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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동양의 로마 나가사키를 가다 (상) 박해 피해 숨어든 신자들 250년간 신앙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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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22 ㅣ No.700

'동양의 로마' 나가사키를 가다 (상) 박해 피해 숨어든 신자들 250년간 신앙 전승

 

 

이키즈키의 순교자 니시 켄카의 돌무덤. 400년이 지난 지금가지 아무런 치장도 없이 보존되고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천주교회의 역사는 한국 천주교회와 무척이나 닮았다. 기나긴 박해의 여정을 거치며 수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것이 그러하다. 300년에 가까운 박해와 250년에 이르는 잠복 그리스도교 시기를 거친 일본 천주교회의 순교사는 그러나 한국교회와는 사뭇 다르다.

 

최근 몇 년새 일본 천주교회와 순교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순례자들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나가사키의 29개 성당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지로 등록되면서 더욱 그러하다. 총 신자수 45만명에 불과한 일본 천주교회에서 133개의 성당과 곳곳에 산재해 있는 순교유적지들, 질기고 모진 박해 속에서 부활한 오늘날 나가사키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순교의 땅’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들이 ‘신앙의 고향’이요 ‘동양의 로마’라 부르는 나가사키 순례를 통해 그 역사의 현장을 추적해본다.

 

 

가쿠레 기리스탄 공동체들

 

‘숨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뜻하는 ‘가쿠레 기리스탄’(잠복 그리스도교)은 일본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다. 일본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너뜨리고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금교령(1614년) 이후 250년 동안 기나긴 잠복 기간을 거친다. 1865년 3월 17일, 오우라성당에서 우라카미의 신자들과 뿌치잔 신부의 조우가 이루어질때까지 250년 동안 가쿠레 기리스탄들은 비밀교회를 만들어 그들만의 신앙을 유지해나갔다. 이키츠키와 소토메, 우라카미가 대표적인 가쿠레 기리스탄 공동체다.

 

- 히라도에 있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 전경.

 

 

히라도와 이키츠키(生月)

 

일본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 선교의 거점으로 삼은 히라도는 나가사키현 남서해 지역에 위치해 있다. 히라도에서 다시 30분 정도 바다와 산길을 가면 나가사키현 귀퉁이에 붙은 마지막 섬이 이키츠키(生月)다. 16세기 중엽 신자 수가 1300명에 달했던 이키츠키는 유럽 성가를 부르는 일본 최초의 서양음악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부의 박해는 이 작은 섬까지 몰아쳤다. 1587년 히데요시의 금교령으로 박해가 시작되자 1599년 고테타 일가는 600명을 데리고 나가사키로 탈출을 시도했다. 남은 신자들은 순교의 길을 택했다. 고테타 일가가 이곳을 떠날 때 관리직을 버리고 신앙을 지지하고 세례의 길로 인도한 니시 겐카 가족의 순교는 큰 감동을 준다.

 

2살 때 세례를 받고 미망인 우술라와 결혼한 니시 겐카는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딸 마리아의 시아버지 고발로 체포된 겐카는 배교 강요에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버리는 것조차 아깝지 않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며 대형 십자가에서 예수님처럼 못박히길 원했으나 거절당하고 참수형을 당했다. 남편이 처형되는 시각, 처 우술라와 장남 요한도 차례로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순교했다. 니시 3가족 순교자의 돌무덤은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하나의 치장도 없이 보존되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24일 시복됐다.

 

이키츠키의 많은 순교지 가운데 잠복시기를 거치면서 마을의 수호신이 되거나 신사가 된 곳도 있다. 특히 이곳에는 아직도 숨어 있는 200여 명의 가쿠레 기리스탄들이 있다. 이들은 잠복시대의 신앙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며 현재의 가톨릭 전례나 수계생활과는 변형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키츠키에는 가쿠레 기리스탄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관과 유네스코 문화재 후보지인 야마다성당이 있다.

 

나비 날개 문양을 본떠 7성사 가운데 성체성사를 표현한 이키츠키 야마다 성당의 장식.

 

 

하비에르 성인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히라도에는 성인 기념성당과 기념비, 성인의 히라도 입항 400주년 기념공원이 있다. 당시 성인에게 집을 제공하며 첫 신자가 된 기무라의 집터엔 비석만이 남아 있다. 히라도 마을은 유적지뿐 아니라 포르투갈, 영국, 네델란드의 문화를 공유한 거리가 볼거리를 제공한다.

 

 

소토메와 시츠교회

 

소토메는 가톨릭 작가 엔도우 슈사쿠의 작품 ‘침묵’의 배경지다. 나가사키에서 북서해쪽으로 40분 정도 가면 해안 깊숙한 곳에 조용하고 어머니 품 같은 소토메 마을이 나온다. 유난히 석양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박해를 피해 숨을 곳을 찾은 가쿠레 기리스탄들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외부의 눈에 띄지않는 이곳에서 “7대에 걸친 박해가 끝나면 로마에서 교황님이 보내시는 사제가 성모상을 모시고 저 바다를 통해 오리라”는 바스챤의 예언을 굳게 믿고 내일을 기다리며 살았다. 이 예언은 1865년 오우라성당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종교 자유 이후 이곳에 부임한 파리외방전교회 드 로 신부가 설립한 시츠교회는 일본 천주교회 성소의 온상으로 유명하다. 추기경 2명, 30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이곳 출신이다. 프랑스 귀족가문 출신인 드 로 신부는 농어촌의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어리공장과 빵 국수 제분공장을 만들고 방파제를 설치했다. 일본 최초의 마카로니공장도 세웠다. 전염병이 유행하자 구조원과 약국을 개설해 의료업을 시작하고 목판화를 찍어 교리를 가르치는 등 교육 문화사업과 상업에 힘을 쏟았다.

 

잠복 그리스도교 시대 '가쿠레 기리스탄'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관 내부. 당시 생활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민속박물관과 드 로 신부 기념관, 바닷가 환경에 맞게 독특한 모습으로 설계된 시츠성당, 엔도우 슈사쿠 문학관과 침묵의 비 등이 순례자를 맞는다. 소토메 신자들의 리더 바스챤이 머물던 움막도 가쿠레 기리스탄의 열정적인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우라카미

 

1614년 도쿠가와의 금교령으로 우라카미에도 순교가 시작됐다. 마을 전체가 신자였던 우라카미는 4곳에 비밀교회를 만들어 신앙의 맥을 잇는다. 1865년 오우라성당에서 뿌치잔 신부와 만남 이후 마을 신자 전체가 불교와의 단절을 선언하자 메이지(明治)정권은 3394명의 신자들을 21곳으로 6년간 분산 유배시켰다. 그러나 우라카미의 신자들은 이 유배를 ‘신앙여행’이라 불렀다. 유배에서 돌아온 신자들은 신앙자유를 얻은 것에 감사하며 황폐해진 우라카미를 일구었으며, 필사의 노력으로 30년만에 1925년 우라카미성당을 완성했다. 이 성당은 안타깝게도 1945년 원폭으로 파괴됐고, 성당은 이후 원형에 가깝게 재건됐다. 8월 9일 원폭으로 성모승천대축일을 준비하던 신자 24명과 사제 2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마을 주민 1만2000명 가운데 8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라카미는 ‘나가사키의 성자’ 나가이 다카시 박사와도 인연이 깊다. 이에 대해서는 ‘여기당’ 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교세 7000명의 우라카미성당은 나가사키대교구 주교좌본당이자 길고 긴 박해와 원폭으로 인한 폐허에서 신앙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 나가사키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해마다 평화기원제가 열리고, 매일 ‘나가사키의 종’이 시내 전역에 울려퍼지며 하느님 신앙을 알리고 있다. 우라카미성당엔 피폭성모상과 1597년 니시자카의 첫 순교 당시 12세로 최연소자였던 루도비코의 동상 등이 있다.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23일, 전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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