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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울산의 순교자,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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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20 ㅣ No.698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울산의 순교자,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

 

 

지난달 울산 복산성당에 다녀왔습니다. 부산교회사연구소가 주최한 제2기 성지안내 봉사자 교육을 위해서였는데, 150여 명의 수강생들로 그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복산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울산시 중구 남외동 567번지에 장대벌성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1868년 세 순교자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이양등 베드로(?-1868년)는 울산시 죽영리 교우촌(현 상북면 이천리의 대재) 회장으로, 본성이 착하고 꿀 장사를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1868년에 꿀 장사를 다니다가 체포되어 경주진영(경주 문화원 자리)에서 김종륜, 허인백 등과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당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있던 울산으로 이송된 그는 거기서도 신앙을 증언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장인 울산장대(將臺)로 나갈 때에 즐거워하고 용약하며 “천당 복 바탕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윗옷을 벗어 몸을 가리고,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1868년 7월 28일(음) 울산 순교자 세 분 가운데 두 번째로 순교하였습니다.

 

김종륜 루카(1819-1868년)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공주에서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평생 가족과 이웃에 화목하도록 힘쓰고 어느 누구와도 화목하게 지냈던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상주 멍에목(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으로, 언양 간월(울산시 상북면 등억리)로, 울산 죽영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던 그는 동정부부 순교자인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수기를 직접 필사하여 갖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경주포교에게 체포되어 울산 장대에서 첫 번째로 순교하였습니다.

 

허인백 야고보(1822-1868년)는 본래 김해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언양에 이사하여 살았습니다. 25세에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고신극기하면서 인내롭고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를 두고 ‘신덕자(信德者)’라고 하였습니다. 사순시기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양식과 옷을 나눠주었고, 나그네를 기쁘게 대접하였으며 병든 이들을 힘써 도왔습니다.

 

1860년 박해에 언양포교에게 체포되어 무수히 맞았고 50여 일간 옥에 구금되었습니다. 경주에서 “천주학을 하느냐?”는 물음에, “합니다.” 하고 분명히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곤장 20도를 맞고 큰 칼을 쓴 채 여덟 달 동안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짚신을 삼아 연명하며 전교사업에 쓰려고 푼푼히 돈을 모았습니다. 뜻밖에 풀려나게 되자, 울산 죽영리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밤에는 묵상하고 낮에는 책을 품고 산에 가서 나무그릇을 만들어 팔면서 살았습니다. 1868년에 경주포교에게 체포되어 갈 때에 집안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가면 영원이로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치명하신 바르바라의 일기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때 딸이 버선 한 벌을 주었으나 받지 않으면서, “내가 본디 세상에 적신(赤身)으로 태어났으니 적신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하였고, “너희들 봉교(奉敎)를 착실히 하여 후세에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경주에서 다른 신자들을 대라는 물음에, “본디 초동(樵童) 목수라 무식하여 남을 가르치지 못하고, 남에게 배우기만 하였으며, 설사 가르친 사람이 있을지라도 어찌 죽는 땅에 이르리요. 죽어도 혼자 죽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세 차례 형문을 받으면서 다리에서 뼈가 드러나고, 피가 많이 흘렀습니다. 이때 포졸들이 돈을 달라고 하면서 노줄로 톱질하여 다리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몸으로 작은 칼을 쓰고 이틀 만에 80리나 되는 울산으로 갔습니다. 울산 장대에서 자기 손으로 머리털을 젖히고 윗옷을 벗은 뒤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순교하였습니다. 울산 순교자 가운데 세 번째였습니다.

 

이들이 순교하자,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는 시신을 거두어 장대 인근의 강뚝 아래에 안장하였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박조예의 확인을 거쳐 현장에서 발굴되었으며, 그 유해는 유족들에 의해 경북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에 안장되었습니다. 1932년 5월 그 유해를 월배동 감천리에 있는 대구교구 교회 묘역으로 옮겨졌고, 1962년 10월 그 묘역 산상에 있는 성모상 앞의 석함에 옮겨져 안치되었다가, 1973년 10월 세 분의 유해 석함은 대구시 동구 신천3동에 있는 복자성당 구내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부산교회사연구소장 한건 신부는 제2기 성지안내 봉사자 수료식에서 “성지를 찾는 이들이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주시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안내로 순교자들이 순교한 울산 장대벌성지에서, 순교자들이 묻혀 계시는 대구 복자성당에서 그분들을, 또한 그분들이 갈망했던 하느님을 만나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09년 8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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