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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와 신앙: 친절한 금자씨 - 복수를 통한 속죄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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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363

[영화와 신앙] 복수를 통한 속죄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 친절한 금자씨

 

 

우리 시대의 감독 중 박찬욱은 작품의 개성과 스타일에서 대단히 독특하다. 그는 예술가연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대중에게 영합하는 법도 없다. 그래서 그는 ‘친절한’ 감독이 아니며 때때로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그는 ‘웰 메이드(well-made)’에 대한 혐오와 이른바 ‘B급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다. 또한 그는 스타일적 과잉에 도취되어 있다. 그래서 깊이보다는 화려함을, 진지함보다는 재기발랄함을 즐긴다. <친절한 금자씨>는 그런 박찬욱의 스타일적 과잉의 정점이다.

 

 

박찬욱의 스타일적 과잉의 정점

 

<친절한 금자씨>는 1970년대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인물의 시점과 이야기의 시점이 교차되며, 상상과 실제가 중첩된다. 예쁜 것(금자 씨 역 이영애의 아름다움과 그에게 잘 어울리는 사제총의 은장식 등)에 대한 탐미적 취향을 굳이 감추지 않으며, 하늘에 구름으로 글씨를 만든다든가, 기도를 하는 금자 씨에게 후광을 씌우고 얼굴이 빛나 보이도록 하기도 한다. 대사의 부조리함과 썰렁함은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고, 자기를 죽이려 하는 금자 씨 앞에서 태연하고 능청스럽게 감정을 잡아가며 금자 씨와 딸 제니의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통역을 하는 백 선생 최민식의 모습도 압권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영화적 스타일만으로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영화다. 

 

<친절한 금자씨>는 어린아이를 유괴 살해한 혐의로 13년을 복역하고 성탄절 특사로 출소한 한 여자 금자 씨(이영애 분)의 이야기이다. 체포 당시 스무 살의 젊은 나이와 빼어난 미모, 잔혹한 범죄 행각으로 충격을 안겨준 금자 씨는 그러나 13년간 복수의 마음을 다잡으며 살아왔다. 그가 유괴 살해범이 된 것은 금자 씨의 딸을 볼모로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운 백 선생이라는 남자(최민식 분) 때문이다. 이제 금자 씨는 13년간 준비한 복수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 보이>,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라는 테마를 공유함으로써 ‘복수 3부작’으로 불린다. 복수는 법적 처벌과 같은 공적 심판이 아닌 사적인 응징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복수에는 매우 원초적이고 역동적이며 파괴적인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따라서 복수는 가혹할수록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된다. 아마 박찬욱을 매료시키는 것도 이러한 복수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속죄(atonement)의 한 방법으로 삼는다. 금자 씨가 백 선생을 죽이려 하는 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되는 것이다. 백 선생은 죽음으로써 누명 쓴 금자 씨에게 속죄해야 하고, 자신이 살해한 어린아이와 그 부모에게 속죄해야 하는 것이다. 금자 씨는 속죄를 통해서 용서와 구원을 얻고 싶어한다. 

 

김기덕과 함께 박찬욱은 매우 종교적인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종교에 대한 시니컬한 묘사와 표현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그럴수록 박찬욱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갈구는 더욱 집요해진다. 잔혹하고 끔찍한 범죄와 그에 못지않은 대응(복수)을 다루지만, 박찬욱의 메시지는 대단히 도덕적이다. 죄를 지은 자는 속죄해야 한다. 그뿐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실수로 죽게 한 범인(신하균 분)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동진(송강호 분)이나, 철부지 오대수(최민식 분)의 사소한 입놀림으로 사랑하는 누나를 잃은 <올드 보이>의 재벌 청년(유지태 분)이 오대수를 15년이나 감금한 것은 모두 그들이 복수로써 속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진은 범인이 ‘좋은 놈’인 것을 알면서도, 재벌 청년은 오대수가 직접 누나를 죽게 한 장본인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금자 씨 역시 백 선생에게 복수함으로써 죽은 어린아이에게 속죄하고자 하지만, 금자 씨를 찾아온 아이의 영혼은 금자 씨의 입을 막아버림으로써 그런 방식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속죄는 용서와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

 

진정한 속죄란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완성된다. 그 증거를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 베드로가 하룻밤 사이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당신 자신을 바쳐 속죄하셨고, 인간은 그 끔찍한 죄에서 구원될 수 있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가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말씀을 따르지 않고 반복해서 죄를 짓는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고자 때로는 예루살렘을 이민족의 손에 넘기시고 그들의 잔혹한 악행을 내버려두신다. 예레미야서나 애가에 나오듯 끔찍한 고통으로 울부짖는 그들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 비로소 주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신다. 

 

이렇게 두려운 하느님, 외경의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친절한 금자씨>는 그래서 내게 구약의 주 하느님을 떠올리게 했다.

 

금자 씨가 속죄하고자 하나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은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수는 한풀이를 할 수는 있으나 채워줄 수는 없고, 영혼의 안식은 더욱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래서 복수를 한 유족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흩어져 가버리고 금자 씨는 새하얀 케이크처럼 깨끗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케이크에 얼굴을 거듭 박는 것이다. 박찬욱의 영화가 복수의 원념(怨念)을 뿌려대면서도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구원에 대한 절절한 갈망과 연민을 떨치지 못하는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사목, 2005년 9월호, 조혜정(영화평론가 ·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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