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14: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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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09 ㅣ No.708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영성 산책] (14)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

 

영성 생활의 두 축인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의 체험은 신비 생활에 해당하는 대표적 예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Giovanni, 1378∼1455)의 바오로의 회심.


지금까지 가톨릭 영성 생활의 기본적인 개념과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후에는 영성 생활을 잘 실천하기 위한 심화 과정으로 세부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가 영성 생활과 관련된 내용들을 알기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신학으로서의 영성 생활, 학문으로서의 영성 신학의 형성 과정과 기본 개념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영성 생활은 각자 개인에 따라 마음 가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마구잡이 식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영성 생활이 개인의 개별적인 체험에 바탕을 둔다 하더라도 올바른 영성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성찰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야만 합니다.

가톨릭 영성 생활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가톨릭 교회 영성 역사를 살펴보면 영성 생활 안에 신비적인 측면과 수덕적인 측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사도 9,3-6), 셋째 하늘에 올라가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2코린 12,1-4). 이는 신비 생활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초대 교회 신앙인들에게 육의 행실을 끊어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추구할 것을 권고합니다(갈라 5,16-25). 이 또한 악습은 끊고 덕행은 증가시키고자 하는 수덕 생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영성 역사 안에서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영성 생활의 중요한 축을 이루게 됩니다.

고대에 그리스도인은 보조적으로 수덕 생활을 실천하면서 신비 생활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먼저 몇몇 교부들은 신비 생활의 여정을 객관적으로 밝혀 소개하고자 학문적인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수도자들은 신비 생활의 여정을 수덕 생활로 꾸미면서 신비체험을 위한 방법을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한편 중세에 들어서는 조금 다른 양상이 나타납니다. 신학자들이 시도하였던 신비 생활에 대한 설명이 너무 어려워지면서 신앙인들은 그러한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없어 자기 마음대로 신비 생활을 실천하다가 오류에 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수도자들은 신비 생활의 여정 안에서 실천하던 수덕 생활에 더욱 집중하면서 마치 수덕 생활만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신앙인들은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며 실천하지 못하고 두 가지 측면을 따로 구분하여 접근하는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근세에 들어오면서 불행한 상황도 나타났습니다. 17세기에 영성 생활 분야에서 잘못된 신비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 당국은 서둘러서 그들을 이단으로 선언하고 파문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신비 생활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몇몇 영성가들은 이단적인 영성 생활을 극복하고 영성 생활 안에서 신비 생활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상대적으로 수덕 생활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신학자들은 영성 생활 안에서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은 모두 있어야만 하는 중요한 두 가지 축이라는 사실에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즉, 수동적인 측면이 강조된 신비 생활과 능동적인 측면이 강조된 수덕 생활은 영성 생활 안에서 분명하게 구분되는 별개의 측면이기 때문에, 잠시나마 부정적인 경험이 있었다고 신비 생활을 등한히 하면서 수덕 생활만 실천하며 영성 생활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신앙인들은 신비 생활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특히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소속 신학자들이 신비 신학과 수덕 신학에 대한 연구 결과물들을 내어 놓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과 노력들 덕분에 가톨릭 교회는 객관적으로 체계를 갖추어서 신비 생활과 수덕 생활을 바라보면서 연구할 수 있었고, 신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8월 9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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