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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세상을 거슬러,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세상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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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1-28 ㅣ No.555

[교회사에서 배운다] 세상을 거슬러, 세상을 향하여, 그리고 세상 안으로


세상을 거슬러(제1차 바티칸 공의회)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역사가 늘 그렇듯이 공의회가 하나의 독립적 사건일 수 없고, 이와 연결된 수없이 많은 사건의 결과물이며, 또 다른 사건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비오 9세 교황의 ‘무염시태(無染始胎)’ 교의 선포와 ‘실라부스(Sillabus : 오류 목록)’,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대의 성격을 공유하는 연속된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근본 진리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역할과 의무를 새롭게 하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인 것이다.

당시 교황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탈리아와 서유럽은 정치 종교적 영역에서 자유주의적이며 반성직적인 경향이 점증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는 1861년 가리발디 장군을 필두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왕으로 선포되었으며, 교황령은 바티칸을 중심으로 축소되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지탱되고 있었다. 이것마저도 잠시 1870년에는 교황령마저도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 아래 놓인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청 간의 투쟁은 점점 치열하게 전개된다. 일례로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청과 라테라노 성전의 사용료를 징수하고자 하였고, 왕국은 교황에게 충성할 의무를 거부하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이때부터 교황은 바티칸의 수인(囚人)이 되었고, 비오 9세 교황의 후임자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1929년 라테라노 정교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천 년 넘게 이어온 교황 통치령의 복구와 독립을 위해 저항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그리스도교가 자유주의적 국가의 통치 이념들과 화해할 수 없는 큰 골을 만들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교회가 시대를 향해 던진 일성이 바로 ‘실라부스’다.

이것은 교황에게 충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근대국가의 자유주의적 통치 상황에서 교회와 종교를 지키는 데 분발하도록 자극했다. 이 실라부스는 ‘우리 시대의 오류들’이라는 제목 아래 80개 항으로 정리된 것으로, 사회주의, 자연주의, 인종주의, 다신론과 자유주의 등을 비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시대의 거센 도전에 응하고자 스무 번째 보편 공의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이 공의회 소집의 목적은 전 세계가톨릭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시대의 오류들을 거슬러 교회가 가르치는 참진리를 선포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교회의 여러 삶의 규범들을 보완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였던 ‘교황의 무오류’에 대한 교의의 내용이 교회의 정통 잡지 「치빌타 카톨리카」에 미리 게재되면서 거센 시대의 역풍을 만난다.

한편, 교회 안에서도 독일의 주교들을 중심으로 시기의 부적절성을 일깨우는 편지가 도착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공의회는 1869년 12월 8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개최되어, 신앙, 규율, 수도회, 그리고 동방 전례와 선교에 관한 4개의 의제를 주요 안건으로 다루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의회의 많은 시간이 ‘교황의 무오류성’에 할애된다. 다음해 5월에서 6월까지 열띤 토의가 계속되었는데 요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의제의 결정이 적당한 기회이며 꼭 필요한가?’라는 시기의 적절성에 대한 논의였고, 다른 하나는 이 결정이 국가와 교회 사이에 가져올 악영향과 갈라진 형제들을 더욱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신학적인 물음이었다.

몇몇 반대도 있었지만, 공의회는 큰 문제 없이 이 결정을 승인한다. 공교롭게도 반대자들의 대부분이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 때문에 로마를 떠나게 되었고, 최종 표결에서는 오직 두 명만의 반대표를 제외하고 이 교의에 찬성한다. 이 둘도 훗날 서면으로 동의를 표한다.

비오 9세 교황은 「영원하신 목자(Pastor Aeternus)」를 통해 이 교의를 정식 선포하였다. 그 핵심은 교황이 성좌로부터 신앙과 신앙의 실천들에 관해 선언할 때 교회의 동의가 필요 없고 그 결정 자체로 충분하며 오류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4장).

공의회는 아직 다루어야 할 많은 주제들을 남겨놓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하면서 공의회를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공의회는 중단되었으나 그 나름의 결실을 거두었다.

곧 교황의 무오류에 관한 교의적 결정으로 도덕적 권위를 부각시켰고, 교황을 전 세계 교회의 중심에 서게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구가톨릭주의자들(vecchi cattolici)의 분열의 상처도 함께 받게 된다.


세상을 향하여(라테라노 정교조약)

전쟁과 격동의 시대에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출된 비오 11세 교황은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 in regno Christi)’를 모토로 그리스도를 통한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한다. 그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한편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의 사회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새롭게 하고자 한다. 그리고 각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조약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 백미가 바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화해의 열매인 ‘라테라노 정교조약(Patti Lateranensi)’이다. 파시즘 통치자 무솔리니는 교회를 국가단위의 문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생각하여 교회에 호의적인 입장을 견지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교회와 손을 잡기를 원한다. 이 결과물이 바로 1929년 2월 11일에 맺은 라테라노 정교조약이다.

이 조약은 27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으며, 교황이 바티칸 시국에서 실질적 통치자로 귀환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또한, 교회나 종교와 관련하여 이탈리아 안에서의 법적인 권한을 제시하는 45개의 세칙이 마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가톨릭은 이탈리아 국가에서 유일한 종교로서의 권한을 갖게 되었으며, 바티칸 시국은 중립적 존재로 규정되었다. 또한 교회의 소유에 대한 면세가 인정되었다. 세칙에서는 이탈리아 정부가 바티칸 시국을 경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며, 이탈리아 안에서 교황의 주교 임명이 자유로워졌고, 사제들은 국방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조약을 통해 교황은영적인 통치에서 가장 높고, 보편적인 독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조약은 교회법에서도 영적인 진보를 이루게 했으며, 교회와 각 정부 간의 문제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상 안으로(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59년 1월 25일에 요한 23세 교황이 보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 공고는 교황 자신이 수차례 언급한 것처럼 ‘하느님의 영감’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적응과 쇄신)’라는 표어에서 잘 나타난다. 곧 이 공의회는 현시대의 외적인 생활에 적응하는데 그치지 않는 사고방식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하였다.

종교와 정치, 권력과 교회가 긴밀히 연결되었던 중세의 극복이며, 종교개혁에 대항하고자 천명된 ‘신조주의(confessionalism)’ 정신의 거절이며, 트리엔트 공의회의 신학과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사상과 현대적 인식에 상응하는 교회로의 변화와 적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황은 공식서한 Humanae Salutis에서 교회의 내적인 쇄신, 그리스도인의 일치 그리고 전 세계의 평화증진이라는 공의회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기에 따라 크게 4개의 회기로 구분된다.

제1회기는 1962년부터 진행되었으며 ‘전례에 관한 것’이 다루어졌는데, 모국어를 통한 전례 거행이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또한, 전례에서 다양한 백성들의 재능을 장려하고, 관습을 존중하였으며, 엄격한 형식의 통일성을 강조하지 않은 점이 주된 변화였다. 다음 회기를 준비하던 중에 요한 23세가 1963년 6월 3일 전세계가 애도하는 가운데 서거하였다.

제2회기는 ‘계시에 관한 것’을 다루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성경과 성전을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유일하고 성스러운 유산으로 강조하면서도, 성경 비평주의의 원리를 수용하여 성경 저자의 진술 의도를 알기 위해 문학 유형을 고려할 것을 받아들인다.

1964년 9월에 시작된 제3회기는‘현대세계에서의 교회’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는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전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주교단 안에서 교황의 독립적이고 상위의 권한을 유지하면서도, 주교단의 단체성을 강조하여 주교들의 연대 책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4회기는 종교의 자유에 관한 논쟁과 평신도 사도직과 선교활동 그리고 사제생활과 직무에 관한 것들이 다루어졌다. 이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회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학적으로 교의를 다룬 공의회가 아니라 사목적 방향이 강조된 개혁 공의회로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세계보다 서방에 더 큰 관심을 보였기에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등에서는 서유럽인들이 느끼는 그런 열광과 친근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위 대륙들에서 신학이 발전하는 데 공헌한 업적은 인정되어야 하며, 특히 교회일치 운동에서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 김종강 시몬 - 청주교구 신부. 교구 청소년사목국 국장이며, 가톨릭청소년센터장으로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1월호, 김종강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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