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월)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강론자료

사순 4 주일-나해-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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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0-04-01 ㅣ No.196

사 순  제  4  주 일  ( 나 해 )

 

        2역대 36,14-16.19-23      에페 2,4-10   요한 3,14-21

 

    2000. 4. 2.

 

주제 :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사순 시기 4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사순 시기도 반을 넘어 지내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가 어떤 삶의 모양을 만드는 지에 따라, 우리에게 다가올 부활절의 기쁨도 그 크기나 모양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순절을 제대로 지내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 판단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는 사순절 시기의 생활이 잘못의 연속이라는 말도 아니고, 다른 사람 앞에서 힘이 없고 주눅 든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생활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비판과 질책을 이해하고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삶을 만들도록 노력하는 일이 순서라는 소리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가 다가가는 방법으로 계명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계명이란 우리의 삶을 감시하는 하느님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 떳떳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는 자신감을 안겨주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 모두가 그와 같은 생각과 자세로 한 주간을 기쁘게 지내셨으리라 믿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서 실행하고 싶어하는 우리는 삶에서 하느님의 소리도 듣고 싶어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질문하면 첫 번째 응답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귀로 들을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라도 내가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는 짜릿한 전율감이라도 느낀다면 내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은 그렇게 가져도 내가 실제로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될 때, 과연 올바른 반응을 보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이르면 우리의 마음은 좀처럼 편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직접 보고 느꼈거나 조상들을 통해서 수없이 많이 하느님의 업적을 반복해서 들어왔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막상 우리가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될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거나 현재 내가 하느님의 뜻에서 엇나가는 생활을 하는 것이 행복에 겨워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이것은 보통 수준을 넘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소리를 우리는 합니다. 그 말은 잘못은 누구나 하고 산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완벽한 성인(聖人)의 기질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잘못을 한다는 사실을 서글퍼 할 것이 아니라 잘못을 즐기는 재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더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들이 가졌던 슬픔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기막히도록 놀랍고 눈이 휘둥그래지는 일을 바라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정작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우리가 하느님께로 마음과 생각을 돌리지 못하는 것을 예언자들은 마음 안타까워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2000년 대희년을 지내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반복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무한히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그 인자함과 자비함을 우리가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에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이 인내하실 수준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음을 서러워 할 것이며, 결국에 가서는 잘못된 일들에 대한 원망의 화살을 하느님께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40년 가운데 겪었던 구리 뱀 사건의 의미를 다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비뚤어진 것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단번에 없애버리지 않으시고 징벌이면서 동시에 회개를 바라는 뜻으로 독성을 가진 불 뱀을 보내십니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불안을 알아챈 백성들이 하느님을 향하여 울부짖게 되었고 위험에서 탈출하는 수단으로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나타난 구리 뱀을 쳐다보는 수고는 우리가 할 수 있어야만 구원이라는 선물로 갈 수 있다는 조건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차이가 있다면, 보속의 행위없이 결실에 참여하려는 조급함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느님의 뜻과도 차이나는 일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귀를 통하여 하느님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너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탓도 있을 것이고, 아주 작은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만큼 우리의 마음에 여유가 없는 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려고 합니다. 거기에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꼭 갖추어야 할 자세는 잊어버린 채, 축복만을 바라는 것이 우리 생을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라는 행복이나 구원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목소리를 높여 외친다고 해서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으려면, 어둠의 생활을 벗어버리고 빛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아주 여린 소리로 우리의 가슴속에서 방망이질치는 양심의 소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 시기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 우리가 죽을 것 같아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대신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인생에서 하나 둘 늘어가는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소리를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소리는 어떤 것이겠는지 들을 수 있는 은총을 청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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