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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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김광옥과 김정득, 김희성과 김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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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02 ㅣ No.795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김광옥과 김정득, 김희성과 김윤덕

 

 

신유박해 때 순교한 김광옥 안드레아와 김정득 베드로, 부친 김광옥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아들 김희성 프란치스코, 그와 함께 대구 감옥에 갇혔다가 순교한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의 삶과 순교를 살펴보겠습니다.

 

충남 예산군 여사울(신종면 신암리)에서 태어난 김광옥 안드레아(?~1801년)는 50세에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웠습니다. 외교인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날마다 신자들을 불러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기도를 바쳤습니다.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단식을 지켰고, 여러 가지 고행을 실천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매우 성실하게 덕행을 실천하였습니다. 이에 과격하고 사나운 성격이 젖먹이 어린이와 같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김정득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교리를 실천하였습니다. 1월에 예산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당했고, 두 번째 심문에서 현감에게 “현감께서는 임금의 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의 대왕이자 어버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감옥에서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얼마 뒤 청주로 보내졌다가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 김정득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십계명을 버리기 곤란하며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갑게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각각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보내 참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헤어져야 할 갈림길에 도착하자 그들은 “내일 정오에 천상 본향(本鄕)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8월 25일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치던 그는 형장에 도착하자 “기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하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다 마친 뒤 칼을 받았습니다. 형리가 그를 내리쳤는데 어깨만 스치자 그는 피를 닦고 형리를 바라보며 “귀중한 피요.”라고 하면서 평온하게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이가 60세 정도였습니다.

 

홍주의 대흥고을에서 태어난 김정득 베드로(?~1801년)는 친척인 김광옥에게 교리를 배웠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체포되어 홍주로, 또 청주로 이송되어 수개월 동안 심한 형벌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사형선고문은 “국가의 금지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제사는 폐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산골에 숨어 살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시켰다. 형벌과 신문을 받는 마당에도 모질게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고향인 대흥으로 이송되어 8월 25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김광옥의 아들인 김희성 프란치스코(1765-1816년)는 부친에게서 신앙을 배웠습니다. 김광옥은 체포될 때 가족들에게 자신의 길을 따를 것과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애를 베풀고 가족과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하느님을 섬기고 고행으로 영혼을 구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를 마음에 새긴 김희성은 일시적인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재산을 예산에 버려두고 경북 영양군 곧은장마을 근처 산 속에서 나무뿌리와 도토리를 먹으며 살았고,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금식을 지켰습니다. 그가 갖고 있었던 온화함은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습니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안동 포졸들이 쳐들어오자 아들에게 “이것은 하느님의 명이시니 나는 가야겠다. 그러나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남아서 가족들을 잘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잘 모시거라.” 하고 당부하고는 모친을 위로하고, 부인에게 자녀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주었고, 김종한 등과 함께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1816년 12월 19일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경북 상주의 은재(현재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1815년)는 장성한 뒤에 입교하였습니다. 1815년 2월 22일경 노래산 교우촌(현재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에서 부활대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 나약한 신앙을 드러내 배교하고 감영의 대문을 나가던 중에,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났습니다. 김 안드레아는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하였고, 그녀는 신앙이 다시 살아나 관장에게 말했습니다.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천주를 배반하였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 관장은 화가 나 심하게 매질을 하게 했고, 1815년 4월 말, 또는 5월 초 어느 날 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김광옥과 그의 아들 김희성,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던 김정득의 삶과 순교를 통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약해진 신앙으로 배교한 김윤덕에게 다가가 순교자 김종한이 던진 한마디의 권면이 그녀를 순교자로 이끌었습니다. 서로 이끌고 권면하면서 신앙을 살아가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경향잡지, 2010년 4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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