전례는 신자들에게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기도가 될 수 있다.

 

필자가 수도원에 갓 입회했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바치는 시간전례에 거의 질식할 것 같았다. 특히 새벽에 일어나서 바치는 독서기도 중에 밀려오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다. 시간전례의 맛을 차츰 알게 되고 이 시간이 은총의 때임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시간전례는 초심자에게 인내가 요구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우리가 규칙적인 기도를 바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시간전례를 정성껏 지속적으로 바치면, 어느 순간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를 나누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인생길을 나름대로 깨어 걸어가려고 노력하지만 실상 내적으로는 졸면서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전례는 우리를 진정 ‘깨어있는 사람’으로 양육한다. 베네딕토 성인은 시간전례를 바치는 수도자의 내적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시편을 외울 때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성 베네딕토 규칙서”, 19,6-7).

 

하루 가운데 정해진 때에 드리는 기도에서 우리는 하느님 현존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순간순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특히 시간전례를 바치는 우리에게 강하게 당신 현존을 드러내시고 그 현존을 의식하도록 우리를 깨어있게 하신다.

 

기도하는 그 사람은 깨어있으면서 어느 분 앞에 자신이 있는 지를 깨닫게 되고 거기에 합당한 내적 자세를 견지하게 된다. 이러한 현존 의식은 하루 내내 지속되고, 이 짧은 하루가 모여 인생 여정 전체를 하느님 안에서 완성하게 한다.

 

 

삶이 곧 기도가 되게 하는 훌륭한 영적 도구

 

사람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순례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다. 이 유한함은 시간전례 안에서 ‘항상 오늘이신 분’의 영원성과 만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 역시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는 기쁨을 느낀다. 이 기쁨은 시간전례 안에서 천상 교회와 함께 하느님께 영원한 찬미가를 드린다는 사실에서 더욱 커진다(전례헌장, 83항 참조).

 

특히 성인들의 축일에 바치는 시간전례에서는 그날 경축하는 성인의 거룩한 표양에 집중하게 하고, 성인의 삶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에 우리 삶을 봉헌하게 한다. 지상의 우리는 시간전례 안에서 천상과 하나가 되는 영적 체험을 한다.

 

시간전례를 통해서 체험한 영원성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시간을 축성한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표지와 도구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시간전례를 거행할 때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가 지금 우리의 역사 안에 현존함으로써 이 시간은 구원의 때가 된다. 이러한 차원은 시간전례의 청원기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시간전례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는 세상 모든 사람, 특히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한다. 그래서 시간전례는 가난한 이들의 기도, 소외받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된다.

 

베네딕토 성인은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성 베네딕토 규칙서”, 43,3)면서 시간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위대한 수도 교부 오리게네스는 자신의 저작 “기도론”(12,1)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 전체가 단 하나의 위대한 기도이며, 우리가 보통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고 갈파했다.

 

시간전례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기도로서 그 어떤 기도보다도 뛰어난 기도이며, 우리 삶이 곧 기도가 되게 하는 훌륭한 영적 도구이다. 교회는 우리 모두를 은혜로운 이 기도에 초대하고 있다. 이 기도 안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신 분께 달려가자. 구원의 샘물을 마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섬김에 우리 자신을 봉헌하자.

 

* 인영균 클레멘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대구 가톨릭 대학교와 가톨릭 신학원에서 전례학을 강의했다. 현재 성 베네딕도회 서울수도원 원장으로 서울지역 봉헌회와 가톨릭통신교육회 책임자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인영균 클레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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